#청려문대 #엋문 지긋지긋한 공포게임. 주어진 엔딩을 모두 수집하고 드디어 완벽하게 클리어했다며 탈출밖에 안 남았다고...

지긋지긋한 공포게임. 주어진 엔딩을 모두 수집하고 드디어 완벽하게 클리어했다며 탈출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 보너스 엔딩 : 살인마 청려와 사랑하여 살아남으세요! ]
- ...진짜, 지랄을,
하다하다 살인마랑 사랑을 하란다, 미친 게임.
이런 공포게임 속에 갇히게 된 것도 사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 중에 과외 아르바이트라도 할까 싶어서 일자리 좀 찾던 중, 무료함에 시간을 떼울 거리를 찾았다.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도 했고,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공포게임. 살인마에게 납치 당한 시점에서 시작되며, 필요한 도구를 찾아 탈출하고 최종적으로 살인마에게서 벗어나 안전지대에 도착하면 끝나는 게임이었다.
가볍게 하자고 시작한 건데, 예상과 다르게 너무 몰입해버려서 기어코 엔딩을 보았고, 처음으로 탈출에 성공했을 때는 새벽 2시 45분. 잘 시간을 한참 넘었다. 자각하고 나니 피로감이 확 몰려왔다.
- ...
그래서 눈을 떴더니 공포게임 속이었다. 처음에는 대체 어떤 미친 새끼가 자택에 침입까지 하면서 성인 남성을 납치하냐고 혼란스러웠는데, 게임 세계라고 받아들인 건 참 쉬웠다.
[ 엔딩 수집 : #1 탈출 ]
이런 식으로 눈앞에 게임 창을 띄워줬거든.
- 진짜 지랄,
보자마자 든 생각은 진짜 X까라는 거.
- ...
맞다, X발. 이거 첫 시작이 납치였지.
[ 주어진 모든 엔딩을 수집하세요! ]
그렇게 나오는 빈칸이 19개.
- 아니, 탈출했대매.
- 개... X발...
19번 뒤지라는 거잖아, 이 미친 새끼들아.
죽으면 아프겠지. 진짜 뒤지게 아프겠지. 아니, 애초에 죽어도 살 수 있는 건가? 라고 하기에는 어차피 여긴 게임 속 세상이고 차라리 목숨을 끊는 게 현실로 돌아가는 빠른 방법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미친 시스템으로 인해 강제로 전이된 현실 사람이고, 얘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데이터에 불과하잖아. 내가 기계를 어떻게 이기냐고.
그래서 죽었어. 도망에 성공하고 겨우 거리를 벌렸다고 믿었는데 미친 새끼가 그 거리에서 정확하게 총으로 심장을 관통하더라고. 살이 까진 적도 많았고, 요리하다 손 좀 베어보기도 하고,
[ 엔딩 수집 : #4 총살 ]
진짜 뒤지게 X같더라. 다시 깨어나서 엔딩 하나 더 수집했다는 시스템 창이 떴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 하, 진짜 뭐, 어쩌라는...
이렇게 18번 더 뒤지라는 거지?
- ...
X발. 그래, 해봐. 내가 고양이보다 목숨 많네. 고맙다, XXX들아.
그래서 몇 번을 더 죽었다. 칼에도 찔려 보고, 차에도 치여 보고, 목도 졸려 보고, 조력자에게 배신도 당해보고,
[ 엔딩 수집 : #20 최악의 결말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라고 뜰 뿐이었다.
- 잔재주를 잘 부리네요.
살인마가 다가와서 말하는데, 그때 처음 이 새끼 얼굴을 자세히 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블랙으로 코디해서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까지 눌러써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좀 생긴 편이네. 근데 그래서,
- 어쩌라고.
- 다시는 보지 말자, XXX야.
너와의 지긋지긋한 악연도 이제 끝이야.
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눈 떠보니까 왜 처음 시작했던 그 지점으로 또 돌아온 거냐고.
이건 그렇다 치고,
[ 모든 엔딩을 수집하셨습니다. 보너스 엔딩이 해금됩니다.]
- ...
그러니까 말을 잃었다. 개미친 게임. 미친 제작사. 이거 진짜 어떻게 하지? 허탈해서 웃음도 안 나왔다.
다시 도구부터 챙기려는데 그때 난리치면서 크게 냈던 소음에 살인마 청려가 문을 열고 등장했고,
- 열쇠가 거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기는, 내가 이 게임을 X발 몇 번째 재시작하는데, 뭐 그렇게 대답하기도 전에,
[ 엔딩 수집 : #4 총살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다시 시작했다.
그러니까 진짜, 엔딩 다 수집했다고 끝난 게 아니네? 보너스인지 미친인지, 그것도 모아야 한다는 거네? 이미 이 게임에 들어온 이상 현실을 따질 것도 없었다. 빠르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번엔 조용히 수갑을 풀어내고 시스템을 확인했다.
이건 딱히 힌트가 없는 건가. 보너스니까 어떤 엔딩인지 알려주는 건가. 그래서 그게 뭐
[ 보너스 엔딩 : 살인마 청려와 사랑하여 살아남으세요! ]
지랄하지마. 이거 공포게임이잖아. 왜 갑자기 장르가 바뀌었냐고. 이거 미연시 아니라고. 공포게임이면 공포게임 답게 행동해.
- 진짜 이 X발...!
결국 참지 못하고 욕이 입밖으로 나갔더니,
- ...
- ...
- ...하하.
청려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 엔딩 수집 : #4 총살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X발.
- ...진짜 사랑하라고?
- 친근하게 군다고 살려줄 거라 생각하나본데, 안타깝네.
아니, 인사밖에 안했잖아. 야이,
[ 엔딩 수집 : #4 총살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진짜 답없네. 이거 애초에 깨라고 만들어진게 맞기는 해? 아니, 말 거는 순간 죽이는 놈을 어떻게 하라는 건데?
그래서 원래 시나리오대로 도망쳤다. 미친듯이 도망다니면서 무기도 빼돌려보고, 최대한 대화할 수 있게 환경을 마련해보려고 하는데,
- 이렇게 미꾸라지같은 것도 재능인데 유언 정도는 들어줄게요.
- 음?
-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
[ 엔딩 수집 : #14 추락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이딴 엔딩이 있을 줄 알았으면 그렇게 간절하게 엔딩 안 모았다고. 다채롭게 죽으려고 고민해서 뭐하냐.
- 죄송한데 제 이야기 한 번만 들어주실래요?
