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려문대 #엋문 지긋지긋한 공포게임. 주어진 엔딩을 모두 수집하고 드디어 완벽하게 클리어했다며 탈출밖에 안 남았다고...

@Western_BF
서나@Western_BF
27 views Sep 28, 2026 ~54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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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려문대 #엋문

지긋지긋한 공포게임. 주어진 엔딩을 모두 수집하고 드디어 완벽하게 클리어했다며 탈출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 보너스 엔딩 : 살인마 청려와 사랑하여 살아남으세요! ]

- ...진짜, 지랄을,

하다하다 살인마랑 사랑을 하란다, 미친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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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공포게임 속에 갇히게 된 것도 사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 중에 과외 아르바이트라도 할까 싶어서 일자리 좀 찾던 중, 무료함에 시간을 떼울 거리를 찾았다.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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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RPG처럼 본격적인 게임을 하면 잘못하다 단순히 떼우는 수준이 아니라 쏟을 수 있었으니, 가벼운 쪽으로 찾았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공포게임. 살인마에게 납치 당한 시점에서 시작되며, 필요한 도구를 찾아 탈출하고 최종적으로 살인마에게서 벗어나 안전지대에 도착하면 끝나는 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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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해 보였지만, 생각보다 살인마 패턴이 복잡하고, 예측하기 힘들어서 많이 애를 먹었다.

가볍게 하자고 시작한 건데, 예상과 다르게 너무 몰입해버려서 기어코 엔딩을 보았고, 처음으로 탈출에 성공했을 때는 새벽 2시 45분. 잘 시간을 한참 넘었다. 자각하고 나니 피로감이 확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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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씻은 후, 침대에 냅다 누웠다. 내일도 아침부터 과외 자리 좀 알아보러 다니자고 생각했다.

- ...

그래서 눈을 떴더니 공포게임 속이었다. 처음에는 대체 어떤 미친 새끼가 자택에 침입까지 하면서 성인 남성을 납치하냐고 혼란스러웠는데, 게임 세계라고 받아들인 건 참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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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오타쿠라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얘네가 그렇다고 했다.

[ 엔딩 수집 : #1 탈출 ]

이런 식으로 눈앞에 게임 창을 띄워줬거든.

- 진짜 지랄,

보자마자 든 생각은 진짜 X까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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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판타지 소설 주인공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고. 게다가 이미 탈출은 끝났는데 엔딩 수집 창을 띄워주는 건 대체 무슨 의도지. 그래도 이것 좀 제대로 분석하려고 하는데,

- ...

맞다, X발. 이거 첫 시작이 납치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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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안에 갇히기 전에도 바로 직전까지 플레이했으니 결박된 몸을 자유롭게 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이템도 생각보다 쉽게 얻어내고 시스템 창 좀 확인하는데,

[ 주어진 모든 엔딩을 수집하세요! ]

그렇게 나오는 빈칸이 1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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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탈출 엔딩은 방금 수집했다고 알림이 떴으니까. 그래서 여기서 더 욕 나오는 부분이 그거다. 이 게임 공략하겠다고 죽으면서 수집한 엔딩이 몇 개인데 이 새끼들이 가장 마지막에 수집한 탈출 엔딩만 인정해주는 거냐고.

- 아니, 탈출했대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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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했는데도 끝이 아니라고? 설마 빈칸이 있는 이유가 이걸 다 모아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이걸 처음부터 다시 모으려면?

- 개... X발...

19번 뒤지라는 거잖아, 이 미친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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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대체 누구한테 죽어야 하냐고 한다면, 이 게임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살인마. 게임 속 설정상 이름은 청려라고 한다. 뭐, 아무래도 이건 이명이고, 본명은 따로 있겠지만 게임 속 인물의 이름에 크게 관심 있는 건 아니다. 일단 얘한테 죽는 게 중요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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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으면 아프겠지. 진짜 뒤지게 아프겠지. 아니, 애초에 죽어도 살 수 있는 건가? 라고 하기에는 어차피 여긴 게임 속 세상이고 차라리 목숨을 끊는 게 현실로 돌아가는 빠른 방법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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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걸 내가 게임에서 직접 겪으라고 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우스운 건 여기 감각이 현실과 다를 게 없다는 거거든. 넘어져도 쓰라리고, 묶였을 때 생겼던 피멍도 그대로 남아있는데 누가 X발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라고 쉽게 두팔 벌리겠냐고. 그래서 좀 무서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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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시스템 구현은 X같이 잘해놔서 공포감에 손발도 떨리고, 막상 그 살인마 새끼 마주치니까 멋대로 도망쳤지.

그런데 나는 미친 시스템으로 인해 강제로 전이된 현실 사람이고, 얘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데이터에 불과하잖아. 내가 기계를 어떻게 이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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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미친 게임,

그래서 죽었어. 도망에 성공하고 겨우 거리를 벌렸다고 믿었는데 미친 새끼가 그 거리에서 정확하게 총으로 심장을 관통하더라고. 살이 까진 적도 많았고, 요리하다 손 좀 베어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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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살면서 귀하게 자라본 건 아닌데, 살을 찢는 것과 동시에 내장이 터지는 게 이런 거구나, 라는 걸 알았어.

[ 엔딩 수집 : #4 총살 ]

진짜 뒤지게 X같더라. 다시 깨어나서 엔딩 하나 더 수집했다는 시스템 창이 떴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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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게도 다시 시작했다면서 꿰뚫린 심장은 멀쩡하게 고쳐주고, 어쨌든 너는 다시 납치당한 상황이니까 손목은 다시 묶인 채로 피멍만 또 생겼다는 게.

- 하, 진짜 뭐, 어쩌라는...

이렇게 18번 더 뒤지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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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나머지 열여덟 가지 죽음이 뭔지 모르니까 그것도 죽어보면서 알아내야 하는 거고? 말이 18번 더 뒤지는 거지. 얼마나 더 뒤져야할지 모르는 거네? 어차피 진짜 죽으려고 해도 다시 돌아오니까 죽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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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고 발악해봤자 미친 살인마가 쫓아올게 뻔하고, 탈출해도 그저 중복 엔딩이니까,

- ...

X발. 그래, 해봐. 내가 고양이보다 목숨 많네. 고맙다, XXX들아.

그래서 몇 번을 더 죽었다. 칼에도 찔려 보고, 차에도 치여 보고, 목도 졸려 보고, 조력자에게 배신도 당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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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별별 엔딩을 다 맞이해본 끝에 마지막으로 남은 게 18번째 엔딩. 힌트는 DIVE. 그래서 처음에는 살인마에게 쫓기다가 발을 헛디뎌서 추락사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몇 번 떨어져봤지만,

[ 엔딩 수집 : #20 최악의 결말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라고 뜰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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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냥 자살로 인정돼서 자꾸 중복 엔딩이 뜨나 본데, DIVE가 뭐야. 물속으로 뛰어드는 거잖아. 그래서 아예 강에 빠져보기도 했는데 그것도 20번째 엔딩. 살인마에게 붙잡혀 수장 당하는 건 또 다른 11번째 엔딩. 아니, 그래서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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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살인마한테 직접 등이 떠밀려서 죽어야 하냐. 마지막 남은 가능성은 그거였다. 그래서 몇 번이나 죽음을 반복한 끝에 기어코 살인마에게 등을 내줄 수 있었다. 이 악물고 이놈이 가진 무기를 다 빼돌리고 맨손으로 만들었다. 일부러 난간으로 뒷걸음질치며 기회를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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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잔재주를 잘 부리네요.

살인마가 다가와서 말하는데, 그때 처음 이 새끼 얼굴을 자세히 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블랙으로 코디해서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까지 눌러써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좀 생긴 편이네. 근데 그래서,

-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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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청려가 내 상체를 세게 밀었고, 이를 예상하고 힘을 잔뜩 푼 상태였기에 난간 뒤로 몸이 저항없이 기울었다. 이게 대체 몇 번째 죽음인지 이젠 세는 것도 포기했다. 한 72번째 시도였나. 뭐, 상관없었다.

- 다시는 보지 말자, XXX야.

너와의 지긋지긋한 악연도 이제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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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지까지 치켜들고 죽는 사람이라기엔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해방된 모습으로 웃었다. 이런 고층 빌딩 옥상에서 떨어져서 머리가 깨지든, 속이 다 터지든, 그게 무슨 상관인데. 나 이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고.

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눈 떠보니까 왜 처음 시작했던 그 지점으로 또 돌아온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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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딩 수집 : #14 추락 ]

이건 그렇다 치고,

[ 모든 엔딩을 수집하셨습니다. 보너스 엔딩이 해금됩니다.]

- ...

그러니까 말을 잃었다. 개미친 게임. 미친 제작사. 이거 진짜 어떻게 하지? 허탈해서 웃음도 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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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 엔딩? 그딴게 있어? 진짜 장난하지 말라고. 분노에 휩싸여서 결박 당했단 사실도 까먹고 발을 구르다가 그대로 의자에 묶인 채로 넘어졌다. 맞다. X발. 확인하려면 손 풀어야 하지.

다시 도구부터 챙기려는데 그때 난리치면서 크게 냈던 소음에 살인마 청려가 문을 열고 등장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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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묶인 밧줄을 끊어내고 숨겨진 수갑 열쇠를 찾아 풀어내려는 순간 마주치면서,

- 열쇠가 거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기는, 내가 이 게임을 X발 몇 번째 재시작하는데, 뭐 그렇게 대답하기도 전에,

[ 엔딩 수집 : #4 총살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다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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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니까 진짜, 엔딩 다 수집했다고 끝난 게 아니네? 보너스인지 미친인지, 그것도 모아야 한다는 거네? 이미 이 게임에 들어온 이상 현실을 따질 것도 없었다. 빠르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번엔 조용히 수갑을 풀어내고 시스템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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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너스 엔딩 해금 ]

이건 딱히 힌트가 없는 건가. 보너스니까 어떤 엔딩인지 알려주는 건가. 그래서 그게 뭐

[ 보너스 엔딩 : 살인마 청려와 사랑하여 살아남으세요! ]

지랄하지마. 이거 공포게임이잖아. 왜 갑자기 장르가 바뀌었냐고. 이거 미연시 아니라고. 공포게임이면 공포게임 답게 행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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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무슨 얼어죽을, 진짜 개 X같은, 얘랑 사랑을 어떻게 하라고. 마주치면 죽이는 놈을 어떻게 꼬시라고. 제작사 니네가 직접 게임해봐.

- 진짜 이 X발...!

결국 참지 못하고 욕이 입밖으로 나갔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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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새 시간이 많이 잡아먹혀 청려가 다시 감금된 방으로 찾아왔고, 그 상태로 마주쳤다.

- ...
- ...
- ...하하.

청려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 엔딩 수집 : #4 총살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X발.

- ...진짜 사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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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진짜 저새끼 꼬시라고? 제발 시스템이 잘못된 거라고 해줘. 일단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마련되어야 설득을 하던가 말던가 하는데 이걸 지금 어쩌라는, 그래서 탈출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묶이는 상태로 얌전히 있으니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청려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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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 친근하게 군다고 살려줄 거라 생각하나본데, 안타깝네.

아니, 인사밖에 안했잖아. 야이,

[ 엔딩 수집 : #4 총살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진짜 답없네. 이거 애초에 깨라고 만들어진게 맞기는 해? 아니, 말 거는 순간 죽이는 놈을 어떻게 하라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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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맞선 자리도 이거보다 쉽겠다. 차라리 호기심을 느끼도록 해야 하나.

그래서 원래 시나리오대로 도망쳤다. 미친듯이 도망다니면서 무기도 빼돌려보고, 최대한 대화할 수 있게 환경을 마련해보려고 하는데,

- 이렇게 미꾸라지같은 것도 재능인데 유언 정도는 들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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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 질문이 있는데요.
- 음?
-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

[ 엔딩 수집 : #14 추락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이딴 엔딩이 있을 줄 알았으면 그렇게 간절하게 엔딩 안 모았다고. 다채롭게 죽으려고 고민해서 뭐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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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사랑하라고 하면 다채롭게 죽여주는데.

- 죄송한데 제 이야기 한 번만 들어주실래요?

[ 엔딩 수집 : #9 도로 위 참극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 안녕하세요, 탈출한 뒤로는 오랜만이네...요?

