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엋건 연예계 대표 커플, 신재현과 류건우. 3년 째 남들이 부러워할 연애 중인 그들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첫번째는...

@Western_BF
서나@Western_BF
14 views Sep 28, 2026 ~51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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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엋건
연예계 대표 커플, 신재현과 류건우. 3년 째 남들이 부러워할 연애 중인 그들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첫번째는 신재현이 교통 사고를 당했다, 두번째는 그래서 기억상실에 걸렸다, 마지막은

- 미안한데 우리 쇼윈도야.
- 네?
- ...너랑 나랑 진짜로 사귀는 거 아니라고.

그들의 연애는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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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우가 재현의 소식을 접한 것은 하필 기사가 터진 직후였다. 유동인구가 많은 서울 대로변에서 사고가 났던 데다가 하필 근처가 방송국이라서 보는 이도 많았고 그 안에 있던 기자가 손쓸 틈도 없이 기사를 올리는 바람에 그가 사고가 났다는 소식은 전국적으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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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네 소식 들음? 신재현 사고났대 ㅁㅊ
ㄴ 안돼 우리오빠
ㄴ 아 ㅅㅂ 제발 만우절 구라라고 해줘
ㄴ 제발제발제발 신재현 멀쩡하다고 해주세요ㅠ

그의 상태가 심각하지 않길 바라면서 제발 무사하다는 소식이 얼른 들리길 바라는 팬덤과 달리 대중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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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ㅊ 류건우 촬영 중 아니었음? 나였으면 멘탈 개터졌다
ㄴ 나 아는 사람 있는데 촬영 잠시 중단하고 병원 갔대
ㄴ 와 어떡하냐ㅠ 걔네 진짜 잘 사귀고 있잖아
ㄴ 신재현 의식 불명이래?
ㄴ 몰라 근데 지금 들리는 거 없는 거 보면 아직 결과 안 뜬 거 아님?
ㄴ ㅇㅇ 류건우도 어지간히 멘붕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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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의 연애사에도 관심을 가지는 오지랖의 민족이 공개 연애 중인 연예인 커플에는 얼마나 관심을 쏟겠는가. 그렇기에 사고 소식과 함께 건우의 소식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하필 모두가 보는 곳에서 사고를 당한 터라 온갖 소식이 와전되고 뒤틀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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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아는 그대로 건우는 촬영 도중 재현의 소식을 듣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대체 날아오기라도 한 건지, 촬영장 앞까지 벌써 기자가 몇 와 있었다. 질문을 쏟아냈지만 건우는 모두 무시하고 서둘러 재현을 보러 갔다. 차가 막힌 탓에 촬영장에서 몇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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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의 병실을 안내 받고 앞에 있는 매니저에게 물었다.

- 신재현은요?
-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 없을 거랍니다. 다만 상처가 좀 심해서 깨어나는데 조금 걸릴 지도 모른답니다.
- 그나마 다행이네요.
- 촬영 중단하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저보다 많이 놀라셨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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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놀랄 수 없죠, 하지만 방금 말했듯이 살아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건우는 예상 외로 침착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다면서 제 매니저에게 연락을 남길 정도였다. 재현의 매니저는 어쩔 줄을 몰랐다. 몸 한 군데가 망가진 건 아닐지. 그건 다 깨어나고 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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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있을 테니까 잠시 숨이라도 돌리고 오세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건우가 오히려 그의 매니저를 달랬다. 어떻게 그러냐며 재현이 깨어나길 기다리겠다고 하니, 건우는 깨어났을 때 수척한 모습을 보이면 그게 더 좋지 않다며 얼른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오라고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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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가 알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런 식으로 며칠이 지났다. 3일 째 재현이 깨어나지 않아, 건우는 내내 촬영장과 병원을 왔다갔다 하는 신세가 되었다. 사실 일 때문에 피곤하고 제 몸이 혹사 당하는 것 쯤은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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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저기 장소를 옮기면서 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가장 골치 아팠다. 어쩔 수 없었다. 그게 공개 연애의 단점이었다.

- 지금 주연작 하나 들어갔다고 하지 않았어?
- 응. 그 작년 대상 탄 드라마 작가가 쓴 차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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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그러면 촬영하는 와중에 병원까지 이렇게 오는 거야?
- 괜히 몇 년 째 연애하면서 잡음 없는 게 아니라니까? 저렇게 사이 좋으니까 그렇지.

간호사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화젯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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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돌아가는 병원에서 눈을 뜨지 않는 연인을 위해 매일 같이 스케줄 쪼개서 보러오는 건우는 소소한 컨텐츠나 다름 없었다. 로맨티스트, 세기의 사랑꾼 이라면서 온갖 수식어가 다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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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니저님 저 왔습니다.
- 아, 건우 씨! 촬영은 괜찮으세요?
- 네, 뭐... 적당히 마무리하고 왔어요. 저 왔으니까 잠시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면서 숨 좀 돌리고 오세요.
- 진짜 감사합니다. 재현이한테 건우 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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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건우에게 재현을 맡기는 것이 익숙한 매니저가 오늘도 잠을 자지 못했는지 다크서클을 턱 끝까지 내린 채로 인사하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건우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재현을 한 번 보고, 담담하게 핸드폰을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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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목격자가 있는 탓에 오늘도 병원에 왔다는 소식으로 어느 커뮤니티에서든 떠들거라며 건우는 가볍게 sns를 뒤적거렸다.

- ...!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닫힌 창을 두들기는 바람소리는 아니었고, 가만히 핸드폰만 하던 저가 내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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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을 바라보았다. 그가 눈을 떠서는 흐릿하게 저를 보고 있었다.

- 깼어?
- ...
- 기다려, 의사 불러올 테니까.

일어나는 건우를 재현이 손을 뻗어 잡았다. 사고 후유증으로 아직 몸을 움직이기 힘들 텐데 건우가 놀라서 그의 손을 다시 제자리에 두었다. 재현이 물었다.

- ...누구세요?
-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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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벼운 기억상실 정도로 보이네요. 사고 후유증으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 네?

진단 결과, 기억 상실이었다. 의사의 물음에 재현은 거의 대부분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안타깝게도 그의 기억은 20살에서 멈췄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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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자신이 28이라는 것도 모르고, 22살부터 배우가 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러니까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하니, 매니저고 건우고 알아볼 리가 없었다. 상당히 골치 아팠다.

- 기억이 그러면 언제쯤 돌아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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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어야 한 달 정도요. 평생 가시는 분도 계시긴 하지만, 그건 굉장히 드문 케이스입니다.
- ...예?
- 괜찮습니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가벼운 후유증이고, 그 외에는 검진 결과 이상이 없으니 외상이 어느 정도 나으면 퇴원도 가능하십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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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걱정 안하셔도 돼요. 옆에 가족이나 연인이 있으면 하루만에 찾기도 하니까요.

의사도 알고 있을 정도로 그들은 유명한 연인이었다. 애초에 모른다고 하더라도 며칠을 내내 재현을 보러 왔으니 알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매니저도 건우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며 안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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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들은 건우만 좀 심각해질 뿐이었다. 다들 제 연인이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 상심이 큰 거라며 걱정했다.

- 그러니까 제가 배우라고요...
- 어, 어. 그, 내가 네 매니저고, 여기는...
- 여기 나온 것처럼 제 연인이겠네요.
- 맞아, 혹시 기억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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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혀요. 하지만 이렇게 증거가 많으니 믿을 수밖에 없겠네요.

재현은 매니저에게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그는 허황된 이야기를 절대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설명과 함께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많은 것이 필요했다. 다행히 그는 유명 배우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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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어에 신재현만 쳐도 많은 정보가 뜰 정도였다. 사고가 났다는 기사부터 시작해서, 포털사이트에 기록된 제 필모그라피까지 보니 납득한 모양이었다. 여기까지는 다행이었다.

- 저희 3년 째 연애 중이에요?
- 맞아!
- 아니, 저는 여기 류건우 씨한테 물었어요.
- ...거기 나와있는대로.
- 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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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류건우를 검색하여 나온 기사 사진과 제 앞에 있는 실제 건우를 번갈아 보는 재현이었다. 그러더니 퍽 웃음을 터뜨렸다.