[ 엔딩 수집 : #9 도로 위 참극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 안녕하세요, 탈출한 뒤로는 오랜만이네...요?
[ 엔딩 수집 : #2 묻지마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그만해, 이 X발.
[ #64 아이템을 발견하였습니다. ]
이거 설마.
우선 도망쳤다. 어차피 안에서 말을 걸어봤자, 또 다채롭게 죽을 게 분명했으니까. 대체 어떻게 이놈과의 접점을 만들어야 하나. 고민하던 도중, 청려는 또 바짝 추격했고, 죽음을 다시 눈앞에 둔 채, 총을 든 그와 마주했다.
문대가 침을 한 번 삼켰다. 죽기 직전 뭐든 부딪혀보기로 생각했다. 될 대로 돼라.
- 다음 생에는 부디 대화 한 번 했으면 좋겠네요.
- ...
- 신... 재현 씨?
- ...하,
- ...
- 하하하!!!
청려가 날 죽이지 않았다. 그래.
- 다시 말해봐요.
신재현이 날 처음으로 죽이지 않았다.
- ...
101번째 재시작 중 일어난 일이었다.
- ...신재현 씨.
- 네.
- ...네?
- 대답했잖아요.
이름 부른 거에 대답했다는데 뭐 어쩌라고. 살인마답게 예측할 수 없는 말이었다.
- 대화하고 싶다면서.
- ...
- 당신의 다음 생까지 내가 기다려 줄 수 없잖아요?
아니, 나는 다음 트라이 때 너 만날 생각이었는데.
- 뭐, 사실 정말 죽고 싶었다면 내가 마다할 이유는 없죠.
- 그 총 진짭니까?
아니, X발. 이게 아닌데. 당연히 진짜겠지.
- 아, 이거?
- ...
- 어떨 것 같아요?
어떨 것 같긴. 뭐라고 대답해도 저게 살인 도구라는 건 변하지 않잖아.
- ...장난감이면 참 좋겠네요.
- 장난감이면 좋겠어요?
다정한 척 사람 말을 따라하며 웃었다. 저건 다정이 아니라 살벌한 거다. 쓸데없이 톤 살짝 높여서 유치원 선생님 같은 말투 장착하지 말라 이거야.
탕-
신재현은 총을 쐈다. 그러니까 나를 향한 건 아니었다. 총구는 하늘로 향했고, 총알은 구름을 뚫을 기세로 빠르게 사라졌다. 이게 게임 속이긴 하구나. 아무리 새벽이라고 해도 총성이 이렇게 울리는데 그 누구도 튀어나오지 않는 걸 보면.
- 짜잔.
- ...
- 장난감.
라고 한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지? 내가 저따 대고 와, 불꽃놀이네요. 라고 박수라도 보내줘야 할까? 좋은 구경 시켜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할까? 아니, 그건 전부 다 죽음으로 가는 직행 열차지.
- 응?
- 그 안에 있는 칼도 장난감이겠네.
문대는 재현이 입고 있던 자켓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오른쪽 가슴 부근을 말이다. 총을 오른손으로 쏘는 탓에 그가 보통 오른손으로 칼을 쥘 거라 생각하겠지만, 아니었다.
- 이런 장난감 되게 좋아하나봐요?
그리고 재현이 정말 자켓 안으로 왼손을 넣어 칼을 꺼냈다.
- 뭐... 처음 봐서 정말 신기하네요.
그렇게 대답하니 별안간 제 자켓을 그어버렸다. 자켓의 손목 부분이 너덜너덜해졌다.
- 좋아요.
- 예?
- 좋다고요.
뭐가 좋은데. 아무리 살인마라고 해도 기초 교육은 받고 자라지 않나? 육하원칙 몰라? 주어 빼지 말라고. 무엇을, 그거 중요한 거 몰라?
- ...나를요?
솔직히 스스로 뱉으면서 어이가 없었다. 겠냐고. X발. 진짜 퍽이나 그러겠다. 신재현도 어이가 없는 건지, 아니면 정말 마음에 든 건지 몰라도 또 웃었다.
- 그런 걸로 해줘야겠네.
- ...예?
- 놔줄게요.
- 예?
- 지금 놓아주겠다고요.
뭘 놓아줘? 그리고 대체 뭘 그런 걸로 해주는데? 또 멋대로 문장을 완성해버리는 신재현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그랬더니 갑자기 들고 있던 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 ...
- ...
정확하게는 내 어깨와 얼굴 사이로, 일부러 명중하지 않았다. 이 미친 새끼의 꿍꿍이가 뭐지. 또 뒤돌아서 도망치면 종아리에 칼 쳐박거나 총알로 심장 뚫으려고?
- ...뭐?
진심이야?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 싫어요?
- 아뇨, 그게 아니라,
네가 그렇게 봐줄 놈이 아닌 걸 아니까 그렇지. 그래도 지 입으로 이렇게 꺼낸 건 처음이니까
- 눈 감으세요.
- 응?
- ...눈 감아준다면서.
- ...
- 그러니까 진짜 감으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확실히 흥미로운 게 사실인 듯했다. 신재현은 휘었던 눈꼬리 그대로 눈을 감았다. 진짜지. 저 새끼가 나 봐주는 거 맞지.
- 그래요.
그대로 문대는 그의 시선을 피해 달아났다. 재현은 아주 느릿하게 30초를 셌다. 말이 30초지, 숫자를 서른까지 센 것으로 아마 시간은 거의 그보다 두 배 이상은 흘렀다. 당연하게도 눈을 떴을 때는 문대가 제 눈앞에 존재하지 않았다.
- 흠.
다음에 만나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
한편 문대는 무사히 도망친 후, 긴장감에 굳어있던 다리가 완전히 풀려서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 ...X발.
나 저 새끼랑 사랑해야 하는데 도망쳐서 뭐하냐고.
- ...
그렇게 우선 재현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1순위, 그러면서도 그와 마주하면 어떠한 말로 흥미를 유도하고 시간을 끌지 계속 생각했다.
언제나 은신처를 옮겨가면서 요리조리 피했다고 여기면, 꼭 한번쯤 방심하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게 지금이었다. 대충 3일 쯤 지났을 때였나.
- ...
아니,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네. 여기 날씨는 매번 이랬는데. 재시작할 때마다 변함없는 서늘한 날씨에 문대가 의문을 품었다.
- ...!
그렇게 고민하니 갑자기 머리 옆으로 뭐가 스쳐지나갔다.
- ...
단검이었다. 그리고 휘날린 머리카락이 그대로 몇가닥 우수수 잘린 것은 덤이다.