[ 엔딩 수집 : #2 묻지마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그만해, 이 X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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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죽음에 대한 단서가 아니다. 살인마에 대한 단서가 필요했다. 어차피 뒤질 거 정보를 얻기 위해 처음 시작 지점에서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오래된 바닥에서 틈새를 발견했고, 곧장 뜯어보았다. 안에 들어있는 건 사진 한 장. 이게 대체 뭐지? 그냥 남자 아이 사진인데. 사진을 한 번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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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64 아이템을 발견하였습니다. ]

이거 설마.

우선 도망쳤다. 어차피 안에서 말을 걸어봤자, 또 다채롭게 죽을 게 분명했으니까. 대체 어떻게 이놈과의 접점을 만들어야 하나. 고민하던 도중, 청려는 또 바짝 추격했고, 죽음을 다시 눈앞에 둔 채, 총을 든 그와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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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문대가 침을 한 번 삼켰다. 죽기 직전 뭐든 부딪혀보기로 생각했다. 될 대로 돼라.

- 다음 생에는 부디 대화 한 번 했으면 좋겠네요.
- ...
- 신... 재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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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을 감았다 떴는데, 시스템 창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 그 장소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 ...하,
- ...
​- 하하하!!!

청려가 날 죽이지 않았다. 그래.

- 다시 말해봐요.

신재현이 날 처음으로 죽이지 않았다.

- ...

101번째 재시작 중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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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안 죽은 거지? 물론, 그걸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수틀리면 바로 날 죽일 인간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침착하게 대답했다.

- ...신재현 씨.
- 네.
- ...네?
- 대답했잖아요.

이름 부른 거에 대답했다는데 뭐 어쩌라고. 살인마답게 예측할 수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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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갑자기 총구를 바닥으로 돌리며, 죽일 의지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진짜 뭐지?

- 대화하고 싶다면서.
- ...
- 당신의 다음 생까지 내가 기다려 줄 수 없잖아요?

아니, 나는 다음 트라이 때 너 만날 생각이었는데.

- 뭐, 사실 정말 죽고 싶었다면 내가 마다할 이유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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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밥상을 깔아주면 나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총구가 다시 자신을 향하려 하자, 문대가 이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 미친 새끼의 흥미를 유도해야 했다.

- 그 총 진짭니까?

아니, X발. 이게 아닌데. 당연히 진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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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 있냐고 대뜸 물어보면 그게 더 사망 플래그라서 뭐라도 꼬집어서 말하려고 했더니, 하필 눈에 들어온 게 총이었다. 애초에 총 말고 다른 거에 쉽게 눈을 돌리겠냐고.

- 아, 이거?
- ...
- 어떨 것 같아요?

어떨 것 같긴. 뭐라고 대답해도 저게 살인 도구라는 건 변하지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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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 넘게 죽었다지만, 이런 기회는 또 처음이라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 ...장난감이면 참 좋겠네요.
- 장난감이면 좋겠어요?

다정한 척 사람 말을 따라하며 웃었다. 저건 다정이 아니라 살벌한 거다. 쓸데없이 톤 살짝 높여서 유치원 선생님 같은 말투 장착하지 말라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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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래놓고 나 죽일 거잖아.

탕-

신재현은 총을 쐈다. 그러니까 나를 향한 건 아니었다. 총구는 하늘로 향했고, 총알은 구름을 뚫을 기세로 빠르게 사라졌다. 이게 게임 속이긴 하구나. 아무리 새벽이라고 해도 총성이 이렇게 울리는데 그 누구도 튀어나오지 않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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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갑자기 냅다 하늘에 총을 쏘더니,

- 짜잔.
- ...
- 장난감.

라고 한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지? 내가 저따 대고 와, 불꽃놀이네요. 라고 박수라도 보내줘야 할까? 좋은 구경 시켜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할까? 아니, 그건 전부 다 죽음으로 가는 직행 열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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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 응?
- 그 안에 있는 칼도 장난감이겠네.

문대는 재현이 입고 있던 자켓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오른쪽 가슴 부근을 말이다. 총을 오른손으로 쏘는 탓에 그가 보통 오른손으로 칼을 쥘 거라 생각하겠지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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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미친 살인마는 총으로 시선을 끌다가도 갑자기 왼손으로 칼을 들고 그걸 도망치는 상대의 종아리에 던지기도 했으니까. 그래, 그걸 내가 당했다. 양손잡이인지, 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냥 이 새끼가 시스템 설정상 말도 안되는 피지컬의 살인마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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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내가 100번 넘게 재시작한 플레이어라서 아는 거고, 한낱 시스템에 불과한 신재현이 내가 이걸 어떻게 아는지 눈치 챌 리가 없지.

- 이런 장난감 되게 좋아하나봐요?

그리고 재현이 정말 자켓 안으로 왼손을 넣어 칼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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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칼, 다른 손에 총. 넌 현실이었으면 진작 잡혀가고도 남았어. 하지만, 여긴 네가 뭔 짓을 해도 허용되는 세계지?

- 뭐... 처음 봐서 정말 신기하네요.

그렇게 대답하니 별안간 제 자켓을 그어버렸다. 자켓의 손목 부분이 너덜너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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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저렇게 그었는데 자기 살에서 피를 보지 않았다고? 먼치킨 살인마라고 감탄해야 하냐?

- 좋아요.
- 예?
- 좋다고요.

뭐가 좋은데. 아무리 살인마라고 해도 기초 교육은 받고 자라지 않나? 육하원칙 몰라? 주어 빼지 말라고. 무엇을, 그거 중요한 거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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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설마 직접 정답에 도달해야 하는 거냐며 문대가 되는 대로 내뱉었다.

- ...나를요?

솔직히 스스로 뱉으면서 어이가 없었다. 겠냐고. X발. 진짜 퍽이나 그러겠다. 신재현도 어이가 없는 건지, 아니면 정말 마음에 든 건지 몰라도 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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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러고 총알 날아온다. 절대 긴장 풀지마.

- 그런 걸로 해줘야겠네.
- ...예?
- 놔줄게요.
- 예?
- 지금 놓아주겠다고요.

뭘 놓아줘? 그리고 대체 뭘 그런 걸로 해주는데? 또 멋대로 문장을 완성해버리는 신재현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그랬더니 갑자기 들고 있던 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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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한 쇳덩이가 보도블럭을 갈아버리는 듯이 부딪치는 소리가 기이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총을 쐈다.

- ...
- ...

정확하게는 내 어깨와 얼굴 사이로, 일부러 명중하지 않았다. 이 미친 새끼의 꿍꿍이가 뭐지. 또 뒤돌아서 도망치면 종아리에 칼 쳐박거나 총알로 심장 뚫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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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간만에 재밌는 대화했으니까 한 번 눈 감겠다고요.
- ...뭐?

진심이야?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 싫어요?
- 아뇨, 그게 아니라,

네가 그렇게 봐줄 놈이 아닌 걸 아니까 그렇지. 그래도 지 입으로 이렇게 꺼낸 건 처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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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거 리트라이 감안하고 이용해야 하지 않겠어?

- 눈 감으세요.
- 응?
- ...눈 감아준다면서.
- ...
- 그러니까 진짜 감으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확실히 흥미로운 게 사실인 듯했다. 신재현은 휘었던 눈꼬리 그대로 눈을 감았다. 진짜지. 저 새끼가 나 봐주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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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으로 30초 세요.
- 그래요.

그대로 문대는 그의 시선을 피해 달아났다. 재현은 아주 느릿하게 30초를 셌다. 말이 30초지, 숫자를 서른까지 센 것으로 아마 시간은 거의 그보다 두 배 이상은 흘렀다. 당연하게도 눈을 떴을 때는 문대가 제 눈앞에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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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지는 소리가 굉장히 빠르다 했더니, 봐줄 필요도 없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나 보네.

- 흠.

다음에 만나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

한편 문대는 무사히 도망친 후, 긴장감에 굳어있던 다리가 완전히 풀려서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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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네. 나 아직 재시작 안 한 거 맞지? 뇌가 다시 잘 굴러가도록 숨 좀 고르면서 안정을 취했다. 그러고 나니 떠오르는 거.

- ...X발.

나 저 새끼랑 사랑해야 하는데 도망쳐서 뭐하냐고.
62
아니, 그냥 거기서 붙잡고 단서를 더 캤어야 했나? 어떻게 흥미를 끌었는지 아직도 얼떨떨하긴 한데, 이 게임 속 세계에서 청려의 이름이 신재현이라는 건 플레이어만이 알아낼 수 있는 비밀인 게 분명했다. 그래, 나도 이번에 알아낸 사실이었으니까.

- ...
63
애초에 이번에 놔준다는 건, 어쨌든 저 새끼는 날 끝까지 쫓을 거라는 거. 탈출 엔딩을 보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시 만났을 때는 무조건 죽음이라는 건가? 젠장, 그때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지. 아니, 우선 도망치면서 머리 좀 굴려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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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도망치는 거라면 더럽게 많이 했지. 몇 시간 정도 몸을 숨길 장소도 알고 있고, 이 지역 골목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는 수십 번 파훼하면서 외웠으니까.

그렇게 우선 재현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1순위, 그러면서도 그와 마주하면 어떠한 말로 흥미를 유도하고 시간을 끌지 계속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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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당연하게도 생각이 없었다. 살인마는 혹시 X무위키 없냐? 하다 못해 저 새끼 고향이라도 알려줘봐. 거기서 태어난 척이라도 하게.

언제나 은신처를 옮겨가면서 요리조리 피했다고 여기면, 꼭 한번쯤 방심하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게 지금이었다. 대충 3일 쯤 지났을 때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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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많이 추워지고, 아무데나 머리를 대기에는 조만간 동사 엔딩이 맛볼 수도 있었다. 동사는 혹시 무슨 엔딩이냐?

- ...

아니,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네. 여기 날씨는 매번 이랬는데. 재시작할 때마다 변함없는 서늘한 날씨에 문대가 의문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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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 시기여야 하는 설정 배경이라는 게 존재하나? 물론 단순히 을씨년스러운 공포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는 이게 맞긴 한데.

- ...!

그렇게 고민하니 갑자기 머리 옆으로 뭐가 스쳐지나갔다.

- ...

단검이었다. 그리고 휘날린 머리카락이 그대로 몇가닥 우수수 잘린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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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가 뒤를 돌았다.

- 보고 싶었어요. 우리 오랜만이네?

이런 걸 던질 사람? 그래, 당연히 신재현이지.

- 사실 하루 좀 쉬고 다시 좀 찾아봤는데 사람이 진짜 숨바꼭질에 재능이 있어. 아, 칭찬이에요.
- ...예, 감사하네요.
69
내가 이 게임을 몇 번 했는데 피하는 실력은 어떻게 늘 수밖에 없어. 그나저나 이 새끼가 머리카락 끝 부분만 잘라낸 것은 노린 건가? 아니면 조준 실패? 뭐가 됐든, 곧 죽을 예정이라는 거.

- 뭐하고 지냈어요?
​- 그냥 먹고, 자고... 그렇게 지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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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안부 물을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대답하면서 머리는 수천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여기서 순순히 죽을까? 생각 좀 정리할 겸, 정보도 어느 정도 수집했으니 다시 시작해볼까?

아니. 그런데 설마 이 새끼가 다음 시작 때 달라지면 어떻게 하냐고.
71
시스템을 겪어본 결과, 일정 조건에 따라 정해진 패턴을 내놓긴 해도, 가끔 똑같은 질문을 해도 때에 따라 다른 대답이 나오는 것이 실제 사람과 유사했다. 그래서 내가 다음에 똑같이 신재현, 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알았냐면서 그냥 죽여버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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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재현 씨는 뭐하면서 지내셨나요?

그래서 또다시 한 번 질질 끌어보기 위해 대화를 좀 이어가려하니, 신재현은 늘 그랬던 것처럼 또 총을 들었다. 미친 살인마. 누가 그렇게 웃냐고.

- 당신 생각하면서.

영광이다, XXX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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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해. 내가 여기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이 새끼에게 내 목숨이 연장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물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문대는 다급하게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수집한 아이템 중에 연막탄 같은 게 있지 않았나? 좀 뒤져보려고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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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뭘 그렇게 꼼지락거려요.
- ...아니, 그러니까,

이거 진짜 설마 내 예상이 이번에도 맞는다면, 문대는 다급하게 오늘이 며칠이었는지 계산한다.