- 재주가 상당히 좋았나봐요. 이런 사람과 연인인 걸 보면.

건우가 잠시 움찔했다. 매니저가 옆에서 또 질문했다.

- 기억이 나는 건 정말 없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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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도요. 그래서 신기할 정도네요. 대체 어떻게 연기를 하고, 어떻게 성공했는지.
- 그야 너는 재능이 있으니까...

어째 재현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보다 더 초조해보이는 건우였다. 입술이 바싹 마르는 듯 침을 발랐다. 망설임 끝에 매니저를 툭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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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잠시만 신재현이랑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자리 좀 비켜주실 수 있나요?
- 네? 아, 그럼요.
-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천천히 돌아오세요.
- 그러면 저 잠시 회사 좀 다녀올 테니까 재현이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 네, 저한테 맡기세요.
- 감사합니다, 금방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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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가 자리를 비우고 건우는 병실 문 앞에서 그가 완전히 사라졌는지 확인까지 했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제야 한숨을 푹 쉬었다. 저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재현에게 다가갔다.

- 왜요? 사랑한다고 하려고요?
- 아니, 그런 거 아니고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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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뭇거리던 건우가 누가 들을 새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미안한데 우리 쇼윈도야.
- 네?
- ...너랑 나랑 진짜로 사귀는 거 아니라고.

그렇다. 이 둘은 단순히 스캔들을 이용하여 인지도를 쌓고, 이미지 메이킹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짜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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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은 재현에게 안타까운 이야기였지만, 이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괜히 무슨 말을 내뱉을지 몰랐으니 말을 맞춰두려면 사실을 밝혀야 했다.

- 아는 사람은 극소수야. 방금 나간 네 매니저님도 이 사실을 모르고 소속사 대표님들만 알고 있는 수준이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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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기억 잃은 너랑도 말은 맞춰둬야 할 것 같아서 밝히는 건데,
- ...
- 우선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언론에 보도되면 안 될 것 같으니까 말을...

복잡한 상황에 한숨을 섞어가며 바닥만 보며 말하다 고개를 들어 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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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재현의 반응이 이상했다. 호기심이 가득해보이고, 재밌는 무언가라도 발견한 듯 눈이 반짝였다. 왜?

- 할 말 있어?

건우가 물었다.

- 어쨌든 사귀는 사이는 맞다는 거네요?

재현이 답했다. 건우가 인상을 팍 썼다.

- 아니지, 실제로는 사귄 적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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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사람 모두가 우리가 연인이라고 생각한다면서요?
- 그렇게 생각하도록 연기한 거지.
- 어쨌든요, 연인이라고 보였으면 그게 연인인 거지.

평소에 말을 참 똑부러지게 하는 것 같았는데 어째 헛소리만 잔뜩 하는 것 같았다. 건우의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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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연인다운 데이트 한 번도 안 했어. 그냥 사진 찍히기 위해서 밖에서 밥 한번 먹고 헤어지고, 가끔 응원 차 서로 촬영장에 찾아간 게 전부야. 그건 동료끼리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 그러면 해요, 데이트.
- 뭐?

황당한 소리에 건우가 제 귀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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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살의 신재현은 상당히 멍청했네요. 이런 사람을 두고 진짜 연애할 생각을 안 했다니.
- ...너 진짜 무슨 소리하는 거야?
- 그러니까 내가 기억을 잃었으니 말을 맞춰달라는 건데 뭐 그럴 필요가 없네요.
- ...
- 나랑은 실제로 사귀면 되니까.
- 진짜 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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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기억 상실 뿐만 아니라 뇌가 어디 또 하나 망가진 게 분명했다. 저가 알고 있는 신재현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로지 서로의 일을 위해 이익만을 따지며 이루어진 관계였다. 그런데 실제로 사귀자니, 진짜 미친 소리였다.

- 미친 건 28살의 신재현이고.
​- 너 내가 마음에 들기라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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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 ...
- 그러면 안 되나?

너무 당당하니까 할 말도 없었다. 기억 하나 잃었다고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나? 가짜 관계에서도 재현은 인터뷰에서나 제게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했지. 사적인 자리에서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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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우 형이라고 부를게요. 인터넷에 보니까 28살의 나보다도 나이가 많으니까.
- ...
- 나는 형이랑 연애해보고 싶은데요?

이게 20살의 패기인가. 아니, 그냥 앞서 말했듯 진짜 신재현이 미쳐버린 거겠지. 답지 않게 건우의 손을 꼭 잡고 제 뺨에 대고 쓰다듬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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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손 꼭 잡고 영화도 보고, 한가롭게 도로를 달리면서 드라이브도 해보고, 시간 내서 여행도 가는 그런 연인 사이 하고 싶다고요.
- 미안한데 너 그런 거 3년 내내 나랑 하나도 안 했다고.
- 그 인간이랑 나는 다르지.
- 아니, 그럼 몸이 똑같은데 뭘 다른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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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과 선까지 그었다. 이거 완전 애새끼 다 됐잖아.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이건 거의 다시 태어난 수준인 거 아니야?

- 어쨌든 우리가 헤어지면 안 되는 상황은 맞잖아요?
- ...
- 그러면 나도 형한테 맞춰 줄게요. 그러니까 형도 나한테 맞춰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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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사귀자고?
- 네.

대체 이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하루만에 기억이 돌아온다던데 지금 다시 눕히고 재우면 눈 떴을 때 정신 차리지 않을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어림도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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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의 신재현, 20살의 신재현...

- 야.
- 네?
- 너 따지고 보면 나보다 10살 어리잖아. 내가 미쳤다고 널 만나?
- 10살 연하. 좋네요.
​- 야, 이 미친 새끼야.

대체 쟤랑 어떻게 연애를 하라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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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신재현이 사실 이런 성격이었나? 연예인이라서 그동안 어떻게든 감추고 있던 걸까? 3년을 가짜 연인 행세 했어도 뭐,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 일단 너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아직 어지러울 거니까, 얌전히 있어.
- 난 얌전히 있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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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을 좀 얌전히 있으라고, 입을.
- 말은 해야죠. 형이 말했잖아요, 말 좀 맞추자고.
- 그러면 사실 입을 맞추자는 거였나?
​- 야, 이 ㅆ...

상대는 환자다. 진정하자. 순간 욱해서 욕이 잔뜩 튀어나갈 뻔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헤어지자고 연을 끊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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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결별 기사라도 난다고 생각해봐라, 그대로 이미지 나락이다. 사고 당한 애인을 버린 천하 제일의 못된 놈이 될 게 뻔했다.

- 우리 가짜야. 나 확실하게 말했어.
- 그래요, 28살의 신재현이랑은 가짜 연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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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걔라고!!!
- 나 20살인데.

말하는 꼬라지를 보면 저건 20살도 아니다. 10살이다. 완구점에서 장난감 하나 사달라고 떼 쓰는 어린아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 어, 그래. 내가 대학교 들어갔을 때 너는 수학익힘책 풀었다. 미쳤다고 널 만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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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지금은 성인인데.
- 30살이 20살을 왜 만나는데?
- 그런 말이 있대요. 그렇게 되면 개꿀이라고.
- 그런 개소리는 대체 어디서 주워들었어?
- 인터넷에서.

제발 류건우, 머리를 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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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현이 처음에 가짜 연애 제안했을 때 나한테 뭐라고 했었더라. 분명 서로의 이익만 추구하자고 했잖아. 사적인 감정 다 버리자고 했잖아. 그런데 저 애새끼는 대체 뭐냐고.

- 끝까지 듣기나 해.
- 일단 말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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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고, 20살의 너가 내 취향인 건 내 알 바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 진짜 연인 사이 아니야. 그러니까 갑자기 당장 나 좋다는 네 말 믿을 수도 없고, 받아줄 상황도 아니야. 그런 기사까지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너 쓰러진 이후로 맨날 촬영 끝나고 밤늦게 찾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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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동이에요.
- ...리액션 하지 마, 들어.
- 흠.
- 너 사랑해서? 절대 아니야. 그게 조건이었어.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연인처럼 대중에게 보이는 거. 나 그래서 피곤한 거 무릅쓰고 너 깨어날 때까지 매니저님만큼이나 옆을 지켰어. 지금도 1시간 뒤면 당장 다시 촬영장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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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갔다가 다시 올 거예요?