- 보고 싶었어요. 우리 오랜만이네?
이런 걸 던질 사람? 그래, 당연히 신재현이지.
- 사실 하루 좀 쉬고 다시 좀 찾아봤는데 사람이 진짜 숨바꼭질에 재능이 있어. 아, 칭찬이에요.
- ...예, 감사하네요.
- 뭐하고 지냈어요?
- 그냥 먹고, 자고... 그렇게 지냈죠.
아니. 그런데 설마 이 새끼가 다음 시작 때 달라지면 어떻게 하냐고.
그래서 또다시 한 번 질질 끌어보기 위해 대화를 좀 이어가려하니, 신재현은 늘 그랬던 것처럼 또 총을 들었다. 미친 살인마. 누가 그렇게 웃냐고.
- 당신 생각하면서.
영광이다, XXX야.
물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문대는 다급하게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수집한 아이템 중에 연막탄 같은 게 있지 않았나? 좀 뒤져보려고 하다가,
- 뭘 그렇게 꼼지락거려요.
- ...아니, 그러니까,
이거 진짜 설마 내 예상이 이번에도 맞는다면, 문대는 다급하게 오늘이 며칠이었는지 계산한다.
- 왜요, 이번에도 유언이 필요한가?
- 네.
- 이번에는 어떤 거요?
- ㄱ, 광장에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대는 입을 다물고 시계탑만 빤히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재현이 이젠 도움도 요청하지 못한다며 허망함을 느낀다고 여겼다. 더 이상 봐줄 것도 없었다. 참 유감이라며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분침과 시침이 함께 위를 향하며 완벽하게 겹쳐지는 순간, 타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문대가 그 시간에 맞춰 뒤를 돌았다. 총구가 자신을 향하는데도 똑바로 바라보았다.
[ 아이템 정보 : #64 비밀 사진 ]
사진 속에는 신재현이라는 명찰을 단 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 뒷면에는, 1127. 이라는 숫자가 남겨져 있었다.
- 신재현 씨.
- ...
- 생일 축하합니다.
오늘이 이 새끼 생일이야.
- 좋아요. 이번엔 내가 부탁할게.
- ...
- 나 당신이랑 대화해보고 싶어요.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무기를 미련 없이 바닥에 버렸다.
- ...어떤 대화?
네 이름은 어떻게 알았냐고? 오늘이 생일인 거 그냥 때려맞춘 거냐고?
- 이름.
- ...
- 나이.
- ...
- 생일?
- 신재현 씨 이름을 알게 된 건,
- 아니, 그거 말고.
- ...
- 당신 이름.
- ...박문대.
- 문대?
- 네.
- 좋아요, 문대 씨.
- 네, 네?
- 집 어디예요?
- ...
- 우리 집으로 갈까요?
- ...뭐?
뭐, 이 새끼야?
-
그러니까 정말 얼떨결에 따라갔다. 누가 들으면 비웃다 못해 미쳤냐고 기겁할 이야기였다. 내가 거기서 대체 몇 번을 탈출했는데 이젠 하다하다 제발로 돌아간다.
- ...에?
- 왜요?
- ...아니, 그,
그런데 도착한 곳은 멀쩡한 아파트. 이상하다. 이 새끼 집은 분명 2층짜리 단독 주택이었고,
- 아.
- ...
- 그건 작업실.
눈치 챈 재현이 대신 대답했다. 문대는 더 소름이 돋았다.
- 무슨 생각해요?
- 취, 취미가 참 멋있네...
이게 아니잖아.
- 푸흡,
- ...
- 일단 들어와요.
슬리퍼 신으라며 내주는데 압정 깔아둔 건 아니겠지. 발끝을 조심스럽게 옮기면서 확인하고, 그의 집에 입성했다.
- 커피 마셔요?
- 네, 뭐... 주시면 잘 마십니다.
손 씻고 앉아있으라는데, 가시 방석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재현이 내온 커피. 여차하면 입만 대고 버리려 했는데 어서 마시라는 듯 웃는다. 진짜 독살이라면 그래, 유감이다.
- 아, 좀 미지근하게 줄 걸 그랬나요?
- 아뇨, 괜찮습니다.
덕분에 조금 튀어버린 커피. 어서 닦으라며 휴지까지 건네는데. 진짜 이거 뭐지?
- 음...
- 왜 그러십니까?
- 이런 걸 두고 데이트라고 하는 걸까요?
- 크흡,
- 상당히 덜렁거리는 구석이 있네요. 도망은 잘 치면서.
- ...아, 네.
이건 덜렁거리는 문제가 아니라고. 그래, 당장 이 커피에도 독은 없고,
- 데이트라는 건 무슨 이야깁니까?
- 원래 이런 게 데이트라고 하지 않나.
- ...
그게 틀린 건 아닌데, 또 정답이라고 하긴 애매하다.
- 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데이트라는 것 자체가 통상적으로 쓰이는 의미로는...
- 음?
- ...그게,
- 말해봐요.
침착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자신이 플레이하는 건 범죄, 스릴러, 공포 게임이 아니라, 달달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 ...
- ...라고, 드라마나 소설에서,
땀이 많은 편도 아니고, 집 안에 더운 것도 아닌데 손이 자꾸 끈적거렸다. 긴장한 것이다. 어쨌든 제 말 뜻을 이해하려고 하는지, 잠시 턱을 괴며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 네?
- 우리 친구예요?
...겠냐? 칼 휘두르고 총을 난사하는 친구가 세상에 어딨냐고.
- 아마... 아닐 걸요?
라고 대답하니, 이번엔 빤히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데. 혹시 손목 안에 작은 꼬챙이를 감춰놓고 찌르려고 탐색하는 건지.
- 그러면 데이트해도 되는 관계?
- 예?
- 아니에요?
제작사 나와. 이 새끼한테 살인 관련 기술만 먼치킨으로 부여하고, 기초 지식 진짜 안 준 거 맞지?
- 우리 친구 아니라면서요.
- 그랬죠?
- 친구 이상의 관계가 하는 거라면서.
- ...
- 우리 친구 이하인가?
- 데이트, 그거 맞는 것 같기도요.
진짜 제작사 나오라고. 내가 왜 살인마랑 데이트하는 관계가 된 거냐고. 제발.
- 그래요, 일단 자요. 피곤해 보이네. 자꾸 대답이 좀 늦는 거 보면.
- 예? 제가요?
- 네.
이거 그 패턴 아닌가. 대답 느리다고 답답하다면서 죽이는 거.