- 왜요, 이번에도 유언이 필요한가?
- 네.
- 이번에는 어떤 거요?
- ㄱ, 광장에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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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사람 많은데서 있으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재현이 솔직히 좀 우스웠지만, 어차피 어떻게 해도 제 손에 끝내줄 수 있었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문대가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곳은 시청 광장. 그 가운데 세워진 시계탑을 보며 입술을 떤다. 진짜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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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밤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데 광장까지 와서 하고 싶은 거창한 유언이 뭔데요?

​ 문대는 입을 다물고 시계탑만 빤히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재현이 이젠 도움도 요청하지 못한다며 허망함을 느낀다고 여겼다. 더 이상 봐줄 것도 없었다. 참 유감이라며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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뎅- 뎅-

분침과 시침이 함께 위를 향하며 완벽하게 겹쳐지는 순간, 타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문대가 그 시간에 맞춰 뒤를 돌았다. 총구가 자신을 향하는데도 똑바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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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볼 수 있는 시스템 창에서 선택된 아이템이 반짝거렸다.

[ 아이템 정보 : #64 비밀 사진 ]

사진 속에는 신재현이라는 명찰을 단 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 뒷면에는, 1127. 이라는 숫자가 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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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모든 시스템을 세세하게 변태처럼 설정한 제작사가 고작 분위기 조성 하나만을 위해 이 시기를 배경으로 잡았을까? 내 생각에는 아니야.

- 신재현 씨.
- ...
- 생일 축하합니다.

오늘이 이 새끼 생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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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번 반복된 끝에 잦아든 종소리. 잠시 말문이 막혔던 신재현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저번과 비슷한 패턴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정답이라고 해줘.

- 좋아요. 이번엔 내가 부탁할게.
- ...
- 나 당신이랑 대화해보고 싶어요.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무기를 미련 없이 바닥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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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칼을 버렸을 때도 그렇고 저렇게 무작정 바닥에 떨어뜨리면 날이 상하고, 총기는 망가지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그 망가지는 게 다 상관없다는 걸 보여주는 건가?

- ...어떤 대화?

네 이름은 어떻게 알았냐고? 오늘이 생일인 거 그냥 때려맞춘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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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목표물이 자아를 가진 적이 없어서 데이터 덩어리 주제에 당황스러워하는 건가? 하지만 여기가 게임 속 세계라서 힌트를 얻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 이름.
- ...
- 나이.
- ...
-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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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살인마 입장에서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할 리는 없으니까. 그런데 미안한데 나 네 나이는 모르는데 말이야. 나보다 많으려나? 아니, 지금 연상인지 연하인지 따질 때가 아니잖아.

- 신재현 씨 이름을 알게 된 건,
- 아니, 그거 말고.
- ...
- 당신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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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 문대가 당황했다. 얘가 진짜 나에 대해 궁금한 거야? 살인마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캐릭터가, 정말 플레이어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거냐고. 그냥 냅다 만든 보너스 엔딩이 아니라 진짜 클리어 가능성이 있는 거였어? 그래, 이 새끼들 변태 제작사였지.

- ...박문대.
- 문대?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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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대, 박문대. 혼자서 몇 번 이름을 곱씹어보는 재현이었다. 문대는 여전히 경계하면서도 날을 세우지 않으려 노력했다. 혹시 저래놓고 무기가 사실 더 있는 거 아니야? 티 나지 않게 상체부터 하체까지 살피고 바닥에 널브러진 쇠붙이들을 보았다.

- 좋아요, 문대 씨.
- 네, 네?
- 집 어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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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너머요. 라고 할 수는 없으니 대충 얼버무리려는데, 재현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당연했다. 며칠동안 쫓고 쫓기는 짓을 반복했는데 집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이 게임 속 플레이어의 집이 설정상 존재하지만, 거기는 살인마에 의해 습격당했다는 설정이니 그걸 집이라고 할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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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를 나누기에는 여긴 너무 장소가 안 좋으니까,
- ...
- 우리 집으로 갈까요?
- ...뭐?

뭐, 이 새끼야?

-

그러니까 정말 얼떨결에 따라갔다. 누가 들으면 비웃다 못해 미쳤냐고 기겁할 이야기였다. 내가 거기서 대체 몇 번을 탈출했는데 이젠 하다하다 제발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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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 설마 이렇게 재밌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집에서 토막 내는 거 아니겠지? 진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살인마 캐릭터니까 내가 방심할 수가 없,

- ...에?
- 왜요?
- ...아니, 그,

그런데 도착한 곳은 멀쩡한 아파트. 이상하다. 이 새끼 집은 분명 2층짜리 단독 주택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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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락방에 갇혀있었는데, 절대 아파트일 리가 없다고. 이것도 누구 하나 죽이고 털어버린 거 아니야? 잘못 질문했다가 장기가 털릴지도 모르니 넘어가려 했지만,

- 아.
- ...
- 그건 작업실.

눈치 챈 재현이 대신 대답했다. 문대는 더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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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발. 그냥 작업실이 아니잖아. 아, 그래. 침착해. 침착하자. 당황하지 않은 척해.

- 무슨 생각해요?
- 취, 취미가 참 멋있네...

이게 아니잖아.

- 푸흡,
- ...
- 일단 들어와요.

슬리퍼 신으라며 내주는데 압정 깔아둔 건 아니겠지. 발끝을 조심스럽게 옮기면서 확인하고, 그의 집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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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살인마한테 이런 집이 있다고? 이건 너무 평범한데? 산속 깊은 오두막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피 냄새가 가득한 채로 사는 그런 게 아니라고?

- 커피 마셔요?
- 네, 뭐... 주시면 잘 마십니다.

손 씻고 앉아있으라는데, 가시 방석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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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잘 봐야 해. 너 이미 독살 엔딩 수집했잖아. 저 안에 약 들어가는지 확인하라고. 턱을 괴는 척하면서 손으로 가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고 재현이 내온 커피. 여차하면 입만 대고 버리려 했는데 어서 마시라는 듯 웃는다. 진짜 독살이라면 그래,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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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결심하고 딱 들이켰는데, 멀쩡했다. 그러니까 뜨거운 커피에 입천장만 데었다는 말이다.

- 아, 좀 미지근하게 줄 걸 그랬나요?
- 아뇨, 괜찮습니다.

덕분에 조금 튀어버린 커피. 어서 닦으라며 휴지까지 건네는데. 진짜 이거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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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 미연시라는 게 정말 가능했던 거냐고. 물론 호감도를 볼 수 있는 창 따위는 없었다. 보너스답게 참으로 불친절한데. 그러면 이 이후로 어떻게 해야 하지? 잘 얻어마셨고, 우리 내일 또 만나요? 애프터 신청이라도 하라는 거냐고.

- 음...
- 왜 그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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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고민하는 와중에 저놈도 갑자기 앓는 소리가 좀 나서, 물었다. 먼저 무언가 하려고 나서기 보다는, 이쪽이 어떻게 할 건지 맞춰주는 게 낫지. 뒤지는 거 빼고.

- 이런 걸 두고 데이트라고 하는 걸까요?
- 크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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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데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커피잔에 코를 박을 뻔했다. 뭐? 데이트? 내가 진짜 잘못 들은 거지?

- 상당히 덜렁거리는 구석이 있네요. 도망은 잘 치면서.
- ...아, 네.

이건 덜렁거리는 문제가 아니라고. 그래, 당장 이 커피에도 독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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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식칼을 제외하고는 정말 살의를 띨 만한 물건은 안 보이니까, 아주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아도 될지도 모르겠다.

- 데이트라는 건 무슨 이야깁니까?
- 원래 이런 게 데이트라고 하지 않나.
- ...

그게 틀린 건 아닌데, 또 정답이라고 하긴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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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에요?
- 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데이트라는 것 자체가 통상적으로 쓰이는 의미로는...
- 음?
- ...그게,
- 말해봐요.

침착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자신이 플레이하는 건 범죄, 스릴러, 공포 게임이 아니라, 달달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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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이상의 호감을 가진 상대끼리 가지는 만남을 의미합니다.
- ...
- ...라고, 드라마나 소설에서,

땀이 많은 편도 아니고, 집 안에 더운 것도 아닌데 손이 자꾸 끈적거렸다. 긴장한 것이다. 어쨌든 제 말 뜻을 이해하려고 하는지, 잠시 턱을 괴며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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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대 씨.
- 네?
- 우리 친구예요?

...겠냐? 칼 휘두르고 총을 난사하는 친구가 세상에 어딨냐고.

- 아마... 아닐 걸요?

라고 대답하니, 이번엔 빤히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데. 혹시 손목 안에 작은 꼬챙이를 감춰놓고 찌르려고 탐색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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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다채롭게 죽으니까 패턴을 다 외우는 게 힘들었다.

- 그러면 데이트해도 되는 관계?
- 예?
- 아니에요?

제작사 나와. 이 새끼한테 살인 관련 기술만 먼치킨으로 부여하고, 기초 지식 진짜 안 준 거 맞지?
102
- 애초에 데이트라는 게 뭐, 함께 영화를 보거나, 같이 손잡고 산책하거나, 드라이브라거나... 그런 건데, 단순히 커피 한 잔도 포함이긴 한데, 조금 애매하죠.
- 우리 친구 아니라면서요.
- 그랬죠?
- 친구 이상의 관계가 하는 거라면서.
- ...
- 우리 친구 이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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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이 드디어 맞는 말을 하는구나. 솔직히 박수라도 보내주고 싶었는데, 여기서 친구 이하라고 대답하는 순간, 벌어질 상황을 상상했다. 역시 그렇죠? 하면서 바로 목을 조른다거나, 재미없다면서 그대로 내 머리통을 날린다거나, 그래, 그런 끔찍한 상황.

- 데이트, 그거 맞는 것 같기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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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하. 해도 되는 사이구나.

진짜 제작사 나오라고. 내가 왜 살인마랑 데이트하는 관계가 된 거냐고. 제발.

- 그래요, 일단 자요. 피곤해 보이네. 자꾸 대답이 좀 늦는 거 보면.
- 예? 제가요?
- 네.

이거 그 패턴 아닌가. 대답 느리다고 답답하다면서 죽이는 거.
105
커피 잔을 쥔 손이 조금 떨리려는데, 신재현이 먼저 일어났다.

- 집 없다고 했으니까 자고 갈 거죠?
- ...
- 응?
- ...네.

아니라고 하면 그것도 도망 취급하면서 죽일 게 뻔하니까. 무슨 말만 해도 죽임 당할 거라고 패턴 생각하는 내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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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빈 방을 가리켰다. 들어가서 자라는 의미였다. 커피를 다 마시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저 손짓을 따라가야 할 것 같았다. 문대가 방으로 이동하니, 갑자기 여분의 옷까지 가져다주며, 문을 닫았다. 뭐, 씻고 갈아입고 자라고? 진짜로?

- ...

진짜 알 수 없는 데이터다.
107
내가 연애 시뮬레이션은 안해봐서 그런데, 이거 다 이런 거냐? 어쨌든 그렇게 시키는 대로 옷도 갈아입고 얌전히 침대에 누웠더니 딱히 확인하러 오진 않았다. 문대는 뜬눈으로 천장만 바라보았다.

- ...진짜 뭐냐고.

그런데 애초에 잠이 오겠냐, 여기가 누구 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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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피로감이 쌓일 대로 쌓여 무거워진 몸이 멋대로 눈을 감게 만들었다. 깊게 잠들었다고 생각이 들었을 즈음, 노크 소리에 앓는 소리만 잔뜩 내며 꾸역꾸역 일어났다. 내가 X발, 진짜 잠을 자긴 잤네. 제정신이 아니구나. 체감상 오래 잔 것 같진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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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대 씨.
- ...네?
- 가요, 데이트.

문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째 아침이라기엔 아직 어두웠다. 문 바로 옆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 ...