옆에 뭐라도 있었으면 저놈이 환자인 걸 다 떠나서 집어던질 뻔했다. 이걸 병실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해?

- 너 듣고 싶은대로 듣지 마.
- 절 사랑해서 깨어날 때까지 옆을 지켰다는 소리는 잘 들었어요.
- 너 혹시 다친 쪽이 다리가 아니라 청각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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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귀 멀쩡해요. 저랑 사귄다고 하는 것만 기다리고 있어요.
- 그래, 맞다. 넌 머리가 망가졌지.
- 말이 심해요.
- 네가 더 심해.

말이 안 통한다. 어떻게든 상황을 납득시켜서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만 적당히 말을 맞추려고 했는데 이건 차라리 유치원생이랑 대화를 나누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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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를 좋아하지 말자고 제안한 건 네 쪽이었어. 그래서 난 지금까지 그걸 아주 잘 지켰고, 현재도 널 좋아하지 않아. 어쨌든 정이라는 건 있으니까 상황 설명은 친절하게 해줬다고 생각해. 이제 헛소리는 그만하고, 나머지는 네 매니저님한테 들어.
54
건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사귀고 싶으면 너 혼자 사귀어, 어차피 세상은 너랑 나랑 사귀는 줄 아니까. 대신 난 너한테 사랑 절대 못 줘.
- 정이 있다면서요.
- 어느 정도 접점만 생긴다면 누구에게나 정은 있어.
- ...
- 네 입으로 20살이라며, 나 애새끼랑 사랑할 생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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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새끼가 드디어 이해했나? 그러더니 잠시 가까이 와달라며 손짓한다. 건우가 다가가니까 자세를 낮추라고 하였다. 상체를 살짝 숙였다. 가까워진 건우에게 재현이 귓속말햇다.

- 애정이랑 정은 딱 한 글자 차이예요.
- 뭐?
- 애 하나만 생기면 정도 애정이 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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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지금 그게 무슨

고작 말장난하기 위해 사람을 오라고 시켰냐며 건우가 짜증내자 갑자기 확 팔을 낚아채고 제쪽으로 훅 잡아당겼다. 건우가 순간적인 힘에 끌려가자 재현이 그대로 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 형이 나한테 그랬는데? 애새끼라고.
​- ...
- 애 하나 생겼으니까 애정이네요,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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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진짜 원래 이런 성격이야? 건우가 질색하며 방금 맞닿은 제 뺨을 마구 문질렀다.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타이밍이 좋았다. 건우가 확인했다. 곧 도착한다면서 1층에서 만나자는 매니저였다.

- 나 가야 해. 필요한 거 있으면 간호사분 불러. 어차피 네 매니저님 금방 돌아오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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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갔다가 올 거예요?
- 네 사지 멀쩡한 거 두눈으로 목격했는데 내가 왜? 알아서 해.
- 다리 부러졌는데.
- 20살이면 뼈 붙는 속도도 빠르대. 참아.

건우는 더 이상 재현을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대화하면 제 머리만 아파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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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본인도 저들이 관계를 인지했으니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붙잡고 이해시켜봤자 멋대로 해석하니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제 스케줄도 있어서 수십 번 말할 시간도 없었다.

- 재현씨는 좀 어때?

촬영장에 가기 위해 차에 탔다. 매니저가 재현의 상태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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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욕부터 나올 것을 겨우 참았다. 매니저에게도  최대한 다정한 연인인 척해야 하니 이건 좀 곤욕이었다. 글쎄, 저놈이 애새끼가 되어버렸다. 라고 어디다 털어놓을 수가 없다니.

- 다행히 크게 이상은 없대요.
-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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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뭐... 다리 뼈가 부러져서 한동안 입원해야 하는 게 문제지만, 그 외에는 생각보다 수준이 가벼워서 금방 아물 거래요.
- 너도 잠도 못 자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이제 한시름 덜어도 되겠다.
- 그렇죠.

는 무슨, 이제부터가 제일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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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건우는 그동안 펑크났던 분량을 채우느라 촬영장에서 밤을 새우기 바빴고, 정말 재현을 보러 가기 싫은 게 아니라 이건 못 가는 수준이었다. 재현의 소속사에서는 그가 의식을 찾았고 몸이 나으면 금방 복귀할 수 있는 수준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기사까지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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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동안 집에서 잔 게 과연 며칠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느 정도 촬영에도 여유가 생기고, 슬슬 다시 재현에게 찾아갈 때가 되긴 했다. 그때 소속사에서 말했다.

- ...뭔 촬영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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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재현 개인 유튜브 컨텐츠. 어차피 지금 다쳐서 예능이고 드라마고 영화고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어차피 건우 너도 지금 스케줄 조정돼서 하겠다고 이미 말했는데?

이건 x발 뭔 소리예요. 어차피 대표는 이미 둘의 관계를 알고 있으니 건우가 하기 싫다는 티를 바로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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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 누가 병수발 드는 컨텐츠를 찍어요?
- 그러니까 신선하잖아. 얼마나 사랑스러운 연인으로 보여. 신재현 근황 알리는 것만큼 그것처럼 만만한 게 없지.
- 그놈 멀쩡하던데요.
- 멀쩡하니까 찍는 거지.
- 아니, 하...
- 요즘 다 유튜브로 넘어가는 추세잖아.
-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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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참에 구독자 겸 팬층도 늘리는 목적인가보지.

이걸 진짜 이 세상의 인터넷 선을 모조리 끊어버릴 수도 없고. 어쨌든 이걸 안 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쪽에서 하겠다고 했으니 아마 저쪽 매니저도 알고 있을 거고, 하여튼 회사 사람들이 어지간하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67
진작 사고가 나기 전에 이 관계를 끊던가, 아니면 가짜 연애고 뭐고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나. 대체 기억이 언제 돌아올 줄 알고 밑도 끝도 없이 기다려야 하냐고.

- 카메라 끄면 안 돼요?
- 그냥 네가 꺼지면 안 되냐?

망할 놈의 애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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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콘텐츠 팀한테 카메라를 받고 세팅 좀 하고 있는데 벌써부터 재현이 건우의 신경을 건드렸다. 현재 매니저나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러움을 위해 자리를 다 비켜준 상황이다. 차라리 옆에 매니저라도 있었어야 했는데.

​- 이제 카메라 켤 거야. 입 단속 잘해.
- 배우가 그런 것 하나 못하겠어요?
69
- 그 배우였다는 신재현은 사라지고 애새끼만 남았으니까 하는 말이다.
- 진짜 너무하네요.
- 야.
- 네?
- 입 다물어. 진짜 켠다.

건우는 카메라를 들지 않은 다른 손을 카메라 앞쪽으로 뻗어서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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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류건우입니다. 우선 병원이라 작게 말할 수밖에 없으니 목소리가 작아도 양해 부탁드려요.
- 카메라 돌아가요?
- 응. 인사해.

건우가 바로 초점을 재현에게 맞춰주었다.

-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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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여러분. 저는 지금 신재현 씨와 같이 있습니다. 최근에 소식 들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래도 현재 많이 좋아진 상태입니다. 그래도 움직이는 데에는 무리가 있어요. 산책하려면 차라리 휠체어를 쓰라고 하네요. 어쨌든 불편한 점이 많을 테니 이렇게 스케쥴 비는 날에 병문안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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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브이로그에는 대본도 없이 자유롭게 찍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연기하듯이 대사를 술술 읊는 건우를 보며 재현은 속으로 좀 감탄한다. 방금까지 제게 꺼지라고 했던 그 사람이 정말 맞는 건지.

- 지금은 점심이라 마침 밥 먹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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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비워진 재현의 식판도 한 번 잡아주었다.

- 아무래도 병원 밥이라 맛있을 것 같진 않네요. 지금은 건강 챙기는 게 가장 최우선이니까.
- 괜찮아요. 생각보다 맛있어요.
- 그렇다면 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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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자세히 보여줄 수는 없고, 병실에 한정해서 적당히 보여주는 건우였다. 아무래도 아직 퇴원까지는 제법 남았고, 지금도 지낸지 꽤 됐으니 사람 사는 침실처럼 물건이 좀 놓여 있었다.