- 집 없다고 했으니까 자고 갈 거죠?
- ...
- 응?
- ...네.
아니라고 하면 그것도 도망 취급하면서 죽일 게 뻔하니까. 무슨 말만 해도 죽임 당할 거라고 패턴 생각하는 내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
- ...
진짜 알 수 없는 데이터다.
- ...진짜 뭐냐고.
그런데 애초에 잠이 오겠냐, 여기가 누구 집인데.
- ...네?
- 가요, 데이트.
문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째 아침이라기엔 아직 어두웠다. 문 바로 옆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 ...
누가 새벽 5시부터 데이트를 나가는데. 제작사야, 제발.
- ...그냥 가는 거라고요?
- 드라이브. 그것도 데이트라면서요.
- 대체 누가 그걸 새벽부터
- 피곤해요?
- ...아뇨.
그러면서 안전벨트를 괜히 꽉 쥐는 문대에게 재현이 말했다.
- ...
- 음,
- ...
- 약속?
신호가 멈춘 틈을 타 새끼손가락까지 내미는 재현이었다. 문대는 느릿하게 다가가 손가락을 아주 살짝 걸치는 정도로 완전히 꺾지 않았다. 그리고 신호가 출발하자 퍼뜩 손을 치우고 괜히 안전벨트만 잡는 문대였다.
- 깼어요?
- ...
- 영화 보러 갈까?
해가 꼭대기에서 점점 내려오고 있는 한낮이었다.
- 아.
- ...
- 실수.
온갖 쇠가 부딪치면 진짜 끔찍한 소리가 나는구나.
어쨌든 알 수 없는 하루였다. 영화도 보고, 나한테 밥도 사주는데,
- 잠깐 내릴래요?
- 네.
새벽 5시부터 대체 뭘 하고 싶은 건가 싶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금방 갔다. 아무래도 오전은 자느라 날려먹기도 했고, 중간에 그 괴상한 영화도 봤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당연히 그를 따라 순순히 내리고 앞장 서서 걷길래 그의 의도만 추리하면서 뒤로 따라 걸었다. 그렇게 스무 걸음 정도 걸었나. 갑자기 신재현이 뒤를 돌았다.
- 왜요?
- 손.
손바닥을 내보였다. 잡아달라는 의미인가. 문대는 그 손을 빤히 보았다. 생각해보니, 이번에 처음으로 이 사람의 장갑 끼지 않은 맨손을 보는 거였구나.
- 안 잡아요?
- 아뇨.
- 저기요, 신재현 씨.
- 네?
그래서 좀 확인하려고 했다.
-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호감도를 확인할 수도 없고, 살인마의 감정을 읽어낼 능력따위 없으니, 대놓고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주제 넘은 말이라며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 아주 많죠.
- 어떤 의도로요?
그게 그렇게 궁금하냐는 듯 웃는 모습이었다. 궁금하다 못해 간절해야 하는 처지다. 내가 현실로 돌아가는 게 네 감정에 달려 있으니까.
재현이 되물었다. 문대에게 직접 도달해 보라는 듯 던져주었다.
- ...좋은 의도면 좋겠네요.
- 그러면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는 손을 놓고 방향을 틀었다. 차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였다. 문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금방 쫓아갔다.
그렇다고 여긴 여전히 현실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대답했으니 정말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 침대가 피로 물들지 않고, 눈을 뜨면 어두운 천장이 아니라 햇살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거지.
- 아, 덕분입니다.
- 못 먹는 거 있어요?
- ...딱히 없습니다.
적응할 수 없는 전개. 감히 예상하기 힘든 패턴. 살인마 청려를 파악하는 건 이제 그만두고, 인간 신재현을 파악하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수틀리면 무조건 내쪽이 죽는다고 생각했다.
- 오늘은 가고 싶은 곳 따로 없어요?
- 굳이 안 가고 집에 있어도 될 것 같은...
- 그러면 가볍게 마트나 다녀올래요?
- ...아, 네.
- 옷 갈아 입는다더니 왜 뺨을 치고 있어요?
- 아, 그냥 벌레가 있는 줄 알고.
하루, 이틀, 일주일, 점점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니까 혼란스러웠다.
[ #68 아이템을 발견하였습니다. ]
그렇게 살 궁리로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고 생각했는데.
- 문대 씨.
- 예?
- 즐겁다.
- 어떤 부분이요?
- 이렇게 데이트한다는 거.
- 그런데 문대 씨는 왜 맨날 나 보면 무서워할까.
- 이제 나 안 무서워해도 될 것 같은데?
누가 이 게임 공략법 좀 알려줘, 제발.
튕긴다는 게 이 새끼를 경계한다는 것도 있는데, 이건 내 자신을 경계하는 것도 맞았다.
- 요리 잘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칼질하는 건 뭐예요? 아프지도 않나?
남의 장기 구경하기 바빴던 놈이 작은 상처에도 치료해주는데 이건 내가 멀쩡한 게 더 말이 안 된다고.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 왜... 죽이려고 했습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 글쎄요.
- ...
- 잘 모르겠네.
- 농담하지 말고,
- 진짜로.
- ...
- 잘 모르겠다고요.
게임 설정상 신재현의 살인 동기는, 어린시절 부모님이 부당한 죽음을 맞이한 이후, 살인범에 의해 거둬졌고,
- ...그래요.
정말 데이터가 이상하다. 신재현은 입력된 명령어에 따라서 움직이는 게임 속 캐릭터에 불과한데,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거지? 차라리 100번을 더 죽을걸 그랬다고.
- 내가 이런 짓 더 이상 안 했으면 좋겠다는 의도로 꺼낸 말이에요?
- ...그건 당연하긴 한데.
- 그러면 차라리 제대로 부탁해봐요.
- ...
- 같이 살자고.
오류난 데이터 쪼가리한테 감정이 생기잖아.
그러니까 더 큰일이 생기기 전에 서둘러 빠져나가야겠다. 보너스 엔딩을 얼른 수집해야해. 내가 감정이 생겼다는 건 뭐, 나쁜 건 아니지. 엔딩 수집의 조건이 살인마'와' 사랑한다는 거니까. 게다가 저쪽도 내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는 것 같으니 긍정적인 거지.
가장 유력한 건 이거였다. 외국도 아니고 국산 게임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하면 역시 고백이지. 정말 간질간질한 걸 원한다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고백일 테고.
그 말을 어떻게 끌어내느냐가 이제 관건인 것이다.