누가 새벽 5시부터 데이트를 나가는데. 제작사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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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신재현한테 끌려갔다. 일단 놀라운 건 이놈한테 자차도 있다는 거. 사실 훔친 차량이 아닐지, 그게 더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만, 작업실이라고 칭하는 그 지옥도 어쨌든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재력이 어느정도 받쳐주는 놈이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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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도 오고, 너무 피곤하고, 옆에 있는 사람은 살인마고, 긴장감에 몸은 굳었는데 뇌가 멋대로 휴식을 취하고 싶다고 미친듯이 두들기는 느낌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아침부터 대체 어딜 가려는 건가 싶었더니,

- ...그냥 가는 거라고요?
- 드라이브. 그것도 데이트라면서요.
- 대체 누가 그걸 새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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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귀성길 떠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목적지도 없는 드라이브를 왜 새벽부터 해야 하냐는 것이다. 하루종일 이렇게 창문 열고 차나 몬다면 사실 눈이 감길 법도 한데, 감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 피곤해요?
- ...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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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이놈이 생각한 목적지가 뒷산이었고, 매장 엔딩이면 어떡하지. 매장 엔딩을 수집한 적은 있는데, 그거 진짜 불쾌해서 다시 당하긴 싫거든. 차라리 여기서 안전벨트로 목 졸려 죽는 게 나은 수준이라고.

그러면서 안전벨트를 괜히 꽉 쥐는 문대에게 재현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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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치지 않을게요.
- ...
- 음,
- ...
- 약속?

신호가 멈춘 틈을 타 새끼손가락까지 내미는 재현이었다. 문대는 느릿하게 다가가 손가락을 아주 살짝 걸치는 정도로 완전히 꺾지 않았다. 그리고 신호가 출발하자 퍼뜩 손을 치우고 괜히 안전벨트만 잡는 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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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은 지치지도 않는지 아침 내내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조수석을 확인했다. 어느새 기어코 눈을 감아버린 문대가 목이 직각으로 꺾여서는 불편하게 자고 있었다. 재현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조수석 의자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무언가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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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는 일어나서 다급하게 입가를 닦았다. X발, 미쳤어. 그 해치지 않는다는 말에 진짜 홀라당 넘어가기라도 한 거냐고. 어떻게 그 상황에 잘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돼서 당황하는데,

- 깼어요?
- ...
- 영화 보러 갈까?

해가 꼭대기에서 점점 내려오고 있는 한낮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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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정말 오전 내내 잤다고? 그래서 얘는 차 세워두고 이렇게 나 계속 재운 거야? 어째 몸이 한참 뒤로 넘어가 있었다. 상체를 서둘러 일으키는데 그대로 다리를 박았고, 조수석 서랍이 열렸다.

- 아.
- ...
- 실수.

온갖 쇠가 부딪치면 진짜 끔찍한 소리가 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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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서랍을 닫아버리는데, 저 짤그랑거리는 소리 진짜 미치겠네. 저 소리가 이제 들린 걸 보니까 운전 진짜 부드럽게 잘하나 보네. 내가 이딴 걸 왜 감탄하고 있어야 하는지.

어쨌든 알 수 없는 하루였다. 영화도 보고, 나한테 밥도 사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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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게임 속 세계인지 현실 세계인지 구분이 안 갔다. 그나마 게임에 갇혔다고 자각한 건, 영화가 근본도 없는 히어로 영화라는 거. 신재현은 단순히 데이터에 불과해서 이게 그렇구나, 하고 넘겼나 본데, 내용도 없고, 연출도 없이 무지성으로 히어로가 빌런과 싸우기만 하는 그런 영화였다.
120
어쨌든 덕분에 더 자각했지, 나 얼른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 잠깐 내릴래요?
- 네.

새벽 5시부터 대체 뭘 하고 싶은 건가 싶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금방 갔다. 아무래도 오전은 자느라 날려먹기도 했고, 중간에 그 괴상한 영화도 봤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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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끝이니 해가 이제 빨리 저물었고, 어두워지는 저녁, 신재현은 공원 앞에서 차를 세웠다.

당연히 그를 따라 순순히 내리고 앞장 서서 걷길래 그의 의도만 추리하면서 뒤로 따라 걸었다. 그렇게 스무 걸음 정도 걸었나. 갑자기 신재현이 뒤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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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다.
- 왜요?
- 손.

손바닥을 내보였다. 잡아달라는 의미인가. 문대는 그 손을 빤히 보았다. 생각해보니, 이번에 처음으로 이 사람의 장갑 끼지 않은 맨손을 보는 거였구나.

- 안 잡아요?
- 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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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가 바로 손을 잡았다. 데이터 쪼가리, 미친 살인마, 라기에는 생각보다 이 체온이 너무 사람 같았다. 아니, 애초에 사람이 맞긴 했다. 차가울 줄 알았는데 온기라는 게 느껴졌다.

- 저기요, 신재현 씨.
- 네?

그래서 좀 확인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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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이 정말 말이 통한다면, 이 정도는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호감도를 확인할 수도 없고, 살인마의 감정을 읽어낼 능력따위 없으니, 대놓고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주제 넘은 말이라며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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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나중에 물어볼 거 지금 확인하는 거 아니겠는가.

- 아주 많죠.
- 어떤 의도로요?

그게 그렇게 궁금하냐는 듯 웃는 모습이었다. 궁금하다 못해 간절해야 하는 처지다. 내가 현실로 돌아가는 게 네 감정에 달려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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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떨 것 같은데요?

재현이 되물었다. 문대에게 직접 도달해 보라는 듯 던져주었다.

- ...좋은 의도면 좋겠네요.
- 그러면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는 손을 놓고 방향을 틀었다. 차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였다. 문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금방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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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게도 다음 날, 살아있었다. 다행이었다. 몸에 꿰뚫린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아픈 곳도 없었고, 오히려 전날보다 더 잘 잤다. 진짜 사람이 참으로 간사했다. 몇 번 잘해줬다고 멋대로 긴장이 풀렸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여긴 여전히 현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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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창에서도 엔딩은 아직 수집되지 않은 상태라고 할 뿐이었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대답했으니 정말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 침대가 피로 물들지 않고, 눈을 뜨면 어두운 천장이 아니라 햇살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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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났어요?
- 아, 덕분입니다.
- 못 먹는 거 있어요?
- ...딱히 없습니다.

적응할 수 없는 전개. 감히 예상하기 힘든 패턴. 살인마 청려를 파악하는 건 이제 그만두고, 인간 신재현을 파악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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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할 의지가 이제는 많아보이는 그에게 나름 용기내서 먼저 말도 걸어보고, 먼저 밖에 나가자고 해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며칠 지났다. 그동안 파악한 것에 의하면, 일단, 게임 설정에서 플레이어가 살인마 청려의 8번째 타겟이라고 설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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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8번째 주인공이 죽질 않기도 하고, 플레이어가 죽거나 탈출하면 끝나는 게임이었기에 이 다음 목표물이라는 설정이 없는 건지, 신재현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어쨌든 수틀리면 무조건 내쪽이 죽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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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뒀는데, 살의를 가지지 않은 신재현과 지낸다는 게 생각보다 진짜 기묘했다. 100번 정도 죽은 탓에 피해 망상에 절여진 뇌가 수없이 저 새끼가 나를 죽이지 않는다고? 왜? 하고 외쳐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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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쟤랑 사랑을 해야 한대.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보라며 어떻게든 정을 붙이려고 하는 생존 본능도 존재감을 미친듯이 드러냈다.

- 오늘은 가고 싶은 곳 따로 없어요?
- 굳이 안 가고 집에 있어도 될 것 같은...
- 그러면 가볍게 마트나 다녀올래요?
- ...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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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함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했다. 내게 온갖 무기를 던지던 놈이 살짝 잘해준다고 방심하니까 이렇게 많이 죽은 거라며 스스로 뺨을 쳤다.

- 옷 갈아 입는다더니 왜 뺨을 치고 있어요?
- 아, 그냥 벌레가 있는 줄 알고.

하루, 이틀, 일주일, 점점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니까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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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의 진짜 본질이 정말로 연애 시뮬레이션이 맞는 거였냐고. 잘해주는 만큼 이용하고, 기회가 있을 때 정보 수집도 하고,

[ #68 아이템을 발견하였습니다. ]

그렇게 살 궁리로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고 생각했는데.

- 문대 씨.
- 예?
- 즐겁다.
- 어떤 부분이요?
- 이렇게 데이트한다는 거.
136
이상하게도 이 새끼가 점점 데이터가 아닌 척하고 있었다. 연애 시뮬레이션 속 신재현은 다른 거냐며 이건 색다른 패턴이냐며 어떻게 데이터를 긁어보려 해도, 매번 다른 대답을 가져오며 사람을 당황시켰다. 진짜 뭐지?

- 그런데 문대 씨는 왜 맨날 나 보면 무서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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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놈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건 플레이어로서 당연한 거다. 가끔 불쑥 방에 들어오면 본능적으로 손발이 저릿하고, 피가 식어가는 느낌을 주는 게 왜겠어.

- 이제 나 안 무서워해도 될 것 같은데?

누가 이 게임 공략법 좀 알려줘, 제발.
138
자꾸 잘해주는 신재현을 이쪽에서 부정하고, 거리를 적당히 유지했다. 누가 보면 공략하는 쪽은 저쪽인 줄 알겠다. 남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튕기는 것으로 보일지도 몰랐으니까.

튕긴다는 게 이 새끼를 경계한다는 것도 있는데, 이건 내 자신을 경계하는 것도 맞았다.
139
그러니까 이 게임 세계에 너무 오래 갇혀서 뇌가 어떻게 미쳐버린 거지.

- 요리 잘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칼질하는 건 뭐예요? 아프지도 않나?

남의 장기 구경하기 바빴던 놈이 작은 상처에도 치료해주는데 이건 내가 멀쩡한 게 더 말이 안 된다고.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140
그렇기에 기어코 금지된 말을 꺼냈다.

- 왜... 죽이려고 했습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 글쎄요.
- ...
- 잘 모르겠네.
- 농담하지 말고,
- 진짜로.
- ...
- 잘 모르겠다고요.

게임 설정상 신재현의 살인 동기는, 어린시절 부모님이 부당한 죽음을 맞이한 이후, 살인범에 의해 거둬졌고,
141
그 이후로 무차별적인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했던 건데.

- ...그래요.

정말 데이터가 이상하다. 신재현은 입력된 명령어에 따라서 움직이는 게임 속 캐릭터에 불과한데,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거지? 차라리 100번을 더 죽을걸 그랬다고.
142
살인마 청려가 아니라 인간 신재현에 대해 파악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어. 나 이제 얘를 완전히 예측할 수가 없어.

- 내가 이런 짓 더 이상 안 했으면 좋겠다는 의도로 꺼낸 말이에요?
- ...그건 당연하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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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목숨을 끊어야 할까? 아니, 그러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하잖아. 이 서사를 다시 쌓아야 하잖아. 그건 싫은데 진짜 나 어떻게 하냐고.

- 그러면 차라리 제대로 부탁해봐요.
- ...
- 같이 살자고.

오류난 데이터 쪼가리한테 감정이 생기잖아.
144
문대는 너무나 복잡했다. 그렇게 머리를 굴렸는데, 막상 진짜 호감을 보이는 것 같으니까 넘어간 거야, 뭐야. 얼굴이 취향이라거나, 그런 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맹수의 눈빛이 조금 온순해졌다고 두팔 벌리는 수준이었다. 이러니까 내가 수십 번 죽었구나. 그래, 내가 그걸 몰랐네.
145
- ...하.

그러니까 더 큰일이 생기기 전에 서둘러 빠져나가야겠다. 보너스 엔딩을 얼른 수집해야해. 내가 감정이 생겼다는 건 뭐, 나쁜 건 아니지. 엔딩 수집의 조건이 살인마'와' 사랑한다는 거니까. 게다가 저쪽도 내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는 것 같으니 긍정적인 거지.
146
문대는 지금까지 수집한 엔딩 목록을 살폈다. 전부 죽음으로 클리어된 건데, 그 외 사소한 업적이라고 해도, 아이템 수집 관련이나 살인마 공격 카운터, 이런 건데 사랑은 대체 어떻게 달성하는 거지. 늘 말했듯 호감도 체크가 안 되니, 단순히 100을 채운다는 그런 건 불가하고,
147
- ...고백?

가장 유력한 건 이거였다. 외국도 아니고 국산 게임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하면 역시 고백이지. 정말 간질간질한 걸 원한다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고백일 테고.