​- 형은 밥 안 먹어요?
- 나는 먹고 온 거야. 너 먹는 거 지켜보려고.
- 뭐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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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길에 간단하게 김밥.

건우는 밥을 먹는 재현을 찍어주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 그거로 돼요?
- 애초에 지금 작품 중이라 너무 먹으면 체중 관리 힘들어.
- 그러다 쓰러지면 어떻게 해요.
- 밥을 안 챙겨 먹는다는 소리가 아니잖아. 적당히 조절해서 먹는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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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슨 말을 하나 고민한다. 브이로그는 무조건 자연스러워 보여야 하는데 이놈이랑 사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대화를 안 하니 그게 좀 어려웠다. 차라리 적당히 행사에 함께 참여하면서 기자들한테 찍히는 게 나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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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현아.

이름을 불렀다. 밥을 먹다 말고 재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건우를 바라본다.

- 형, 제 이름도 부를 줄 알아요?

NG.

- 아니, 그러면 쇼윈도라고 해도 명색이 커플인데 이름 하나 안 부르냐?

건우는 바로 카메라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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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하나 불린 게 뭐 어쨌다고. 숟가락도 내려놓고 재현이 웃으며 건우에게 말했다.

- 재현아, 라고 한 번 더 해주면 안 돼요?
- 되겠냐?
- 아까는 잘했으면서.
- 미안한데 남들이 보는데 연인을 야, 너, 신재현 이라고 부를 수가 없으니까 카메라 앞에서만 그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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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불렀는데 일상 생활에서 못 불러요?
- 응, 안 돼.

다정하게 대화한 적도 없고, 전화 통화도 거의 받았다 하면 먼저 건 쪽에서 예능 촬영에 나가서 전화 연결한 것이었다. 애초에 정을 딱히 주질 않았는데 연기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일상에서 어떻게 편하게 이름을 부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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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요즘은 재현한테 애새끼니, 뭐니, 하면서 하도 욕을 했으니 더 이름이 붙을 리가 없었다.

- 나는 형이라고 잘 하잖아요.
- 네가 그럼 나한테 형이라고 하지, 뭐라고 불러?
- 건우야?
- 진짜 제정신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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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는 카메라 앞에서 빼고 다정하게 못 불러줘. 알아서 이해해. 건우는 그렇게 통보하고 다시 카메라를 켰다. 괜히 아까 저 이름도 부를 줄 아냐는 헛소리가 담긴 파일이 다른 쪽으로 잘못 넘어가면 큰일이니 아예 삭제하고 새로 다시 녹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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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랑 별 다를 거 없이 이야기하고 다시 재현을 불렀다.

- 재현아.
- 네?
- 밥 먹고 산책 좀 하러 갈래?
- 저 아직 잘 못 움직이는데 괜찮겠어요?
- 휠체어 있으니까 바람 좀 쐬자는 거지. 그거 하나 밀어주는 게 뭐 어렵다고.
- 형이 괜찮다면 저는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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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참으로 차분하고 잔잔했다. 둘 다 언성을 높이는 타입도 아니고, 목소리가 하이톤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건우가 이 상황 자체를 연기라고 생각해서 재현에게 화를 내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 밥 다 먹고 약은 언제 먹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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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분 뒤에 먹으라고 했어요. 검진은 오전에 받아서 괜찮고요.

그렇구나. 자연스럽게 깔끔하게 비워진 식판을 건우가 찍었다.

- 그새 밥을 다 먹었네요.
- 밥 먹는 게 오래 걸리진 않죠.
- 물 갖다줄까? 이거 들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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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재현에게 맡기고 건우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너무 찬물은 좀 그렇다며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셀프 캠을 찍어보라는 느낌으로 카메라를 주었지만, 재현은 건우를 찍었다. 물을 끓이면서 과일이라도 줄까 싶어 냉장고를 뒤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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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나 한 번 봐줘요.
- 뭐?
- 그냥 너무 뒤통수만 나와서요.
- 냉장고를 열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조금만 기다려. 사과 깎아줄까?
- 좋아요.

그렇게 미지근한 물도 마시고, 예쁘게 깎아준 과일도 먹고, 어느 정도 대화하다가 약도 먹은 후, 휠체어를 끌고 산책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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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동안에 간호사들이 자꾸 아는 척하는데 거기서도 웃으면서 이미지 관리가 필수였다. 병원 바로 앞으로 나와 산책하는 다른 환자들이 찍히지 않게 재현에게 카메라를 잘 들라고 하였다.

- 셀프캠으로 찍을까요?
-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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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한 번 같이 나와줘요. 명색이 커플 브이로그 아니에요?
- 이것도 커플 브이로그라고 해야 하나. 사실 병문안 브이로그 느낌 아니야?
- 우리가 커플이니까 커플 브이로그죠.
- 그것도 맞긴 하겠네.

건우는 살짝 허리를 숙여서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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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만 켜지면 이렇게 잘해주는 사람이라니. 재현이 고개를 돌려 대뜸 물었다.

- 뽀뽀해도 돼요?
-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되겠어?
- 그러면?
- 나중에.

심지어 이런 것까지 받아줬다. 뽀뽀는 무슨, 개소리하지 말라고 바로 정색했을 사람이 적당히 웃으면서 티 안 나게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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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작품 중이고, 잘 나가는 배우인 건 알았지만, 연기를 너무 잘하는데?

- 형, 미안해요. 쳐다보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데 그냥 들어갈까요?
-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러니까 좀 궁금해졌다.

- 건물 들어가니까 카메라 좀 다시 끌게요.
- 응.

이 사람이 진짜 나를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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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이로그가 고작 한 편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연달아 두 세편 정도 찍고, 건우가 그 사이 며칠동안 촬영 스케쥴로 인하여 바쁜 탓에 재현을 보러가지 못했다. 어쨌든 저로 인해 스케쥴이 미뤄진 것도 있기에 밤샘이라고 해도 절대 피곤한 티를 내지 않고 오히려 분위기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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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우 씨! 커피 차 왔어!
- 커피 차요?
- 어! 재현 씨가 보냈다는데? 몰랐어?
- 아, 네.
- 서프라이즈였네. 진짜 사이 너무 좋다, 부러워~

오늘도 어김없이 밤샘 촬영이 이어져 해가 뜨고 지고 상관없이 지치던 중 오후에 커피 차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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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고 힘내라면서 건우 형 잘 부탁한다는 문구와 함께 현수막이 걸리고 배너도 세워져 있었다. 벌써 커피를 받아 마시는 스탭들이 있었고, 건우는 감독과 함께 아메리카노를 한 잔 받았다.

- 재현 씨 몸은 좀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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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많이 나아졌어요, 잘 쉬고 있으니 금방 방송에도 나올 수 있겠죠.
- 어디 크게 이상 없다면 다행이네.

머리에 큰 이상이 있죠. 물론 건우는 그 말을 절대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커피 차 덕분에 다들 쉬는 시간을 가지며 가볍게 리프레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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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핸드폰을 꼭 만지게 되는데 잠시 연락이라도 확인하던 매니저가 건우에게 말했다.

- 건우야, 브이로그 올라갔다.
- 그거 오늘 올라가는 거였어요?
​- 어. 까먹었어?
- 아, 날짜 보니까 맞네요. 제가 촬영하느라 날짜 개념을 잠시 상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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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시간 나면 봐봐.
- 촬영 끝나고 한 번 봐야겠네요.
- 반응이라도 잠깐 구경할래? 핸드폰 줄까?
- 아, 감사합니다.

건우는 바로 재현의 유튜브를 찾아서 브이로그를 확인했다.

[SUB] 근황 알리기, 병실 브이로그 1탄 (feat. 류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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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커플 브이로그라고 진짜 올라가나 걱정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네. 영상은 어차피 지금 촬영장에서 볼 게 아니고 댓글창부터 확인했다.