문대는 이젠 재현에게 겁을 먹지 않고,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로 생각했다. 둘이서 하는 게 사랑이라면, 무조건 그를 좋게 봐야 했고, 억지로 콩깍지를 장착하는 게 맞았다. 뭐, 데이터에게 감정이 생겼다고 인정한 순간부터 사실 그럴 필요가 없긴 했지만.
- 주말에 어디 가자고요?
- 네.
한가로운 낮, 커피를 내리는 재현이 부드럽게 물었다. 은은한 커피 향이 나는 집 안, 추운 날씨와 다르게 따뜻한 집 안으로는 햇빛이 들어오니 그게 참 진풍경이었다. 문대는 커피 한 잔을 받으며 대답했다.
- 생일?
- 네.
물론 현실에서도 생일을 잘 챙기진 않았다. 어쩌다가 설정해둔 메신저 개인정보를 통해 축하 받고 나서야 생일인 걸 자각한 적도 있었다. 태어났을 뿐인데 그걸 굳이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문대의 말을 들은 재현이 조금 생각에 잠겼다.
- 아, 사실 생일이 특별한 건 아니라서.
- 특별한 건 아닌데 왜 갑자기 특별하게 챙기려고요?
항상 머뭇거리던 모습을 보여주던 문대가 침 한 번 삼키고 담담하게 말했다.
- 신재현 씨랑 같이 보내고 싶어서요.
- 그거 되게 듣기 좋은 말이네요.
- ...
-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거는?
잘하면 엄청난 생일 선물을 받을 수도 있다.
주말 전까지 그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솔직한 모습을 보였다. 만약 현실에서 살인마 청려가 아닌 평범한 신재현을 만났다면 이렇게 지내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대했다.
- 왜 그동안 요리 안 했어요?
- 혼자 먹던 거라 남한테 선보이기는 좀,
는 무슨, 주방에서 등 보이다가 칼 찔릴까봐 나서지 않은 게 버릇 들여진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부디 스며들어서 네가 내게 사랑을 고했으면,
그렇게 다가온 생일. 재현은 문대에게 저번에 말했듯이 같이 데이트하자고 하였다.
- 이게 무슨.
- 생일이라고 했으니까.
괜히 미안하다는 식으로 말하며, 고기를 느릿하게 썰었다.
- 왜요.
- ...
- 시계탑 프러포즈 너무 멋있었는데.
보통 그건 그저 타이밍이 맞았다고 하는 거다. 그게 낭만적이라며 좋다고 하면 찬물을 끼얹을 이유도 없지.
- 음식 좀 입맛에 맞아요?
- 아, 네. 좋네요.
사실 이 레스토랑도 이미 알고 있었다. N번째 재시작 중 그에게 쫓기면서 레스토랑에서 테이블을 다 뒤엎고 다니며 추격전을 벌인 적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그가 좋아하는 드라이브. 왜 이렇게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목적지 없이 달리는 자유로움이 좋거나, 운전하는 행위 자체가 좋거나, 여러가지 이유겠지.
- 운전 안 힘드세요?
- 딱히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아요.
-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 조수석에 문대 씨가 있으니까 그런거지.
아, 어쩌면 진짜 끝이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 야경 보는 거 좋아하세요?
방금까지 내내 드라이브하던 사람이 굳이 이렇게 또 전망대를 찾을 이유가 있나해서 문대가 물었다. 물론,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확실히 다르지만, 둘 다 어쨌든 야경이라고 표현하지 않던가. 재현이 말했다.
- 그렇죠.
- 안 가본 곳까지 같이 가보자고.
- ...
- 그런 의미인 거죠.
아, 지금이라면 좋은 타이밍이 아닐까. 색색의 조명이 어우러진 야경을 배경 삼아 제게 웃어보이는 재현과 문대가 마주보며 한참 말이 없었다. 시선을 끝없이 얽히다가 재현이 먼저 말했다.
- ...좋아, 합니다.
- ...
- 제가 신재현 씨를요.
절대 고백이 툭 튀어나오는 게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심장도 그걸 알고 있다는 듯 눈치껏 미친듯이 쿵쾅거리는 게 정말 마지막 순간이라고 믿었다. 이제 그가 대답만 해준다면,
- ...예?
- 이만 집으로 돌아갈까요? 오늘 제법 오래 밖에 있었는데?
딱 잘라 버렸다. 어라, 이게 아닌데. 공중에 흩어져버린 제 고백에 벙져서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다리가 땅에 뿌리를 내렸다. 진짜 이런 경우의 수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 귀여워서.
- ...
- 좀 나중에 말해주려고.
- ...
- 어서 집으로 가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문대는 여전히 좀 충격이었다.
- 곧 문 닫는대요, 얼른 와요.
- 아, 네.
나중에 말해준댔는데도 왜 초조한 마음이 드는 걸까.
다음 날 아침이었다. 눈을 뜬 건, 알람 때문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 것도 아니었다. 예민해진 귀가 신재현의 발소리를 눈치채고 멋대로 반응하며 딱 눈이 떠졌다. 그랬더니, 신재현은 잘 잤냐면서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는데 이게 참 묘했다.
그렇게 해달라고 대놓고 요구하는 것도 나름 방법이겠지만 왜 굳이 그렇게 재촉하냐고 오히려 뒷걸음질칠 수도 있고 나중에 말해준다고 분명히 말했으니 우선은 기다려야 했다.
- 네, 뭐... 그렇게 되네요.
- 아하.
- ...형이라고 해드려요?
- 아뇨. 딱히? 차라리 말 놓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국내에서 만든 캐릭터지만, 나이를 유별나게 따지는 그런 꼰대 성향은 아닌 건가.
- 우리 친해보이잖아요.
- 친하다면 좋은 거네요.
- 당연하죠.
- ...이게 뭐야?
- 팔찌요.
- 아니, 그 팔찌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닌데.
- 아, 생일 선물.
- 말고는?
- 응?
- 그거 있잖아.
- 팔찌 잘 어울리네요.
- 집에서도 차고 다니니까 고민한 보람이 있네요.
누가 저 모든 감정과 눈빛과 말투를 속여내. 데이터는 그렇게 섬세하게 움직이지 못한다고.
방 안에서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내가 놓친 단서가 있는지 살폈다. 지금까지 수집했던 아이템들을 하나씩 꺼내보았다. 딱히 수확은 없었다. 그러다가 또 눈길을 끈 64번째 아이템. 사진이라 확대가 되지만,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밖으로 끌어냈다.
- 이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누구에게나 순수한 시절은 존재하고, 특정 계기가 생겨서 비뚤어지는 거니까 혹시 생일날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한 건가.