그 말을 어떻게 끌어내느냐가 이제 관건인 것이다.
148
-

문대는 이젠 재현에게 겁을 먹지 않고,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로 생각했다. 둘이서 하는 게 사랑이라면, 무조건 그를 좋게 봐야 했고, 억지로 콩깍지를 장착하는 게 맞았다. 뭐, 데이터에게 감정이 생겼다고 인정한 순간부터 사실 그럴 필요가 없긴 했지만.

- 주말에 어디 가자고요?
- 네.
149
- 어디 가는 건 자주 했는데, 특별하게 하고 싶은 게 생겼어요?

한가로운 낮, 커피를 내리는 재현이 부드럽게 물었다. 은은한 커피 향이 나는 집 안, 추운 날씨와 다르게 따뜻한 집 안으로는 햇빛이 들어오니 그게 참 진풍경이었다. 문대는 커피 한 잔을 받으며 대답했다.
150
- 생일이라서.
- 생일?
- 네.

물론 현실에서도 생일을 잘 챙기진 않았다. 어쩌다가 설정해둔 메신저 개인정보를 통해 축하 받고 나서야 생일인 걸 자각한 적도 있었다. 태어났을 뿐인데 그걸 굳이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문대의 말을 들은 재현이 조금 생각에 잠겼다.
151
- 그러게, 다 알려달라고 했는데 내가 이름만 물어봤네요.
- 아, 사실 생일이 특별한 건 아니라서.
- 특별한 건 아닌데 왜 갑자기 특별하게 챙기려고요?

항상 머뭇거리던 모습을 보여주던 문대가 침 한 번 삼키고 담담하게 말했다.

- 신재현 씨랑 같이 보내고 싶어서요.
152
어디 데이트 가자고 하면 끌려다니더니,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어색했다. 재현이 살짝 의외라는 듯 이목구비에 미세한 변화가 있었지만, 금방 평소처럼 웃을 뿐이었다.

- 그거 되게 듣기 좋은 말이네요.
- ...
-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거는?
153
-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잘하면 엄청난 생일 선물을 받을 수도 있다.

주말 전까지 그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솔직한 모습을 보였다. 만약 현실에서 살인마 청려가 아닌 평범한 신재현을 만났다면 이렇게 지내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대했다.
154
친구들에게도 가끔 집에 초대해서 요리를 해준 적이 있는데, 매번 대접 받다가 직접 요리도 시도했다.

- 왜 그동안 요리 안 했어요?
- 혼자 먹던 거라 남한테 선보이기는 좀,

는 무슨, 주방에서 등 보이다가 칼 찔릴까봐 나서지 않은 게 버릇 들여진 것이었다.
155
이곳을 탈출하게 된다면 일상으로 돌아가는데, 언제까지고 무기력해질 수는 없지. 어쨌든 신재현은 제법 기뻐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식으로 부디 스며들어서 네가 내게 사랑을 고했으면,

그렇게 다가온 생일. 재현은 문대에게 저번에 말했듯이 같이 데이트하자고 하였다.
156
어딜 가냐고 물었지만, 재현은 알려주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뭐, 마음 한 구석으로는 그게 그 작업실이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는데, 다행히도 그냥 평범한 식당이었다. 그런데 매우 고급진.

- 이게 무슨.
- 생일이라고 했으니까.
157
- ...전 신재현 씨 생일을 챙겨드리지 못했는데요.

괜히 미안하다는 식으로 말하며, 고기를 느릿하게 썰었다.

- 왜요.
- ...
- 시계탑 프러포즈 너무 멋있었는데.

보통 그건 그저 타이밍이 맞았다고 하는 거다. 그게 낭만적이라며 좋다고 하면 찬물을 끼얹을 이유도 없지.
158
살고자 하는 발악이 낭만이 될 수가 있는 거구나.

- 음식 좀 입맛에 맞아요?
- 아, 네. 좋네요.

사실 이 레스토랑도 이미 알고 있었다. N번째 재시작 중 그에게 쫓기면서 레스토랑에서 테이블을 다 뒤엎고 다니며 추격전을 벌인 적이 있었으니까.
159
괜히 갑자기 미안해지네. 그러니까 오늘은 싹 비워서 먹겠습니다.

그렇게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그가 좋아하는 드라이브. 왜 이렇게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목적지 없이 달리는 자유로움이 좋거나, 운전하는 행위 자체가 좋거나, 여러가지 이유겠지.
160
12월의 날씨가 무척 추워서 창문 열기엔 무리였지만, 그래도 제법 좋았다.

- 운전 안 힘드세요?
- 딱히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아요.
-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 조수석에 문대 씨가 있으니까 그런거지.

아, 어쩌면 진짜 끝이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161
그렇게 밤이 되어, 재현이 문대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전망대. 문대는 사실 이런 곳이 있었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게, 막다른 길이 확실한 전망대를 찾아 굳이 올라가진 않으니까. 어쩌면 도망가다가 한 번쯤 멀리 서 있는 모습을 봤을 수도. 그렇다고 해도 오는 건 정말 처음이네.
162
어떻게 보면 이게 게임 맵 이런 거 아닐까.

- 야경 보는 거 좋아하세요?

방금까지 내내 드라이브하던 사람이 굳이 이렇게 또 전망대를 찾을 이유가 있나해서 문대가 물었다. 물론,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확실히 다르지만, 둘 다 어쨌든 야경이라고 표현하지 않던가. 재현이 말했다.
163
- 여기선 모든 게 다 보이잖아요.
- 그렇죠.
- 안 가본 곳까지 같이 가보자고.
- ...
- 그런 의미인 거죠.

아, 지금이라면 좋은 타이밍이 아닐까. 색색의 조명이 어우러진 야경을 배경 삼아 제게 웃어보이는 재현과 문대가 마주보며 한참 말이 없었다. 시선을 끝없이 얽히다가 재현이 먼저 말했다.
164
- 그래서 생일 선물은?
- ...좋아, 합니다.
- ...
- 제가 신재현 씨를요.

절대 고백이 툭 튀어나오는 게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심장도 그걸 알고 있다는 듯 눈치껏 미친듯이 쿵쾅거리는 게 정말 마지막 순간이라고 믿었다. 이제 그가 대답만 해준다면,
165
- 듣기 좋은 말이네요.
- ...예?
- 이만 집으로 돌아갈까요? 오늘 제법 오래 밖에 있었는데?

딱 잘라 버렸다. 어라, 이게 아닌데. 공중에 흩어져버린 제 고백에 벙져서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다리가 땅에 뿌리를 내렸다. 진짜 이런 경우의 수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166
이런 당황스러운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재현이 문대의 볼을 장난스럽게 툭 쳤다.

- 귀여워서.
- ...
- 좀 나중에 말해주려고.
- ...
- 어서 집으로 가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문대는 여전히 좀 충격이었다.
167
나중에 말해준다니. 그렇다는 건 저놈도 나를 좋아한다는 건데, 수집했다는 창이 안뜨는 걸 보면 진짜 그걸 말로 들어야 한다는 추측이 정답이구나.

- 곧 문 닫는대요, 얼른 와요.
- 아, 네.

나중에 말해준댔는데도 왜 초조한 마음이 드는 걸까.
168
-

다음 날 아침이었다. 눈을 뜬 건, 알람 때문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 것도 아니었다. 예민해진 귀가 신재현의 발소리를 눈치채고 멋대로 반응하며 딱 눈이 떠졌다. 그랬더니, 신재현은 잘 잤냐면서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는데 이게 참 묘했다.
169
이것도 그냥 사랑으로 인정해주면 안 되는 건가. 꼭 대사를 들어야 한다니.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매달려야 하는 거잖아.

그렇게 해달라고 대놓고 요구하는 것도 나름 방법이겠지만 왜 굳이 그렇게 재촉하냐고 오히려 뒷걸음질칠 수도 있고 나중에 말해준다고 분명히 말했으니 우선은 기다려야 했다.
170
그래서 좀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더니, 문제가 좀 발생했다. 나는 분명히 이 새끼한테 고백을 했다. 그게 대체 뭐가 문제냐면, 어쨌든 제딴에 마음이 통한다고 여긴 모양인지 거리낌없이 다가온다는 거. 평소에도 그렇게 거리를 벌리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이건 진짜 뭐, 너무 적극적이라고 해야 하나.
171
- 내가 형이에요?
- 네, 뭐... 그렇게 되네요.
- 아하.
- ...형이라고 해드려요?
- 아뇨. 딱히? 차라리 말 놓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국내에서 만든 캐릭터지만, 나이를 유별나게 따지는 그런 꼰대 성향은 아닌 건가.

- 우리 친해보이잖아요.
- 친하다면 좋은 거네요.
- 당연하죠.
172
그러한 이유로 어쩌다보니 말도 슬쩍 놓게 됐는데, 같이 놓자고 한 것 같은데 나만 말이 짧아졌다. 뭐지, 함정인가. 예의도 없는 사람이라고 나중에 공격하려고?

- ...이게 뭐야?
- 팔찌요.
- 아니, 그 팔찌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닌데.
- 아, 생일 선물.
173
일주일이나 지난 시점에서 건네는 선물. 단순히 길가에서 주워온 것 같지도 않고, 정말 매장에서 직접 고른 것 같은 이 팔찌는 손목에 잘 어울렸다. 이렇게까지 선물을 주는데,

- 말고는?
- 응?
- 그거 있잖아.
- 팔찌 잘 어울리네요.
174
대체 뭐 얼마나 끝내주는 고백 멘트를 하려고 이렇게 질질 끄는 건지. 애인이 프로포즈를 절대 안 해요, 라고 걱정하며 방송에 사연 보내던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됐다. 이런 마음인가. 아니, 준비랄 게 있나? 이건 거창한 게 아닌데도.
175
큰 감정이 아닌데 사람을 속이기 위해 부풀렸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절대 아니었다.

- 집에서도 차고 다니니까 고민한 보람이 있네요.

누가 저 모든 감정과 눈빛과 말투를 속여내. 데이터는 그렇게 섬세하게 움직이지 못한다고.
176
열흘이 지나니 이건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사실 신재현이 사랑이라는 단어에 트라우마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사랑 엔딩을 넣을 정도면 그 단어를 뱉는 순간 어떤 장치가 발동하기 때문에 뱉어내는 조건이 까다로운 건가. 아, 장치가 있긴 하지. 엔딩 수집. 그래서 설마 진짜로?
177
- ...

방 안에서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내가 놓친 단서가 있는지 살폈다. 지금까지 수집했던 아이템들을 하나씩 꺼내보았다. 딱히 수확은 없었다. 그러다가 또 눈길을 끈 64번째 아이템. 사진이라 확대가 되지만,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밖으로 끌어냈다.
178
어린 신재현 사진. 1127이 생일이라고 했으니, 이건 생일날 찍은 사진인가.

- 이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누구에게나 순수한 시절은 존재하고, 특정 계기가 생겨서 비뚤어지는 거니까 혹시 생일날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한 건가.
179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사랑이라는 단어에 예민해질 이유가? 사진을 붙들고 여러 추리를 시도했지만, 도통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그때였다.

- 저녁은 뭐 먹을,
- ...아, 아무거나.
- ...
- ...

분명히 노크와 함께 들어온 신재현이었지만, 두어 번 두들기고 바로 열리는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180
황급하게 아이템을 다시 안으로 보관했는데, 하필 무작정 선택하는 과정에서 하나를 빼먹고 말았다.

- ...이게 대체?
- 그건,

그래, 빌어먹게도 하필이면 사진이었다. 많고 많은 아이템 중에 재수없게도 그걸 빠뜨렸다. 누가 봐도 제 사진이었다. 단순 복사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사진 상태였다.
181
분명히 작업실이라고 지칭한 그곳에 있어야 할 사진이 여기 있으니 의문을 가지는 듯했다. 하지만 신재현은 그보다 다른 것에 놀랐다.

- 이거 내가 뭔지 너무 잘 알거든요?
- ...
- 그리고 이게 어디 있는지도 알아요. 당연하죠, 내 물건인데.
- ...
- 그런데 어떻게 2개냐는 거예요.
182
그거야 당연했다. 아이템은 수집하면서 플레이어 아이템 창에 복제되는 형식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물건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후 아이템을 확인하면 이미 수집한 아이템이라는 문구가 뜬다. 그게 이 게임이니까. 하지만 신재현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183
같은 사진이 두 개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뒤에 적힌 글자까지 똑같은 건 불가했다.