ㄴ 미쳤다 이건 그냥 커플 브이로그잖냐
ㄴ 07:31 꿀 떨어져요 미치겠어
ㄴ 재현아 무사해서 다행이다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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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푹 쉬어도 되는데 브이로그까지 찍어주는 우리 신 배우님... 류 배우님도 감사합니다 사랑해요ㅠ
ㄴ 너무 잘 어울려요 그리고 신재현 배우님 얼른 나으세요

올린 지 한시간 됐는데 벌써 반응 핫하네. 심지어 외국인 댓글까지 아주 다양했다. 뭐, 어쨌든 이런 반응을 노린거니 좋은 거 아니겠어.
99
건우는 생각 난 김에 재현에게 전화를 건다.

- 여보세요?
[형?]
- 어, 커피 차 보낸 거 확인했어. 말을 하지.
[원래 그런 건 서프라이즈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 그래, 고마워.

재현에게 전화 걸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옆에 있던 감독이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건우를 바라보았다.
100
아, 그냥 적당히 끊으려고 했는데 이건 어쩔 수가 없네.

- 재현아.
[옆에 누구 있나 보네요?]

이 새끼는 꼭 말을 해도.

- 브이로그 올라간 거 확인했어. 영상은 아직 못 봤는데 사람들이 좋아해줘서 다행이더라. 너도 몸 잘 챙기고 촬영 끝나면 또 보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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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설마 재현의 목소리가 들릴까봐 통화 볼륨을 최대한 낮췄다. 연인이 보낸 커피 차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며 고맙다고 사근사근 전화하는 모습을 보니 이건 누가 봐도 연인이라면서 감독이 부럽다고 옆에서 말했다.

[진짜 옆에 누가 있었네.]
- 알았어, 촬영 끝나고 또 연락할게.
102
뭐라고 말하든 간에 건우는 제 할 말만 하고 끊어버렸다. 꼴을 보아하니 여전히 기억 돌아오기에는 멀었네.

-

브이로그가 벌써 3편 째 올라가고, 기사나 sns 실시간 트렌드에 오를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103
현재 사고를 크게 당하여 뉴스 기사나 건우의 인터뷰 외에는 소식을 도통 들을 수가 없으니 이런 개인 브이로그가 팬들에게는 참 단비같은 콘텐츠였다. 벌써 1편 조회수는 100만 뷰를 돌파했다.

- 조회 수가 더 올랐으면 좋겠어요.
- 왜.
- 그러면 형이 계속 날 보러 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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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차피 헤어졌다고 기사 내는 게 아니면 우리 계속 만나야 해.
- 평생 만나겠네요.
- 또 헛소리하네. 약이나 챙겨 먹어.

잠시 카메라를 꺼두고 평소처럼 대화하는 둘이었다. 약과 함께 넘기라며 물도 건네주었다. 다시 돌려받은 컵을 가볍게 씻으면서 건우가 대뜸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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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그런데 슬슬 질릴 때 되지 않았어?
- 왜요?
- 나 안 좋아하는 거 깨달을 때 되지 않았냐고.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지금 보니까 헛소리는 내가 아니라 형이 하네요.
- 뭐, 이 새끼야?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해. 건우가 바로 짜증을 냈다.
106
후식으로 과일이나 먹으라며 바나나를 하나 툭 던져주었다. 재현이 가볍게 받아내고 껍질을 까며 말했다.

- 알면 알수록 좋은 사람인데 내가 싫어할 이유가 있나요?
- 난 너한테 좋은 소리 단 한 번도 안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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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는 커피포트에 남은 물로 커피를 탔다. 그새 살짝 물이 식었지만 커피 믹스가 녹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온도가 딱 맞아서 바로 마시기 좋았다.

- 가끔 제 이름을 불러주는 그 목소리가 너무 다정했다고 치죠, 뭐.
- 연기한 거야.
​- 연기면 뭐 어때서요.
- 아.
108
그리고 마시다가 커피가 살짝 흘러서 턱을 타고 뚝 한 방울 떨어졌다. 급하게 건우가 닦아냈다. 살짝 뜨겁긴 했지만, 괜찮았다. 재현이 바로 옆에 있던 티슈를 몇 장 뽑아 건우에게 건넸다.

- 괜찮아요? 안 데었어요?
- 어, 안 뜨거워. 고맙다.
109
건우는 티셔츠에 커피 자국이 남은 걸 보고 인상을 퍽 찌푸렸다. 재현이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왜 부르냐고 하면서도 건우는 다가갔다. 재현이 이번엔 물티슈를 뜯어서 건우의 셔츠를 살짝 잡아당기고 문질렀다.

- 이런 거 보면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죠.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110
- 형은 좋은 사람이라는 거죠.
- 뭐?
- 바로 닦았는데도 잘 안 지워지네요. 세탁 꼭 맡겨요.

힘주어 문지른 탓에 살짝 축축하면서도 그 부분만 잔뜩 구겨졌다. 건우가 찰싹 때리듯이 여러번 셔츠를 탁탁 쳐냈다.
111
그 와중에 쓰레기는 버리기 불편할 거라며 자연스럽게 재현의 손에 든 쓰레기를 가져가 대신 버려주었다.

- 나 좋은 사람 아니야. 너 잘못 보고 있어.
- 대체 어딜 봐서?
- 뭐?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을 어떻게 나쁘게 생각하라는 건지 모르겠네.
112
-

병실에서 지낸지도 벌써 한달이 넘었다. 걷는 것도 천천히 적응하여 이제 목발로 잘 걸어다니기도 했다. 물론 무리가 갈 만큼 멀리까지 움직이진 못했다. 오늘도 산책을 직접 나가보겠다는 재현을 건우가 카메라에 담아내며 물었다.
113
- 솔직히 목발 짚는 것보다 쉬는 게 더 낫지 않아?
- 너무 안 걸으면 몸이 근질거려요.
- 그거 잘못하면 겨드랑이 너무 아프다는데.
- 음, 뭐 참을만 해요. 나중에 못 걷는 것보다 훨씬 낫죠.
- 손 잡아줄까?

건우가 손을 내밀었다.
114
평소에는 잡아달라고 해도 오히려 쳐내는 사람이 이렇게 다가온다니. 평생 카메라를 켜둘 수도 없고. 물론 재현은 주어진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바로 손을 잡았다.

- 그냥 나가지 말고 이러고 있을까요?
- 산책 가신다면서요.
- 농담이에요. 좋아서 그런 거죠.
115
생각해보니 신발을 신어야했다. 재현이 다리를 쭉 뻗자 건우가 손을 놓고 재현에게 카메라를 넘겼다. 그리고는 바로 몸을 크게 숙여 신발을 신겨주었다. 정수리를 내보이는 건우를 찍으며 재현이 대뜸 말했다.

- 사랑해요.

건우가 잠시 멈칫했다.
116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더니 입꼬리를 싸악 올리면서 웃어보였다.

- 응, 나도 사랑해.

허. 재현이 오히려 말을 잃었다. 고작 연기인데 저렇게 진짜 사랑스럽게 웃을 일인가. 너무 노련하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사실 정말 본인을 꼬시려고 한 건 아닌지.
117
-

재현은 퇴원했다. 이제 병원에서는 주마다 직접 찾아오라고 하였고, 목발을 짚고 움직여도 무리가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여전히 방송에 나오는 건 무리였다. 대신 이참에 휴식기를 가진 그에게 복귀작으로 대본을 마구 들이미는 제작사들이 있었다.
118
회사까지 가서 대본을 확인할 수도 없으니 매니저를 통해 집에서 여러 개 두고 비교하는 재현이었다.

- 그래서 이걸 내가 왜 골라줘야 하는데?
- 아무래도 내가 연기하는 게 처음이니까?
- 진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자아 분리 좀 그만하라고 했지.
119
건우가 재현의 집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브이로그 조회수가 미쳐 날뛰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유명 연예인이라고 하지만, 요즘 유튜브는 레드 오션 중 레드 오션인데 이런 조회수가 어떻게 쉽게 나오지. 평균 200~300만뷰. 100만뷰가 오히려 적다고 느껴지는 건 또 처음이었다.
120
대략 6편 정도 브이로그가 모두 반응이 뜨거운 상황에 퇴원했다고 관둘 수는 없었다. 어차피 연인이니까 상관없지 않냐며 냅다 붙여놨는데,

- 앉아 있어요.
- 금방 나갈 거야.