그때였다.
- 저녁은 뭐 먹을,
- ...아, 아무거나.
- ...
- ...
분명히 노크와 함께 들어온 신재현이었지만, 두어 번 두들기고 바로 열리는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 ...이게 대체?
- 그건,
그래, 빌어먹게도 하필이면 사진이었다. 많고 많은 아이템 중에 재수없게도 그걸 빠뜨렸다. 누가 봐도 제 사진이었다. 단순 복사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사진 상태였다.
- 이거 내가 뭔지 너무 잘 알거든요?
- ...
- 그리고 이게 어디 있는지도 알아요. 당연하죠, 내 물건인데.
- ...
- 그런데 어떻게 2개냐는 거예요.
- ...사랑한다고 하면,
- ...
- 말해줄게.
미쳐버린 뇌가, 위기감을 느끼고 강제 종료를 선택했다. 내내 매달리지 않다가 갑자기 고백해달라며 사랑을 운운했다. 당연히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다.
- 게임이야.
- 네?
- ...여기 게임이라고.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다면, 이또한 방법이었다.
- 나는,
- ...
- 너에게 수십 번을 살해 당한 플레이어야.
- ...
- 내가 그래서 너 무서워했던 거고.
재현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문대였다. 그래, 너도 똑같이 머릿속이 뒤집어져서 방심해줘. 재현은 침착하게 문대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내가 납치했다고 생각한 그가 탈출하고, 그를 쫓다가...
생각해 보니 그는 기이할 정도로 제 패턴을 꿰뚫고 있었다. 이게 그냥 우연이 아니라면,
- 그런데 나는 다 괜찮으니까, 그냥 사랑한다고 한 마디만 해줘.
- ...
- 나 그거면 돼. 여태껏 죽어도 잘 되살아났거든.
-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고하면,
- ...
- 당신이 날 떠나는 거구나.
신재현이 스스로 깨닫고 말았다. 문대는 설마 여기까지 깨우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아니야.
- 아니라면 말해요.
- ...
- 내게서 꼭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뭔지.
여기서 변명을 해야 하는데, 그래야 내가 살아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데.
- 내가 너를 사랑해서,
- 그거 거짓말이잖아.
- 아니라고.
- 내가 고백하면 다시는 안 나타난다는 거잖아요.
- ...
- 이래도 진짜 아니에요?
- ...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허탈하게 웃으며 총을 내려놓았다.
- 어차피 되살아난다고요? 그래서 내가 몇 번이나 당신을 죽였고,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아요?
- ...
- 아니.
- ...
- ...내가 당신을 어떻게 죽여요.
- ...여기 남아 있어요.
그렇게 말했다. 이게 말이 돼? 이딴 헛소리를 믿어주는 것도 모자라서 날 죽이지 못한다고?
- 그만해, 차라리 나 죽이라고. 제발.
- 사랑하지도 못하고, 죽이지도 못하면 네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신재현은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 히든 엔딩이 수집되었습니다. ]
중복된 엔딩 수집도 아니었고, 그토록 염원하던 보너스 엔딩도 아니었다. 히든 엔딩.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데. 너무 오랜만에 돌아와서 어색했지만, 현실을 서둘러 받아들이고 묶인 손을 풀어냈다.
- ...미친 새끼.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네가 날 죽인 것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은 것도 아니야.
[ 히든 엔딩 : # Special 살인마의 말로 ]
나를 보낼 수도 없고, 나를 죽일 수도 없는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고통 없이 재시작했는데, 내 정신이 온전치를 못 했다. 원래 내게 재시작이란 꼭 죽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였는데, 내가 아니라 타인의 죽음으로 이렇게 되돌아 오다니, 이럴 수가 있는 걸까.
포박에 사용했던 줄을 끊어낸 날붙이를 보았다.
- ...
오류가 났다고 해. 지금이라도 시스템에서 내가 신재현이 사랑했다는 걸 인정하고 보내달란 말이야.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그래, 진짜 최악이다.
[ 엔딩 수집 : #20 최악의 결말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이건 최악이라고. 최악 외에는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저 최악 그 자체다.
[ 엔딩 수집 : #20 최악의 결말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수없이 난도질하고, 미친 시스템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겠다고 온갖 발악을 하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이게 대체 몇 번째 재시작인지 알 수 없었다. 100이든, 200이든, 300이든 그게 중요한가. 내가 못 벗어나는데.
그래. 내가 이런다고 달라질 게 없구나. 다시 마음을 다잡고서 엔딩을 모으기로 하였다. 신재현의 흥미를 끌어내는 건 어떻게 하는지 이제 잘 알았잖아. 그런데 내가 네 이름을 멋대로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어. 문대는 눈을 깜박이면서 가만히 기다렸다.
- ...안녕, 신재현.
문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
굳이 도망치지 않고 이러는 이유는, 너무 많이 지쳤다. 그래, 간절하게 도망칠 의지가 사라졌다.
정말 얌전히 기다렸다. 확인하러 오면서 일어났냐고 물어보고 자비 없이 총을 겨누는 그림을 상상했다.
원래 공략법은 방에서 탈출하여 알맞은 통로로 탈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대는 재현이 작업실이라 칭했던 이 집에 있는 모든 공간을 다 열고 다녔다. 그안에 무엇이 있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라고 만들어진 캐릭터였으니까.
- ...
신재현이 보이질 않았다. 대체 어째서? 그제야 정말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문대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대로 어딘가를 향해 뛰었다. 이건 서둘러 확인해야만 했다.
문대는 재현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찾아갔다. 하지만 벨을 아무리 눌러도 응답이 없었고, 기억에 의존하며 비밀번호라도 두들기고 싶었지만, 언제나 카드 키로 열었던 지라 문고리를 쥐어뜯어도 해결할 수 없었다.
이 세계에 신재현이 대체 왜 없는 건데. 이게 진짜 무슨 일인지 설명이나 해봐. 히든 엔딩을 모으면 혹시 살인마가 아예 사라지는 거야? 아니면 그저 단순한 버그야? 오류냐고.
플레이어는 외부인에 불과하잖아. 그저 이 세계를 흐트러뜨리는 존재일 뿐이잖아.
어쩌면 한 번의 오류일 수도 있었다. 이번 시작 때 잠시 시스템이 이상해진 것 뿐이다. 문대는 아파트 비상구로 달려가 창문을 열었다. 진짜 더럽게 비좁네. 어떻게든 그 틈으로 몸을 구겨넣었다.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다시 돌아왔을 때 문대는 결심한 듯,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구속을 풀어냈다. 재빠르게 문에 걸린 자물쇠도 풀고, 거의 부술 기세로 열었다.