- ...사랑한다고 하면,
- ...
- 말해줄게.

미쳐버린 뇌가, 위기감을 느끼고 강제 종료를 선택했다. 내내 매달리지 않다가 갑자기 고백해달라며 사랑을 운운했다. 당연히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다.
184
신재현은 넘어와주지 않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사랑한다고 한 마디면 끝나는 게임인데. 그래.

- 게임이야.
- 네?
- ...여기 게임이라고.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다면, 이또한 방법이었다.

- 나는,
- ...
- 너에게 수십 번을 살해 당한 플레이어야.
185
재현이 움찔했다. 자신이 살인마라는 건 너무 잘 알았다. 그런데 박문대가 자신에 의해 수십 번 죽음을 맞이했다니. 이건 너무 터무니 없는 소리 아닌가. 왜냐하면 박문대는 원래 자신의 목표물이었지만, 지금은 죽이길 포기한 목표물 아니던가. 그런데 왜 죽은 거지.
186
- 못 믿겠어? 그런데 이거 진짜야.
- ...
- 내가 그래서 너 무서워했던 거고.

재현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문대였다. 그래, 너도 똑같이 머릿속이 뒤집어져서 방심해줘. 재현은 침착하게 문대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내가 납치했다고 생각한 그가 탈출하고, 그를 쫓다가...
187
- ...

생각해 보니 그는 기이할 정도로 제 패턴을 꿰뚫고 있었다. 이게 그냥 우연이 아니라면,

- 그런데 나는 다 괜찮으니까, 그냥 사랑한다고 한 마디만 해줘.
- ...
- 나 그거면 돼. 여태껏 죽어도 잘 되살아났거든.
188
그는 자신을 플레이어라고 지칭했다. 사는 게 목적인 플레이어면 그냥 살려달라고 협상하면 될 일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위기의 순간에서도 사랑한다고 할 이유가 있나? 아직도 게임이라는 걸 쉽게 받아들일 리 없었지만, 그의 말이 오로지 진실이라 생각하고,
189
만약 자신은 게임 속 캐릭터에 불과하다면? 플레이어가 굳이 사랑을 바라는 목적이란?

-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고하면,
- ...
- 당신이 날 떠나는 거구나.

신재현이 스스로 깨닫고 말았다. 문대는 설마 여기까지 깨우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90
이게 어떻게 게임이냐면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부정할 줄 알았는데, 벌써 그렇게 도달했다고?

- 아니야.
- 아니라면 말해요.
- ...
- 내게서 꼭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뭔지.

여기서 변명을 해야 하는데, 그래야 내가 살아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데.
191
왜 어떠한 변명도 생각이 나지 않는 건지. 제발 데이터에 감정 이입하지 마. 너 탈출해야 한다고.

- 내가 너를 사랑해서,
- 그거 거짓말이잖아.
- 아니라고.
- 내가 고백하면 다시는 안 나타난다는 거잖아요.
- ...
- 이래도 진짜 아니에요?
192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뒷주머니에서 무언가 나왔다. 서늘하고도 소름돋는 감각.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았다. 총구가 정확하게 이마와 맞닿았다. 배신감을 느낀 살인마는 각성하기 마련이었다. 그에게 부여된 역할을 잊어선 안 됐다. 그러니까, 분노에 찬 그가 내게 할 행동은 어쩌면 당연했다.
193
문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긍정을 의미했다. 자신이 죽이면 이 게임은 다시 시작된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관계를 아예 처음으로 돌리기 위해 그는 저를 죽일 수 있었다. 애초에 자신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였으니까.
194
하지만 그는,

- ...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허탈하게 웃으며 총을 내려놓았다.

- 어차피 되살아난다고요? 그래서 내가 몇 번이나 당신을 죽였고,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아요?
- ...
- 아니.
- ...
- ...내가 당신을 어떻게 죽여요.
195
101번째 재시작, 살인마에게 부여된 명령어가 내쳐졌다. 그가 플레이어를 죽이는 걸 스스로 거부했다. 그리고는 자기를 두고 돌아가지 말라면서,

- ...여기 남아 있어요.

그렇게 말했다. 이게 말이 돼? 이딴 헛소리를 믿어주는 것도 모자라서 날 죽이지 못한다고?
196
아니, 나는 가야만 해. 이번 재시작은 그 어떤 때보다 대실패야. 차라리 끝내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네가 이렇게까지 내게 간절해질 거라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단 말이야.

- 그만해, 차라리 나 죽이라고. 제발.
197
우리 그냥 처음부터 다시 하자. 지금껏 잘 그래왔잖아. 왜 여기서 미련하게 굴어. 너 그냥 데이터잖아.

- 사랑하지도 못하고, 죽이지도 못하면 네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신재현은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198
눈을 떴을 때는 그러니까 어두운 공간이었다. 낯설지 않았다. 이곳은 내게도 지독하리만큼 익숙한 곳이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곳, 시작점. 대체 여기로 왜 돌아온 건지. 분명 신재현 품에서 정신을 놓은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결국 그가 나를 죽이는 걸 선택했나.
199
복잡한 감정 속에 시스템 창이 어서 뜨길 기다리는데,

[ 히든 엔딩이 수집되었습니다. ]

중복된 엔딩 수집도 아니었고, 그토록 염원하던 보너스 엔딩도 아니었다. 히든 엔딩.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데. 너무 오랜만에 돌아와서 어색했지만, 현실을 서둘러 받아들이고 묶인 손을 풀어냈다.
200
그래서 그 엔딩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 ...미친 새끼.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네가 날 죽인 것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은 것도 아니야.

[ 히든 엔딩 : # Special 살인마의 말로 ]

나를 보낼 수도 없고, 나를 죽일 수도 없는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201
그걸 인정하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너는 게임 속 캐릭터잖아. 네가 자아를 가지고 직접 네 머리에 총을 쐈다는 거냐고. 히든 엔딩이라고 해도, 이게 어떻게 가능한데. 다시 시작했을 리가 없어. 네가 죽은 게 아니라, 내가 죽었다고 하라고.
202
그냥 내가 배신했다는 사실에 못 이겨서 날 죽였다고 하란 말이야.

고통 없이 재시작했는데, 내 정신이 온전치를 못 했다. 원래 내게 재시작이란 꼭 죽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였는데, 내가 아니라 타인의 죽음으로 이렇게 되돌아 오다니, 이럴 수가 있는 걸까.
203
나를 수십 번 죽이는 것도 모자라서, 대체 어디까지 해야 현실로 돌아가게 해주는 건데.

포박에 사용했던 줄을 끊어낸 날붙이를 보았다.

- ...

오류가 났다고 해. 지금이라도 시스템에서 내가 신재현이 사랑했다는 걸 인정하고 보내달란 말이야.
204
[ 엔딩 수집 : #20 최악의 결말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그래, 진짜 최악이다.

[ 엔딩 수집 : #20 최악의 결말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이건 최악이라고. 최악 외에는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저 최악 그 자체다.
205
진짜 내가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못 들었다는 이유로 이렇게 나락으로 보낼 필요가 있어? 신재현을 원망하는 게 아니야. 내 살을 아무리 뚫어도 결국 내 기억은 지워지는 게 아니라서,

[ 엔딩 수집 : #20 최악의 결말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206
나 진짜 그게 미칠 것 같아. 제발 나 좀 여기서 벗어나게 해줘.

수없이 난도질하고, 미친 시스템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겠다고 온갖 발악을 하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이게 대체 몇 번째 재시작인지 알 수 없었다. 100이든, 200이든, 300이든 그게 중요한가. 내가 못 벗어나는데.
207
- ...

그래. 내가 이런다고 달라질 게 없구나. 다시 마음을 다잡고서 엔딩을 모으기로 하였다. 신재현의 흥미를 끌어내는 건 어떻게 하는지 이제 잘 알았잖아. 그런데 내가 네 이름을 멋대로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어. 문대는 눈을 깜박이면서 가만히 기다렸다.
208
어차피 질질 끌리면 주어진 시간 내에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리타이어 당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안녕, 신재현.

문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209
그가 찾아온다면 이름을 불러주며 인사하고, 그렇게 되면 어떻게 알았냐며 당황할 것이다. 그때 이제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면 될 일이었다.

- ...

굳이 도망치지 않고 이러는 이유는, 너무 많이 지쳤다. 그래, 간절하게 도망칠 의지가 사라졌다.
210
만약 시기가 꼭 그의 생일이어야 해서, 이렇게 벌써부터 말 거는 게 문제라고 한다면, 죽이던가.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그걸 지금 따져서 뭐하는데.

정말 얌전히 기다렸다. 확인하러 오면서 일어났냐고 물어보고 자비 없이 총을 겨누는 그림을 상상했다.
211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았다. 시스템에 오류가 걸려서 게임 속 시간이 멈춘 건 아닌지 의심했다. 아니, 그랬다면 내 몸도 멈췄어야지. 문대는 이상하다, 싶어서 줄을 끊어내며 수갑도 풀었다. 팔이 굉장히 뻐근했지만, 익숙한 고통이었기에 괜찮았다.
212
- ...신재현?

원래 공략법은 방에서 탈출하여 알맞은 통로로 탈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대는 재현이 작업실이라 칭했던 이 집에 있는 모든 공간을 다 열고 다녔다. 그안에 무엇이 있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라고 만들어진 캐릭터였으니까.
213
일부러 소란을 피우고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는데,

- ...

신재현이 보이질 않았다. 대체 어째서? 그제야 정말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문대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대로 어딘가를 향해 뛰었다. 이건 서둘러 확인해야만 했다.
214
기다려도 나오지 않고,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된 건데.

문대는 재현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찾아갔다. 하지만 벨을 아무리 눌러도 응답이 없었고, 기억에 의존하며 비밀번호라도 두들기고 싶었지만, 언제나 카드 키로 열었던 지라 문고리를 쥐어뜯어도 해결할 수 없었다.
215
- ...

이 세계에 신재현이 대체 왜 없는 건데. 이게 진짜 무슨 일인지 설명이나 해봐. 히든 엔딩을 모으면 혹시 살인마가 아예 사라지는 거야? 아니면 그저 단순한 버그야? 오류냐고.

플레이어는 외부인에 불과하잖아. 그저 이 세계를 흐트러뜨리는 존재일 뿐이잖아.
216
그렇다면 주인공은 신재현이잖아. 주인공이 왜 작품에서 사라졌는데. 거짓말하지 마.

어쩌면 한 번의 오류일 수도 있었다. 이번 시작 때 잠시 시스템이 이상해진 것 뿐이다. 문대는 아파트 비상구로 달려가 창문을 열었다. 진짜 더럽게 비좁네. 어떻게든 그 틈으로 몸을 구겨넣었다.
217
[ 엔딩 수집 : #14 추락 ]
※이미 수집한 엔딩입니다.

다시 돌아왔을 때 문대는 결심한 듯,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구속을 풀어냈다. 재빠르게 문에 걸린 자물쇠도 풀고, 거의 부술 기세로 열었다.
218
- ...
- ...

그런데 이번에는 문앞에 신재현이 있었다. 문대가 순간 당황할 뻔했지만, 바로 안심이 되었다. 그래, 정말 오류가 맞았던 거구나. 너 아직 이 세계에 존재하는구나.

- 아, 안...

이제 준비했던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 나를,
- ...
- 사랑해요?

신재현이 먼저 말했다.
219
- ...뭐?

항상 그는 이런 때에 마주치면, 어떻게 빠져나왔냐면서 알 수 없는 웃음만 지었다. 문대는 재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 ...너 다시 말해봐.

이건 살인마 청려가 아니라, 내가 아는 신재현이잖아.