건우는 사실 재현의 집에 온 게 쇼윈도 커플 경력 3년만에 처음이다.
121
혼자 사는 연예인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도 제게 손님으로 방문하는 거 어떠냐고 권유한 적은 있었지만, 집은 엄연히 개인 공간이기에 아무리 커플이라고 해도 어쨌든 쇼윈도라서 그 정도 사생활은 지켜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걸 이 애새끼 때문에 오게 되네.
122
- 진짜 처음 와요?
- 그러면 내가 왜 굳이 거짓말을 하는데?
- 오기 싫어서?
- 너도 내가 얼마나 널 만나기 싫어하는지 알긴 하는구나.
- 그렇게 직접적으로 들으니까 제법 상처네요.

전혀 상처받은 것 같지 않은데 목소리 하나 불쌍한 척 톤을 바꾼다고 내가 속겠냐고.
123
그러더니 재현은 갑자기 잔뜩 나열한 대본을 한데 모아서 정리했다. 안 봐준다고 진짜 삐진 거야, 뭐야.

- 계획 바꿀래요.
- 무슨 계획.

재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다리도 불편한 새끼가 무슨 벌떡벌떡 일어나고 있어.
124
건우가 괜히 허튼 짓하지 말라며 얼른 앉으라고 했다. 하지만 재현은 꿋꿋이 일어나 절뚝거리며 옷방으로 들어갔다.

- 다리도 아픈 새끼가 뭘 자꾸 움직...!
- 데이트해요.
- 뭐?
- 형, 나랑 데이트해요.

얘가 진짜 미쳤나.
125
- 지금 그 꼴로 어딜 나간다고? 네가 아무리 애새끼가 되었다고 하지만 20살이 된 거지. 10살이 된 게 아니거든? 네 몸 하나 제대로 못 챙기면서 괜히 나갔다가 팬들이라도 붙어서 도망도 못 치고 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
- ...
126
- 기억이 없다고 하지만 결국 너는 배우야. 카메라에 계속 나와야 한다고. 다쳤다고 쉬는 것도 한두 달이지, 그 이후로는 네 팬들을 제외한 대중들은 너 다친 것도 잊어버린다고.

건우가 정말 어린애를 상대하듯 조곤조곤 타이르다가도 점점 쏘아붙였다.
127
분명 차분하게 잔소리하기 시작했는데 끝에는 결국 짜증이 가득 섞였다.

- 뭘 웃어? 내가 지금 장난치는 건줄 알아?

그 와중에 재현은 미소를 유지하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128
짜증을 내는 중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웃어 넘기려고 하니 건우는 더 화가 났다. 그런데 재현이 말했다.

- 아, 진짜 다리 다친 게 너무 슬프긴 하네요.
- 뭐?

그러더니 냅다 주저 앉았다.
129
그렇게 괜찮은 척하면서 집안을 멋대로 싸돌아다니려고 하니까 무리가 가지. 건우가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 이거 봐. 내가 너 이럴까봐...!
- 잡았다.
- 야, 이씨.
- 밀어낼 거예요? 나 다리 아픈데? 밀쳐내면 더 심해질 텐데.
- 무슨,
- 그런데 나는 형을 안 놔줄 건데.
130
일부러 주저 앉은 것이었다. 걱정하러 다가오는 건우를 확 낚아채서 앉아버렸다. 뿌리치지도 못하게 가불기를 써버리니 건우는 재현에게 안긴 채로 제 이마를 짚었다.

- 놔라, 인마.
- 그거 알아요?
- 뭘.
131
- 형 방금 내가 데이트하자고 하니까 그렇게 말을 많이 했는데.
- ...
- 거기서 데이트하기 싫다는 소리는 한 번도 안 했어요.

뭐라고? 건우가 잠시 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돌이켰다. 재현이 말한 것처럼 한두 마디를 뱉은 게 아니다보니 방금 뱉었다고 해도 정확하게 다 기억할 수는 없다.
132
하지만 정말 싫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거 또 착각하고 이상한 소리를 줄줄 뱉을 거라면서 건우가 다급하게 말을 덧붙이려 했다.

- 당연히 너랑 데이트하는 거 싫,

재현이 손가락으로 건우의 입술을 꾹 눌렀다. 덕분에 뒷말이 먹히고 말았다.
133
- 다행이다.
- ...
- 진짜 나 싫어하는 건 아니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점점 지그시 누르는 것이 사람을 간지럽게 했다. 그건 아마도 연기를 어떻게 하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놈이 대사 하나는 끝내주게 오글거리게 줄줄 뱉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34
-

드라마 촬영이 계속 되고 있었다. 이제 곧 1화가 방영될 예정이라면서 건우도 스케쥴이 잔뜩 잡혔다. 주연 배우로서 드라마 홍보를 위해 여기저기 불려나가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건우 혼자 출연하는 것도 아닌 프로그램에서 굳이 재현에 대한 질문을 하진 않았다.
135
그렇다고 재현이 잊혀지진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재현을 찾는 사람들도 꽤 됐다. 이제는 두 사람을 응원하는 커플 팬 계정이 생길 정도였다. 브이로그의 힘이었다.

- 마지막 편이요?
136
- 아무래도 그렇지. 딱 10편 정도면 깔끔하기도 하잖아. 어차피 드라마 방영되면 다른 스케쥴도 겹쳐서 더 만나기 힘들 텐데, 무리하지 말라고.

쇼윈도 커플이 참 고생도 많았다며 소속사 대표는 스케쥴 조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이제 브이로그는 더 이상 찍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137
물론 그게 맞긴 했다. 재현이야 어쩔 수 없이 집에만 있어야 하니 얼마든지 시간이 가능했어도 건우는 이제 가장 바쁠 시기였다.

- 재현 씨 몸 상태도 요즘 괜찮지 않아? 연락은 하지?
- 가끔 하죠.
138
기억 잃기 전에도 가끔은 했다. 어쨌든 서로 뭐하고 사는지는 알아야 입을 맞추는 게 편하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마지막이라니. 대표가 말할 정도면 합의를 본 상황일 텐데 이 애새끼가 나랑 붙어있을 구실을 그렇게 쉽게 놨다고? 하긴 내 앞에서나 애새끼지, 대표한테 떼를 쓰진 않았겠지.
139
그리고 그놈은 남의 일까지 망칠 만큼 멍청한 놈은 아니라서 원래처럼 이성적으로 행동했을 수도.

- 매니저 통해서 스케쥴 전달할 테니까 알아서 잘 조율해봐.
- 네.

회사에 잠깐 들르고 바로 집에 가는 게 또 아니었다. 잡지 인터뷰까지 겹쳐서 바로 또 이동해야 했다.
140
어차피 브이로그도 이제 7편이 올라갔고, 서둘러서 찍을 필요가 없었다. 시간 날 때 여유롭게 대화하여 조정해도 충분했다.

바로 도착하자마자 메이크업을 바로 받고 헤어도 세팅했다. 머리를 완전히 까서 스프레이로 고정시키고, 검은색 목폴라를 입어 한층 더 이미지가 차갑게 보였다.
141
오늘 사진이 참 잘 나온다며 시원시원하게 통과됐고, 그 이후로도 스타일링을 바꾸고 나서도 금방 촬영이 끝났다. 촬영장 한 가운데에 의자를 놓고 자리잡아 인터뷰했다.

- 다음 주 월요일에 드디어 첫 방송이죠? 어떤 내용인지 간단하게 소개해주시겠어요?
142
처음은 무난하게 드라마에 관련된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가 각자 개인적인 근황도 공유했다. 같이 촬영한 여배우는 최근에 유기견 한 마리를 입양했다면서 너무 귀엽다고 사진까지 보여주었다. 건우는 최근에 이렇다 할 무언가가 없어서 같은 질문에 뭐라 대답할까 고민하던 중, 먼저 던져주었다.
143
- 최근에 연인 분과 찍은 브이로그 영상이 화제라는데 재현 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여쭤봐도 되나요?

단순히 공중파 방송도 아니고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잡지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게 말이 안 되지.
144
- 저희는 언제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 저도 사실 브이로그를 몇 번 봤는데 두 분이 서로를 사랑하는 게 눈에 잘 보여서 제가 다 설레는 거 있죠. 연애하려면 두 분처럼 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예요.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145
서로를 사랑하는 게 눈에 보인다니. 진짜 연기라는 게 무섭긴 하구나. 물론 이 짓을 3년 넘게 해서 그렇게 보이는 게 당연할 텐데 그냥 새삼스러웠다.