- ...
그런데 이번에는 문앞에 신재현이 있었다. 문대가 순간 당황할 뻔했지만, 바로 안심이 되었다. 그래, 정말 오류가 맞았던 거구나. 너 아직 이 세계에 존재하는구나.
- 아, 안...
이제 준비했던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 나를,
- ...
- 사랑해요?
신재현이 먼저 말했다.
항상 그는 이런 때에 마주치면, 어떻게 빠져나왔냐면서 알 수 없는 웃음만 지었다. 문대는 재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 ...너 다시 말해봐.
이건 살인마 청려가 아니라, 내가 아는 신재현이잖아.
- ...나를 사랑하냐고,
- ...
- 그렇게 말했어요.
- ...
- 생각해 보니까 나는 정말 무엇때문에 살인마인지 모르겠는거예요. 그리고, 내가 정말 사람을 죽였나? 그런 의문이 생기고, 딜레마에 빠진 거죠.
- ...
- ...
- 내가 안 죽었대요.
- ...
- 이곳으로 돌아왔대.
- 돌아왔다고 자각하니까 당신을 도저히 마주할 수가 없더라고요. 맞잖아요? 내가 그렇게 죽었는데?
- ...
- ...
- 진짜 벌 받는 게 정답이었네요.
스무 번째 엔딩을 또다시 여러 번 반복하면서 재현도 강제로 반복되었다.
- ...네가 대체 어떻게,
- 그래서,
- ...
- 미안해요.
전부 다 나 때문이에요. 그 말에 문대가 반응하지 못했다.
- 내게서 듣고 싶었던 말이 있다고 했죠.
- ...
재현이 천천히 손을 뻗어 문대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그에게선 온기가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대체 누가 그에게 실제 사람이 아니라고 할까.
- 사랑해요.
문대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 모든 엔딩 수집에 성공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
눈앞이 뿌옜다. 이게 눈물 때문이었을까. 손에 닿았던 온기가 점점 멀어지면서, 문대는 두 눈을 빠르게 비볐다.
- ...
그래, 그토록 바랐던 집으로 드디어 돌아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렇게 고대했던 결말을 얻었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엔딩을 원했나? 아니야.
[나를 사랑해요?]
나도 널 사랑하는 게 진심이라고 대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잖아, 미친 새끼들아.
염원했던 엔딩을 맞이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분수에도 맞지 않는 샴페인이라도 사서 혼자 크게 터뜨릴 거라고 다짐하던 때가 있었다. 샴페인이고 나발이고, 축배를 들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내내 서늘했던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서 땀을 흘리게 하는 것도 어색했고,
현실을 자각하는 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꿈을 지독하게도 오래 꾼 탓에, 20년 넘게 살아온 인생을 부정할 만큼 그 꿈이 현실이라고 나도 모르게 믿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거기 혼자 남아버린 신재현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생각이 가장 먼저였다. 나처럼 이상현상을 겪은 또다른 플레이어가 나타날까. 아니면 평생 자아를 가진 채 게임 속 세계에 영영 사는 걸까.
결국 일어났다. 그래, 거기에 너무 몰입한 내가 미친 새끼였지. 아무리 그래도 삼일 내내 아무것도 안 했다니 제정신인가. 빌어먹을 게임 탓은 이제 그만하고 잊어야 했다. 차라리 신재현을 사랑해버린 나를 비난하는 게 옳았다.
- 이 앱을 제거하시겠습니까?
취소 / 확인
꼭 기억해야만 한다면, 부정적이었던 모든 것을 덜어내고, 살아가는데 아주 작은 원동력이 될 정도의 좋았던 부분만 가져가는 게 맞았다.
[서든 데스 나잇을 제거했습니다.]
이정도면 즐거웠지, 라면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젠 괜찮아졌다. 좀 차분해지고 나니, 그 게임에서 몇 번을 굴렀는데 왜 이쪽 시간은 멀쩡하게 처음 게임 속으로 갔던 그때인지. 뭐, 괜히 1년이 통째로 날아가서 대학 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것보단 나았다. 과외 아르바이트나 하려고 했던 지난 계획은 결국 미뤄지고,
방학동안 어떻게 지냈냐면서 짧은 안부나 주고받고, 3학년인 만큼 다들 신입생 때처럼 술 마시고 놀러다닐 생각보다는
그렇게 오늘도 모든 강의가 끝나고 문대는 빠르게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 주문이 조금 밀려서, 기다려주세요.
[게임이 화제가 된 만큼, 어찌 보면 게임 속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살인마 청려, 캐릭터가 공포 게임 중에서도 굉장히 이례적으로 인기가 많아요.
강의가 끝나기 직전, 교수가 전했던 내용을 다시 전달하는 과대의 메시지를 대충 읽던 문대가 반응이라도 남기려 손가락을 두들기는데 멈칫했다.
[아, 잘생기게 만든 게 의도적이었군요. 혹시 모티브라도 있었나요?]
문대가 티비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제야 밝히는 건데, 사실 대학교 다닐 때 정말 잘생긴 동기가 있었거든요. 그 친구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이거 정말 재밌네요.
[그래서 청려라는 캐릭터가 인기가 많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부정적인 여론이 가득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어찌됐든 허락을 받긴 하셨네요, 청려의 실제 주인공과도 원만한 합의가 되길 바랍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게임이 이렇게 히트치면서 최근에 저희 말고도 인터뷰나 강의 스케쥴이 많으신 걸로 압니다.]
[최근 가장 핫한 게임의 개발자 분께서 직접 특강하신다니, 학생 분들도 영광이겠네요.]
[아, 그런가요? 저야말로 영광이죠. ]
- 197번 손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 손님!!!
오늘 한다고 한 게 그 사람 강의가 맞지? 강의 도중에 들어가는 게 흐름도 끊기게 하고, 좋은 짓이 아닌 건 알았지만, 사정이 생겨서 뒤늦게라도 듣고 싶었던 열정적인 학생 1 정도로 생각해줄 수 있었다. 문대는 조심스럽게 강의실 문을 열었다.
뒷문으로 들어갔지만 한 눈에 들어오는 강의실 구조상 당연히 눈에 띄었고, 문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죄송하다는 표현을 했다. 특별 강사인 개발자는 괜찮다며 어서 앉으라며 손짓했고, 문대는 빈 자리를 찾아 급하게 아무데나 앉았다.