- ...나를 사랑하냐고,
- ...
- 그렇게 말했어요.
220
문대가 이건 또 무슨 경우인지, 혼란스러웠다. 저 말투, 저 눈빛, 모든 걸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가능한 거냐고. 그러니까 신재현이 자아를 가졌어? 캐릭터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거냐고. 이전에 있던 기억이 옮겨지는 정도면 대체,
221
-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내 존재 의의부터, 당신에 대한 것까지.
- ...
- 생각해 보니까 나는 정말 무엇때문에 살인마인지 모르겠는거예요. 그리고, 내가 정말 사람을 죽였나? 그런 의문이 생기고, 딜레마에 빠진 거죠.
- ...
222
- 그런데 그런 걸 다 떠나서, 당신이 정말 내게서 멀어지는 게 가장 큰 절망이라서, 차라리 죽게 되면 나를 영원히 기억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 ...
- 내가 안 죽었대요.
- ...
- 이곳으로 돌아왔대.
223
그는 정말 모든 걸 기억하는 게 맞았다. 시스템이고 뭐고, 그런 거 다 모르겠고, 스스로 그걸 해냈다. 어떠한 기술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 돌아왔다고 자각하니까 당신을 도저히 마주할 수가 없더라고요. 맞잖아요? 내가 그렇게 죽었는데?
- ...
224
- 그래서 놓아주려고, 몇 번이고 도망쳤는데 다시 여기로 돌아와서 이게 뭘까. 벌 받는 건가, 생각이 들었는데,
- ...
- 진짜 벌 받는 게 정답이었네요.

스무 번째 엔딩을 또다시 여러 번 반복하면서 재현도 강제로 반복되었다.
225
재시작의 이유가 문대의 자살이라는 것을 눈치 챘던 재현은 죄책감에 어찌할 줄을 몰랐고, 마지막으로 또 돌아온 순간, 그를 결국 찾아왔다.

- ...네가 대체 어떻게,
- 그래서,
- ...
- 미안해요.

전부 다 나 때문이에요. 그 말에 문대가 반응하지 못했다.
226
아니, 그게 왜 다 네 탓이야. 우리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다 나를 이 빌어먹을 게임 속에 가둔 어떤 외적인 존재 때문인 거야. 우리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너도, 나도 그냥 희생당했던 것뿐이야.

- 내게서 듣고 싶었던 말이 있다고 했죠.
- ...
227
- 당신을 괴롭게 한 주제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지 모르겠지만,

재현이 천천히 손을 뻗어 문대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그에게선 온기가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대체 누가 그에게 실제 사람이 아니라고 할까.

- 사랑해요.

문대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228
그 순간, 주변 모든 광경이 흐릿해지면서 한가운데에 시스템 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모든 엔딩 수집에 성공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

눈앞이 뿌옜다. 이게 눈물 때문이었을까. 손에 닿았던 온기가 점점 멀어지면서, 문대는 두 눈을 빠르게 비볐다.
229
다시 시야가 트였을 때는, 가장 익숙해야 했지만, 낯선 곳이었다.

- ...

그래, 그토록 바랐던 집으로 드디어 돌아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렇게 고대했던 결말을 얻었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엔딩을 원했나? 아니야.
230
너희가 먼저 살인마'와' 사랑하라고 했잖아. 왜 끝까지 제멋대로냐고.

[나를 사랑해요?]

나도 널 사랑하는 게 진심이라고 대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잖아, 미친 새끼들아.
231
-

염원했던 엔딩을 맞이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분수에도 맞지 않는 샴페인이라도 사서 혼자 크게 터뜨릴 거라고 다짐하던 때가 있었다. 샴페인이고 나발이고, 축배를 들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내내 서늘했던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서 땀을 흘리게 하는 것도 어색했고,
232
금방이라도 몸 한 구석이 터질 것 같은데 미치도록 고요한 게 이상했다.

현실을 자각하는 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꿈을 지독하게도 오래 꾼 탓에, 20년 넘게 살아온 인생을 부정할 만큼 그 꿈이 현실이라고 나도 모르게 믿었던 모양이었다.
233
어떠한 순간에도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고 나름 자부했던 것 같은데 전혀 아니었다.

그렇게 거기 혼자 남아버린 신재현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생각이 가장 먼저였다. 나처럼 이상현상을 겪은 또다른 플레이어가 나타날까. 아니면 평생 자아를 가진 채 게임 속 세계에 영영 사는 걸까.
234
멍하니 있다가 꼬박 잠이 들고, 자는 것도 지쳐서 일어나고, 그렇게 또 멍하니 있기를 반복하면, 이젠 밥 좀 먹으라는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그제야 좀 받아들였다. 아무리 잔다고 해도, 다시 넘어가지 못하고, 정말 굶어죽는다거나, 스스로 난도질한다고 해도 완전한 죽음이 될 뿐이라는 걸.
235
- ...

결국 일어났다. 그래, 거기에 너무 몰입한 내가 미친 새끼였지. 아무리 그래도 삼일 내내 아무것도 안 했다니 제정신인가. 빌어먹을 게임 탓은 이제 그만하고 잊어야 했다. 차라리 신재현을 사랑해버린 나를 비난하는 게 옳았다.
236
[서든 데스 나잇]
- 이 앱을 제거하시겠습니까?
취소 / 확인

꼭 기억해야만 한다면, 부정적이었던 모든 것을 덜어내고, 살아가는데 아주 작은 원동력이 될 정도의 좋았던 부분만 가져가는 게 맞았다.

[서든 데스 나잇을 제거했습니다.]

이정도면 즐거웠지, 라면서.
237
-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젠 괜찮아졌다. 좀 차분해지고 나니, 그 게임에서 몇 번을 굴렀는데 왜 이쪽 시간은 멀쩡하게 처음 게임 속으로 갔던 그때인지. 뭐, 괜히 1년이 통째로 날아가서 대학 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것보단 나았다. 과외 아르바이트나 하려고 했던 지난 계획은 결국 미뤄지고,
238
프로그래밍 관련 학원 특강을 방학동안 짧게 다니면서 부족한 전공 지식을 채웠다. 2학기 강의 신청도 무사히 마치고, 개강하면서 학교 사람들과 오랜만에 만났다.

방학동안 어떻게 지냈냐면서 짧은 안부나 주고받고, 3학년인 만큼 다들 신입생 때처럼 술 마시고 놀러다닐 생각보다는
239
취업 걱정부터 먼저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1학년 때는 강의만 끝났다 하면, 저녁에 술 마시자면서 끌고 가던 동기들이 꼭 있었는데 이젠 그런 모습이 확연히 줄었다. 게다가 새내기도 학교 적응에 끝난 2학기였으니까.
240
오리엔테이션 주가 끝나고, 슬슬 과제가 쏟아져 나왔다. 고학년이니 더 그러했다. 그나마 이번에는 교양도 그렇고 조별과제가 아예 없다는 게 위안이었다. 덕분에 누굴 따로 만나지도 않고 오로지 학교, 집, 학교, 집만 반복하는 일상이었다.
241
- 곧 5시에 공과대학 학생들 대상으로 한 외부 강사 초청 프로그래밍 특강이 있습니다. 관심 있는 학생들은 제 1공학관으로 가시면 됩니다. 자세한 강의실 위치는 과대한테 물어보면 될 거예요. 혹시 다른 질문 있는 학생?

그렇게 오늘도 모든 강의가 끝나고 문대는 빠르게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242
오늘도 과제 때문에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붙잡을 생각이었다. 그전에 카페라도 들러서, 미리 카페인 좀 수혈해두기로 하였다. 확실히 가격이 싼 것은 교내에 위치한 카페였다. 문대는 방학동안 알바도 못했는데 이런 소소한 부분에서 아끼고 봐야한다며, 바로 교내 카페로 직행했다.
243
공학관 내 위치한 카페, 문대는 잠시 다른 메뉴를 도전해볼까 생각하다가도, 사람이 마시던 걸 마셔야 한다면서 결국 메뉴를 바꾸지 않았다.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 주문이 조금 밀려서, 기다려주세요.
244
5시. 확실히 강의가 다들 끝나서 커피라도 한 잔 사들고 돌아가려는 건지 주문이 한 번에 밀려든 모양이었다. 급한 일도 전혀 없고, 그래봤자 아메리카노가 30분이 걸리겠냐며 문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각자 친구들과 떠들거나 핸드폰을 보며 제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245
문대도 핸드폰이나 잠시 보았다. 카페에 작게 설치된 티비에서는 공학과 학생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

​[게임이 화제가 된 만큼, 어찌 보면 게임 속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살인마 청려, 캐릭터가 공포 게임 중에서도 굉장히 이례적으로 인기가 많아요.
246
혹시 청려가 이렇게 인기가 많아질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강의가 끝나기 직전, 교수가 전했던 내용을 다시 전달하는 과대의 메시지를 대충 읽던 문대가 반응이라도 남기려 손가락을 두들기는데 멈칫했다.
247
[사실 공포게임 속 귀신이나, 살인마, 좀비, 등등의 무서운 존재들이 언제나 흉측한 모습으로 나오잖아요. 그런데 게임을 처음에 만들 때, 뭐라도 시선을 끌어야 한다, 라는 생각때문에 무작정 일단 잘생기게 만들자, 였던 것 같아요.
248
비록 캐릭터에 게임 내에서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거의 가렸지만, 잘생긴 사람들은 눈만 봐도 딱 알잖아요? 하하!]
[아, 잘생기게 만든 게 의도적이었군요. 혹시 모티브라도 있었나요?]

문대가 티비에 시선을 고정했다.
249
[국산 모바일 공포게임 서든 데스 나잇, 글로벌 누적 다운로드 천만 돌파 기념 개발자 인터뷰] 녹화된 인터뷰였던 모양인지, 중간중간 편집된 자막과, 장면이 돋보였다.

[이제야 밝히는 건데, 사실 대학교 다닐 때 정말 잘생긴 동기가 있었거든요. 그 친구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250
살면서 그렇게 생긴 사람을 또 볼 수 있나, 연예인을 왜 안 하지? 싶을 정도였는데 잘생긴 캐릭터를 만들자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그 친구밖에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그때는 게임이 이렇게 잘 될 줄도 몰랐고,
251
무작정 화제성만 생각했던 탓에 나 혹시 너로 캐릭터 하나만 만들어도 되냐, 라고만 묻고 본따서 만들어 버렸는데, 너무 유명해져버렸으니 조만간 연락이라도 하려고요. 어쩌면 먼저 연락이 올 수도 있겠네요. 사과부터 해야겠습니다.]
[하하하! 이거 정말 재밌네요.
252
다른 것도 아니고 살인마 캐릭터인데 이거 문제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청려라는 캐릭터가 인기가 많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부정적인 여론이 가득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어찌됐든 허락을 받긴 하셨네요, 청려의 실제 주인공과도 원만한 합의가 되길 바랍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253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못해 그 안에서 미친듯이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게 진짜 무슨 소리야. 저거 내가 아는 게임이 맞는 거지? 애꿎은 영수증만 한없이 제 주먹 안에서 구겨졌다.

[게임이 이렇게 히트치면서 최근에 저희 말고도 인터뷰나 강의 스케쥴이 많으신 걸로 압니다.]
254
[네, 맞습니다. 당장 이번 주 금요일에도 연희대학교 공과 대학 학생분들을 대상으로 특강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가장 핫한 게임의 개발자 분께서 직접 특강하신다니, 학생 분들도 영광이겠네요.]
[아, 그런가요? 저야말로 영광이죠. ]

- 197번 손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 손님!!!
255
제 커피가 나온 것 같아서 앞에서 대기 타다가 별안간 커피를 받지도 않고 문대는 뛰어갔다. 뒤도 안 돌아보고 건물 밖으로 나가 제 1공학관으로 향했다.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5시 10분. 강의가 끝났을 리는 없었다. 서둘러 넘어가서 특강이 열린다는 강의실 앞까지 도착했다.
256
- ...

오늘 한다고 한 게 그 사람 강의가 맞지? 강의 도중에 들어가는 게 흐름도 끊기게 하고, 좋은 짓이 아닌 건 알았지만, 사정이 생겨서 뒤늦게라도 듣고 싶었던 열정적인 학생 1 정도로 생각해줄 수 있었다. 문대는 조심스럽게 강의실 문을 열었다.
257
- 그래서 저는 기획 초기에, 아, 네.