- 오래 연애하는 이유는 역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겠죠?
146
- 그럼요.
​- 공개 연애라는 쉽지 않은 선택을 하시면서 대중들에게 사랑까지 받으시니 좋으시겠어요.
-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그저 좋게 봐주신 덕분입니다.
- 혹시 최근에 있었던 달달한 에피소드 같은 거 저한테만 몰래 말해주실 수 없나요?
- 달달한 에피소드요?
147
에피소드라,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긴 했지만, 또 막상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적당히 브이로그에서 보여주었던 사건이면 홍보도 되고 괜찮지 않을까 싶어 잠시 고민에 빠졌다.

- 말하기 곤란하시면 애정 담긴 말 같은 거 없나요? 애칭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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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칭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애정 담긴 말이라니. 사랑을 속삭인 적이 없는데 무슨, 아직까지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서 마주쳤다 하면 욕을 안 뱉은 적이 없는데... 그러다가 건우는 떠올렸다.

[다행이다.]
[...]
[진짜 나 싫어하는 건 아니네요.]
149
정말 갑자기 불현듯 제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니, 이게 이 타이밍에 갑자기 왜. 건우가 괜히 목이 건조한 척 헛기침했다. 그러다가 당황한 것을 들키지 않게 빙그레 웃었다.

- 뭐, 말이 중요한가요.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매일 새롭고 달달한 에피소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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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너무 좋은 말이네요. 재현 씨가 이 인터뷰를 보면 좋겠어요.
- 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터뷰도 끝나고 모든 일정이 다 종료되어, 건우는 피로가 확 몰려왔다. 내일도 아침부터 스케쥴이 있는데 얼른 집 가서 씻고 바로 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151
촬영장 정리가 다 끝나고 매니저와 함께 차로 돌아갔다. 바로 의자를 뒤로 확 눕혔다. 몸이 무거웠다. 매니저가 보관하고 있던 핸드폰을 건넸다.

- 집으로 바로 가는 거지?
- 네.

지친 탓에 정신이 조금 가물가물했다.
152
건우는 핸드폰을 켜서 그동안 온 연락을 확인했다. 일적으로 회사에서 연락이 오기도 하고, 드라마 팀에서 사소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개인적인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형]
[나 이제 정말 밖에서 돌아다닐 수준은 되는데]
[우리 진짜 영화 볼래요?]

신재현이었다.
153
-

- ...그게 퍽이나 돌아다닐 수준이다. 목발은 왜 안 들고 와?
- 너무 눈에 띄기도 하고, 진짜 밖에서 돌아다닐 수준이라고 했잖아요. 충분히 잘 걸어요.
- 한 쪽 발을 질질 끌고 있는데 대체 뭐가 잘 걷는 거야?
154
나름 티 안 나게 걷고 있지만 어쨌든 발에 붕대를 감고 있으니 운동화는 절대 신지도 못했고, 걷는 모양새가 자세히 보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 진짜 뚜벅뚜벅 걸으면 다치거든요.
- 그냥 집에 있으라고. 저번에도 집에서 잘만 영화봤잖아.
- 기분 내고 싶어요.
155
사람 없는 시간대에 영화관을 찾아 재현과 만났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모자에 마스크까지 꾹꾹 눌러 써서 얼굴을 최대한 가렸다.

- 그래, 니 마음대로 해라.
156
어차피 이게 브이로그 마지막 편이라고 생각하고 건우는 셀카봉을 길게 빼고 카메라 녹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재현이 막았다.

- 왜?
- 어차피 영화 보러 가면 꺼야 하는데 오늘은 그냥 켜지 말죠.
- 마지막이잖아.
157
그러니까 뭐든 많이 찍어둬야 마지막 편을 좀 더 화려하고 알차게 내용을 꾸밀 수 있지 않냐며  밖에서 데이트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이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것도 신선해서 유종의 미를 제대로 거둘 수 있지 않을까.

- 영화 봤다는 티라도 내면 돼.
158
- 그러면 이렇게 해요. 자, 손.
- 뭐?

재현은 진작 뽑아둔 영화 티켓을 건우에게 쥐여주었다. 잘 들고 있으라고 하더니 티켓 옆으로 제 손을 불쑥 끼어서 반쪽짜리 하트를 만들었다.
159
찰칵.

- 인증샷이면 충분히 티를 낸 거죠.
- 굳이?
- 뭐든 대본을 따라갈 필요는 없죠. 너무 딱딱하게 굴어서 좋을 거 없어요. 연기도 원래 그 안에서 자기만의 색을 입혀야 사람들이 내게 매료되는 거잖아요.
160
건우가 멈칫했다.

- 야, 너 혹시...
​- 음?
​- 아니야.

다 찍었으면 손 치우라며 건우가 재현을 툭툭 쳤다.

- 팝콘 먹을 거야?
- 안 먹는 편은 아니에요.
- 그러면 기다려. 사올 테니까.
161
괜히 또 다리 질질 끌고 움직이지 말고 앉아 있으라며 건우는 아예 재현의 어깨를 꾹 눌러 의자에 앉히고 서둘러 카운터로 갔다. 재현은 그런 건우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 저기 혹시...
- ...
- 신재현 님 아니세요?
162
누군가 다가와 속삭였다. 재현은 검지를 입가에 올리면서 싱긋 웃었다. 싸인해 줄 상황이 못 돼서 미안하다고 하였다. 다행히 팬은 이해한다며 물러났다. 한 번 상대해주고 재현은 다시 건우 쪽을 보았다. 이번엔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163
양손 가득 팝콘과 콜라를 든 건우가 돌아왔다. 재현이 맞춰서 일어났다. 하나 들어주려고 하자, 건우가 됐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 내 주머니에서 영화 표 좀 꺼내줘. 손이 없네.
- 어디 주머니요?
- 오른쪽.
164
그대로 손을 뻗어서 빼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재현은 건우의 뒤쪽으로 돌아가더니 자연스럽게 뒤에서 끌어안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 너 진짜...!
- 나 원래 기회 주면 잘 받아먹어요.
165
하마터면 쏟을 뻔했다고 건우가 잔소리하니 재현은 그저 영화표를 흔들면서 능청스럽게 받아칠 뿐이었다. 상영 시작 15분 전에 맞춰 장소를 이동하면서도 계속 건우가 불만이 섞인 말투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란히 걷던 재현이 슬쩍 고개를 앞으로 빼서 그를 살폈다.

- 건우 형.
- 왜 인마.
166
- ...나 좋아해요?
- 미쳤냐???

순간 언성을 높였다. 건우가 바로 고개를 숙이면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제발 헛소리 좀 줄이라고 성큼성큼 앞장 섰다. 얼핏 보이는 그의 귀가 발갛게 물들고 있었다.
167
영화는 적당히 재미있었다. 예매율 1위라고 하더니, 나름 이름값 하는 수준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천만 관객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런 한가로운 날에 시간 떼우는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168
어차피 푹신한 의자에 앉아있으니 재현을 딱히 신경 쓸 것도 없다면서 건우는 무의식적으로 계속 팝콘을 입에 한 알씩 넣으며 영화를 보다가 바닥을 마주하고 손톱으로 저도 모르게 몇 번 통을 긁었다.

툭툭.

재현이 건우를 건드리더니 돌아보자 손바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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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가 팝콘통을 기울여서 보여주었다. 없어. 영화관이라 소리내진 못하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재현이 고개를 저었다. 뭐, 어쩌라는 거야. 딱딱한 알갱이만 남았는데 이거라도 먹고 싶나. 건우는 팝콘통을 주었다. 재현은 통을 회수하면서 자연스럽게 들고 있던 건우의 손을 꽉 잡았다.
170
- ...뭐해?
- 그냥요.
- ...
- 좋아서?

그러더니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팝콘을 잔뜩 집어먹은 탓에 손가락 끝이 기름기로 번들거리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영화 상영 중에 절대 아까처럼 언성을 높일 순 없었다.
171
괜히 파닥거리며 손을 쳐내는 것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냥 잇새로 으름장을 놓을 뿐이었다.