그렇게 1시간이 훌쩍 지나고 개발자는 학생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쭈뼛거리면서 질문을 섣불리 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딱히 질문 자체가 없는 학생들도 있었다.
- 네, 뒤쪽에 있는 학생?
- 혹시 공포 게임 이외에 다른 장르로 신작 게임을 내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 어, 사실 제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하하, 너무 안 어울리죠?
거기서도 문대가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었다.
- 이야, 아는 분이 계시는 군요! 하하, 맞아요. 어차피 캐릭터도 잘생기게 뽑았겠다. 조금 이런 쪽으로 이용하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추가된 엔딩입니다. 클리어 조건이 굉장히 까다로울 거라서 수집하셨을진 모르겠지만
이후 다른 학생들의 질문도 이어지면서 생각보다 시간이 길게 끌어지고, 시간을 확인한 개발자가 마지막 질문만 받고 특강을 종료했다.
- 안녕하세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 아, 네! 아까 질문 주셨던 학생분이네요.
- 네.
남들이 다 보는 데에서 하지 못했던 질문. 하지만 가장 묻고 싶었다. 대뜸 따로 찾아와서 이 질문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지도 몰랐기에 게임을 다 플레이한 열정적인 유저인 것을 어필하고 드디어 질문했다.
- ...
- ...살인마 청려의 본명은 정말 신재현이 맞나요?
노트북을 가방에 넣던 개발자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 뭐라고 하셨나요?
- 개발자님의 인터뷰을 보았는데, 청려 캐릭터를 단순히 살인마 역할을 뛰어넘어 특히나 신경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 아, 네.
상당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문대는 개발자가 하도 황당한 질문을 들어서 반응하지 못한 게 아닌가, 걱정했다.
- 아, 박문대입니다.
- ...
- 네?
- 아뇨, 그러니까 박문대 학생 맞으시죠?
- 네.
이름을 묻더니 또 당황했다. 남의 이름이 특이하다면서 눈앞에서 대놓고 반응을 보이는 것 같진 않은데 이게 무슨 반응일까.
- 겨울 방학 때 혹시 알바할 생각 있어요?
- 네?
- 게임 업계 나갈 생각이라면 이력서 한 줄 쓰기도 좋을 거예요. 관심 있으면 종강하고 연락 줄래요?
- ...그러니까,
명함을 받고 기뻐하기보다는 망설이는 모습에 개발자는 다시 권유했다.
- 원하는 해답이 있다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11월이었다. 날씨가 많이 서늘해졌다. 10월 초까지는 그래도 짧게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지만, 이젠 다들 외투를 꼭 걸치고 나왔다. 지금 보이는 남자도 그러했다. 셔츠 위로 자켓까지 걸친 남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 ...야, 너 진짜 매번 오는 것도 안 지치냐?
- 바빠서 연락 못 주는 것도 맞는데 연락할 그게 없다니까???
친구 사이인지, 사장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질색했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소파에 털썩 앉았다.
- 나는 괴롭힌 적이 없는데.
- 지금 이게 괴롭히는 거야, 이게!
한창 바빠지는 시기인데 왜 눌러앉냐며 짜증을 내도 남자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탁자에 놓인 식물을 보면서 많이 자랐다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 연락처 아직도 몰라?
- 아니, 내가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그리고, 아니면 어떡하려고? 나도 너한테 미안해서 부탁 들어주는 거긴 한데, 내 처지도 좀 생각해주면 안 될까?
- 그래, 그러면 가봐야겠네. 다음에 또 올게.
- 야, 신재현!!!
기어코 또 온다는 말에 결국 큰소리가 나왔다.
이젠 누가 물어도 겨울이라고 할 날씨였다. 문대는 몰아치는 기말고사와 과제로 연이어 밤을 새면서 피로감이 잔뜩 쌓였다. 다행히 오늘은 이제 그 피로감을 풀 수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종강이었으니까. 많은 일이 있었지만, 시험도 문제 없이 잘 보고, 과제도 깔끔하게 해냈다.
- 제출했으니 다행이네.
- 아니었으면 싹싹 빌었다고, 진짜 내가... 아으!
- 그래, 고생했다.
- 맞다, 그래서 여행은?
2학기 마지막 강의, 교수도 수고했다는 말을 하고, 강의가 끝난 후,
- 마지막인데 안 갈 거야?
-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 곧 졸업인데 일이라도 하게? 빼고 가자. 혹시 중요한 거야?
- 응, 좋은 기회가 생겨서.
동기가 아쉽다는 말을 했다.
- 네, 안녕하세요. 예전에 연희대에서 명함 주셨던 박문대라고 합니다.
-
12월이 지나고 1월이었다. 정신 없던 연말이 지나고 어느덧 새해를 맞이했다. 연초부터 일할 수 있냐는 물음에 문대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고,
- ...나참,
출근길에 다시 생각해봐도 참 웃기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중에 회사를 고른다고 해도, 이쪽 업계는 정말 관심도 없었다.
덕분에 종강 이후, 몇 주 동안 열심히 관련 지식을 습득하려고 또 공부했다. 물론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하는데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라고. 그래도 제법 재미있었다.
[원하는 해답이 있다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제게 명함을 줬던 개발자이자 사장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기대하지 않으려고 매우 애썼다. 가볍게 시작하려고 했다. 그때 말했듯이 이력서 한 줄 남길 수 있을 거라고, 딱 그런 용도로만 여기려고 했다. 멋대로 품었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어도 손해가 아니라 이익이라고 다잡을 수 있었으니까.
-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하게 된 박문대라고 합니다.
가벼운 일이었지만,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첫 날이라 온몸이 굳기도 했고, 잠시 미간 쪽을 살짝 꼬집었다. 역시 커피를 잔뜩 들이부은 건 잘한 짓이었다.
- 아, 아닙니다.
무슨 사장이 굳이 인사하러 나오냐고 문대는 생각했다. 괜찮다고 답하니, 문대에게 물었다.
- 첫 날이니까 제가 밥 살게요. 좋아하는 거 있어요?
- 네? 저는 괜찮습니다만, 그... 다 잘 먹습니다.
- 아, 네.
문대는 어리둥절했다. 혹시 학교 선배 중에 이미 이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이 있나, 생각했다. 인맥을 그렇게 쌓은 편이 아니라서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 매우 적었다. 그렇기에 그중에서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이 없다는 걸 금방 알았다.
- ...에?
- ...신재현?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든 재현이 장난스럽게 그 끝을 입으로 살짝 불며 웃었다.
- 빵,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