뒷문으로 들어갔지만 한 눈에 들어오는 강의실 구조상 당연히 눈에 띄었고, 문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죄송하다는 표현을 했다. 특별 강사인 개발자는 괜찮다며 어서 앉으라며 손짓했고, 문대는 빈 자리를 찾아 급하게 아무데나 앉았다.
258
다행히 1시간 짜리 특강이라 아직 초반이었다. 게임 업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어떤 대학생활을 했으며 덕분에 처음 게임을 만드려고 할 때 어떤 계기가 있었고, 어쨌든 제 인생이 녹아든 이야기와 함께 도움이 될 말을 해주고 있었다.
259
게임 업계로 빠지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업계를 다 알아보는 것도 좋았다. 문대는 가방 깊숙이 넣었던 펜과 함께 노트를 꺼냈다. 계획대로 인생이 굴러가지 않는다고 해도 좋았다. 그게 기회를 잡는 일이라고 하니까.
260
- 아쉽게도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혹시 질문 있으시다면 자유롭게 받겠습니다.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그렇게 1시간이 훌쩍 지나고 개발자는 학생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쭈뼛거리면서 질문을 섣불리 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딱히 질문 자체가 없는 학생들도 있었다.
261
그 사이에서 문대는 손을 들었다.

- 네, 뒤쪽에 있는 학생?
- 혹시 공포 게임 이외에 다른 장르로 신작 게임을 내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 어, 사실 제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하하, 너무 안 어울리죠?
262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은 그런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아, 학생분들 중에 제 게임을 열심히 플레이하신 분이 있다면 그런 욕망이 들어간 걸 알 텐데, 혹시 아시는 분?

거기서도 문대가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었다.
263
- 보너스 엔딩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 이야, 아는 분이 계시는 군요! 하하, 맞아요. 어차피 캐릭터도 잘생기게 뽑았겠다. 조금 이런 쪽으로 이용하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추가된 엔딩입니다. 클리어 조건이 굉장히 까다로울 거라서 수집하셨을진 모르겠지만
264
혹시 도전해보지 못한 분들이 있으시다면 해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흥미로울 거예요.

이후 다른 학생들의 질문도 이어지면서 생각보다 시간이 길게 끌어지고, 시간을 확인한 개발자가 마지막 질문만 받고 특강을 종료했다.
265
끝으로 이렇게 좋은 대학교에서 학생들 상대로 강의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다는 말을 남겼다. 그렇게 학생들이 하나 둘씩 나가고, 특강 자료를 정리하고 나가는 개발자를 문대가 조용히 쫓아가서 물었다.

- 안녕하세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 아, 네! 아까 질문 주셨던 학생분이네요.
266
- 보너스 엔딩도 일부러 만드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 네.

남들이 다 보는 데에서 하지 못했던 질문. 하지만 가장 묻고 싶었다. 대뜸 따로 찾아와서 이 질문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지도 몰랐기에 게임을 다 플레이한 열정적인 유저인 것을 어필하고 드디어 질문했다.
267
- 그러면,
- ...
- ...살인마 청려의 본명은 정말 신재현이 맞나요?

노트북을 가방에 넣던 개발자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 뭐라고 하셨나요?
- 개발자님의 인터뷰을 보았는데, 청려 캐릭터를 단순히 살인마 역할을 뛰어넘어 특히나 신경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 아, 네.
268
- 그래서... 캐릭터 프로필도 세세하게 설정하셨을 것 같은데 따로 인터넷에 나와있지 않아서요. 혹시 설정하신 청려 캐릭터는 원래 이름이 신재현인가요?

상당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문대는 개발자가 하도 황당한 질문을 들어서 반응하지 못한 게 아닌가, 걱정했다.
269
- 혹시 학생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 아, 박문대입니다.
- ...
- 네?
- 아뇨, 그러니까 박문대 학생 맞으시죠?
- 네.

이름을 묻더니 또 당황했다. 남의 이름이 특이하다면서 눈앞에서 대놓고 반응을 보이는 것 같진 않은데 이게 무슨 반응일까.
270
하지만 턱을 매만지면서 무언가 생각하더니 이내 가방을 다시 열어 뒤적거렸다.

- 겨울 방학 때 혹시 알바할 생각 있어요?
- 네?
- 게임 업계 나갈 생각이라면 이력서 한 줄 쓰기도 좋을 거예요. 관심 있으면 종강하고 연락 줄래요?
271
명함을 건넸다. 계속 소개했던 개발자의 이름이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원래 명함을 받았을 때는 제 명함도 주는 게 예의라고 아는데, 학생 신분에 그런 게 있을 리도 없고 무작정 학생증 따위를 보여줄 수도 없으니 감사하다며 받을 뿐이었다.
272
그런데 자신은 게임 업계로 나갈 생각이 없었기에 이쪽 지식이 부족했다. 무턱대고 영광이라면서 매달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 ...그러니까,

명함을 받고 기뻐하기보다는 망설이는 모습에 개발자는 다시 권유했다.

- 원하는 해답이 있다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273
-

11월이었다. 날씨가 많이 서늘해졌다. 10월 초까지는 그래도 짧게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지만, 이젠 다들 외투를 꼭 걸치고 나왔다. 지금 보이는 남자도 그러했다. 셔츠 위로 자켓까지 걸친 남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274
작은 규모의 회사인 탓에, 다른 회사와 건물을 나누어 썼고, 덕분에 층마다 사람들이 내렸다. 겨우 도착한 남자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익숙한 듯 직원은 얼른 가보라며 사장실로 안내했다. 남자가 노크 두 번과 함께 곧장 사장실 문을 열었다.

- ...야, 너 진짜 매번 오는 것도 안 지치냐?
275
- 바쁘다고 연락이 없으니 찾아오는 수밖에.
- 바빠서 연락 못 주는 것도 맞는데 연락할 그게 없다니까???

친구 사이인지, 사장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질색했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소파에 털썩 앉았다.
276
- 내가 진짜 함부로 쓴 건 미안한데, 너도 이제 나 좀 그만 괴롭히면 안 되냐.
- 나는 괴롭힌 적이 없는데.
- 지금 이게 괴롭히는 거야, 이게!

한창 바빠지는 시기인데 왜 눌러앉냐며 짜증을 내도 남자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탁자에 놓인 식물을 보면서 많이 자랐다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277
- 제발 기다리라고, 어? 아직 연락 안 왔다니까?
- 연락처 아직도 몰라?
- 아니, 내가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그리고, 아니면 어떡하려고? 나도 너한테 미안해서 부탁 들어주는 거긴 한데, 내 처지도 좀 생각해주면 안 될까?
278
너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며 머리를 쥐어뜯듯 부여잡았다. 하지만 미안하다거나 그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아무 감흥도 없어 보였다. 남자는 그냥 일어났다.

- 그래, 그러면 가봐야겠네. 다음에 또 올게.
- 야, 신재현!!!

기어코 또 온다는 말에 결국 큰소리가 나왔다.
279
-

이젠 누가 물어도 겨울이라고 할 날씨였다. 문대는 몰아치는 기말고사와 과제로 연이어 밤을 새면서 피로감이 잔뜩 쌓였다. 다행히 오늘은 이제 그 피로감을 풀 수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종강이었으니까. 많은 일이 있었지만, 시험도 문제 없이 잘 보고, 과제도 깔끔하게 해냈다.
280
- 나 진짜 12시 3초전에 메일 보냈어. 57초, 이거 보고 식은땀 났다니까.
- 제출했으니 다행이네.
- 아니었으면 싹싹 빌었다고, 진짜 내가... 아으!
​- 그래, 고생했다.
- 맞다, 그래서 여행은?

2학기 마지막 강의, 교수도 수고했다는 말을 하고, 강의가 끝난 후,
281
4학년이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여행이나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문대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 마지막인데 안 갈 거야?
-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 곧 졸업인데 일이라도 하게? 빼고 가자. 혹시 중요한 거야?
- 응, 좋은 기회가 생겨서.

동기가 아쉽다는 말을 했다.
282
문대도 어쩔 수 없다며 혹시 이런 기회가 다시 생기면 그땐 참여해보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말이나 못하면, 동기가 괜히 문대의 어깨를 툭 쳤다. 문대는 가볍게 웃으며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새겨진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283
신호가 세번 간 끝에 상대가 받았다.

- 네, 안녕하세요. 예전에 연희대에서 명함 주셨던 박문대라고 합니다.

-

12월이 지나고 1월이었다. 정신 없던 연말이 지나고 어느덧 새해를 맞이했다. 연초부터 일할 수 있냐는 물음에 문대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고,
284
간단한 면접을 통해 합격하여 오늘 처음 출근하게 되었다.

- ...나참,

출근길에 다시 생각해봐도 참 웃기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중에 회사를 고른다고 해도, 이쪽 업계는 정말 관심도 없었다.
285
남들과 다르게 열정적으로 한 게임도 없었고, 무난하게 잘 벌어먹는 쪽이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덕분에 종강 이후, 몇 주 동안 열심히 관련 지식을 습득하려고 또 공부했다. 물론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하는데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라고. 그래도 제법 재미있었다.
286
완전히 다른 부분도 아니고, 전혀 모르는 프로그램을 다루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단순히 아르바이트 개념이라서 어려운 업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해답이 있다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제게 명함을 줬던 개발자이자 사장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287
- ...원하는 해답,

사실 기대하지 않으려고 매우 애썼다. 가볍게 시작하려고 했다. 그때 말했듯이 이력서 한 줄 남길 수 있을 거라고, 딱 그런 용도로만 여기려고 했다. 멋대로 품었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어도 손해가 아니라 이익이라고 다잡을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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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애썼다고 하는 게 매우 우스웠다. 첫 출근 전날, 기어코 잠을 자지 못했으니까. 다행히 7시부터 여는 카페가 있어서 아침부터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괜히 뺨을 잡아당겼다. 어쨌든 긴장되기도 하고, 커피도 이만큼 마시니 쉽게 졸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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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도착했다. 문대는 면접을 봤던 탓에 온 적이 있지만, 그래도 어색함에 쭈뼛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서 보이는 사람에게 바로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하게 된 박문대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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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온다고 이야기를 들었다며 인사 받은 직원은 밝게 인사해 주며 바로 팀장에게 안내했다. 그러자 팀장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문대에게 빈자리를 내주었다. 컴퓨터 켜고 잠시 기다리라는 말에 멍하니 있었다. 이내 9시 반 정도 되었을 때 다시 문대 자리로 와서 할 일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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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건 전혀 아니었다. 문대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을 시작했다.

가벼운 일이었지만,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첫 날이라 온몸이 굳기도 했고, 잠시 미간 쪽을 살짝 꼬집었다. 역시 커피를 잔뜩 들이부은 건 잘한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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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점심 시간이 되자, 팀장이 먼저 일어났고, 문대에게 1시까지 점심 시간이라며 자유롭게 먹고 오라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점심 생각을 딱히 못 했는데 뭘 먹어야 하지? 하고 고민하는데 사장이 나와서 문대에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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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죄송해요. 문대 학생 맞죠? 오랜만입니다. 오전에 바빠서 인사를 못 했네요.
- 아, 아닙니다.

무슨 사장이 굳이 인사하러 나오냐고 문대는 생각했다. 괜찮다고 답하니, 문대에게 물었다.

- 첫 날이니까 제가 밥 살게요. 좋아하는 거 있어요?
- 네? 저는 괜찮습니다만, 그... 다 잘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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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1층에서 기다릴래요? 금방 내려갈게요.
- 아, 네.

문대는 어리둥절했다. 혹시 학교 선배 중에 이미 이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이 있나, 생각했다. 인맥을 그렇게 쌓은 편이 아니라서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 매우 적었다. 그렇기에 그중에서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이 없다는 걸 금방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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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냥 사장과 먼저 약속을 잡은 다른 회사 사람이겠지, 라는 생각이었다. 사장의 말대로 먼저 1층에 도착했다. 누구라고 인상착의조차 알려주지 않았으니 알아서 추측해야 했다. 그 정체가 누군지 두리번거리는데,

-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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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개를 돌리다보면 저쪽에서 먼저 알아차리고 다가올 거라 생각했는데 대뜸 등에 무언가 쿡 찔리듯이 닿았다. 차갑다거나, 날카롭다거나, 그런 살벌한 것은 아니었다. 훨씬 뭉툭하고 뭔가 온기가 느껴지는 것에 문대가 뒤를 돌았다.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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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사람,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 꿈 아니면 불가능하다 생각했는데, 이건 현실이었다.

- ...신재현?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든 재현이 장난스럽게 그 끝을 입으로 살짝 불며 웃었다.

- 빵,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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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ern_BF
서나@Western_BF
[청려문대] 메리 데스 엔딩

- 공포게임 배경 엋문
- 판타지 요소 多
- 약 42000자

포타에 백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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