- ...너 진짜 이러는 것도 마지막이야. 알지?

그래. 이제 이렇게까지 사석에서 자주 만날 일이 없다. 나도 더 바빠질 예정이고, 너도 거의 다 나아가니 네 스케쥴로 바빠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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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닌데.
- ...
- 난 마지막이라고 생각 안 하는데.

그러면서 재현은 툭 하고 고개를 옆으로 떨궈 건우의 어깨에 기댔다. 이걸 진짜 밀쳐낼 수도 없고... 건우는 한숨을 쉬며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재현은 가만히 소리에 집중했다. 쿵쿵거리는 게 기이하지만 기분 좋은 소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173
-

[류건우, 화려한 컴백! 드라마 첫방 시청률 14.1%]

요즘은 OTT 서비스가 상당히 발달하여 TV 시청률은 10%만 돌파해도 성공했다고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첫방송부터 10% 중반의 시청률이라니. 매우 좋은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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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만에 복귀한 드라마 작품이었는데 반응이 너무 좋다면서 드라마 팀에서도 환호했다. 여기서 노를 더 젓기 위해 홍보차 여기저기 예능에 출연했다. 오랜만인 탓에 러브콜도 쇄도했고, 회사 측에서도 직접 스케쥴을 잡기도 했다.
175
바빴다. 그러니까 정말 눈코뜰새가 없었다. 아직 모든 촬영이 끝난 것도 아니라 계속 드라마 촬영까지 병행하니 잠이 부족했다. 와중에 브이로그는 10편까지 올라갔다. 이제 재현의 상태도 많이 호전되어 얼른 나아서 좋은 모습으로 복귀하겠다고 유튜브 잠정 중단 선언을 내렸다. 팬들은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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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재현과 관계는 일정했다. 높낮이라는 것이 없었다. 관계에는 본래 감정이 담겨야 일렁이기 마련인데, 그와 절대 감정을 공유하지 않았다. 단순히 매니저를 통해 스케쥴을 받듯이 쇼윈도를 할 때 무엇이 필요한 지 듣고 그에 맞춰 연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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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동안 로맨스 드라마를 찍는 상대 여주인공과의 감정 교류가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최근 밀접했던 이 관계도 금방 잔잔해져서 예전과 별다를 게 없으리라고 여겼다. 어쨌든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으니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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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만 집중하면 나중에 일상을 되찾아도 그저 저가 알고 있던 일상일 것이다. 그런데 참 뭔가 이상했다.

- 건우야,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아?
- 아, 그냥 최근에 스케쥴 때문에 조금 무리했잖아요. 자면 괜찮아져요.

잠을 자도 어딘가 개운하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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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뭐 때문인지 수없이 고민했다. 드라마 시청률은 단순히 첫방송 버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점점 오르고 있었고, 저는 모든 방송사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최근 SNS에서 가장 언급이 많이 된 남자 배우로도 꼽혔다.

- 여차하면 응급실 가서 수액이라도 맞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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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거 버릇 들여서 좋은 거 아니라고 했잖아.
- 여차하면, 이죠. 저 지금 정말 괜찮아요.

그냥 머리가 많이 복잡했을 뿐이었다. 건우는 창문에 기대어 한숨을 푹 쉬었다. 그순간 핸드폰이 반짝였다.

[형 오늘 고생했어요]

이상하게 조금은 개운해진 것 같았다.
181
-

여전히 밀려드는 스케쥴, 한창 TV에서는 초반부가 방영 중이었지만, 건우는 드라마의 클라이막스 후반부를 촬영 중이었다. 덕분에 하루가 멀다하고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잡지 인터뷰에 최근에는 CF 모델 러브콜도 들어와 하루종일 카메라 앞에 섰다고 해도 무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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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겠어? 감기약도 당연히 있고, 구급차도 다 준비하긴 했어.
- 이런 촬영이 처음도 아니고 몸 관리도 못하면 그게 연예인이겠어요.

그와중에 오늘은 빗속 촬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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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을 뛰어다니면서 감정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극한의 상황에서 남자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다. 생각보다 쌀쌀한 날씨에 온몸이 젖을 정도로 비를 맞아야 했다.

- 장비 다 준비해주세요!
184
건우는 제 감정에 집중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감독의 큐 사인이 들어가자마자 눈빛을 바꾸고 쏟아지는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NG.
NG.
NG.

답지 않게 NG가 많이 나왔다. 심지어 중간에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했다.
185
급하게 지혈하면서 건우가 연신 죄송하다고 촬영장에서 몇 번이나 허리를 숙였다.  슬슬 몸이 으슬으슬했다. 열이 오르는 착각이 들었지만 설령 진짜 열이 오른다고 해도 빗속 촬영만큼 스탭들이 고생하는 게 없었기에 프로라면 이 정도 참는 것쯤이야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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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 매무새만 정리하고 씬 다시 바로 들어갈게요! 죄송합니다!

콧물이 흐르지 않게 휴지로 벅벅 닦아냈다. 어차피 비에 잔뜩 맞으면서 시작하니 크게 정리할 건 없었다. 무릎이 까진 탓에 피로 물든 바지만 갈아입었다. 적당히 하고 다시 카메라 안으로 뛰어들었다.

​- 액션!!!
187
뛰어다니면서 울부짖었다. 무릎이 욱씬거렸다. 덕분에 감정을 더 잘 뱉어낼 수 있었다. 제 눈물이 얼만큼 흐르는지 빗물이 섞여서 구분이 되진 않았지만 충분했다.

- 오케이! 수고하셨어요!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끝이 났다.
188
서둘러 매니저가 달려와 건우에게 담요를 둘러주었다. 확 포근해지니 제 몸이 이상하게 더 떨렸다. 이를 마구 부딪치면서 급하게 몸을 녹였다. 다행히 더 찍을 건 없다고 하였다. 얼른 몸 관리하라며 건우를 보냈다. 그렇게 오늘 촬영은 끝이 났다.
189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까지 말렸는데도 여전히 몸이 떨렸다. 초짜도 아니고 고작 비 몇 번 더 맞은 걸로 쓸데없이 몸뚱이가 부실하게 구는 건지.

​- 무릎은 좀 어때? 병원 갈래?
190
- 아뇨, 그냥 좀 까졌는데 피가 많이 났을 뿐이지 막 뼈나 근육이 잘못 됐다는 느낌은 없어요. 이 정도면 약 잘 바르고 감고 다니면 금방 나아요.
- 진짜 괜찮지? 촬영이 이게 끝도 아닌데 괜히 무릎이 잘못 되면...
- 그 정도 절대 아니라니까요.
191
과잉 보호할 필요 없다고 건우는 제 뺨을 몇 번 문질렀다. 어째 진짜 열이 오르는 것 같은데. 그래도 약도 중간에 챙겨먹었으니 쉬면 괜찮겠지.

- 꼭 쉬고, 머리 아프면 바로 약 먹고, 여차하면 나한테 연락해. 응급실까지 데려다 줄게. 알았지?
192
- 알았어요, 형도 오늘 저 때문에 고생했는데 얼른 들어가요.
- 진짜 연락해!!!
- 네.

그렇게 상태가 안 좋아 보이나. 고작 비 몇 번 맞았는데 무슨... 심지어 집 안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것을 겨우 말렸다. 다행히 내일은 스케쥴이 없었다. 푹 쉬면 됐다.
193
솔직히 NG도 안 내고 한 번에 끝냈으면 넘어질 일도 없었고 그냥 이렇게 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는데 왜 오늘따라 NG를 내서. 심지어 내는 방식도 다양했다. 넘어진 것 외에도 대사를 틀린다거나, 감정 조절에서 삐걱거리며 너무 앞서나가기도 했다.

- ...한심하기 짝이 없네.
194
이제 막 데뷔한 신인 배우도 안 이러겠어. 다른 건 그렇다치고 정신이 어떻게 되면 배우가 대사를 틀리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직까지 몸이 떨리는 게 머리가 덜 말랐는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엘리베이터가 제 층에 도착했다.
195
천천히 복도를 걷는데 센서등이 켜지면서 제 집 앞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 형. 괜찮아요?
- ...뭐야, 여기 왜 왔어.

얘가 내 주소를 어떻게 알지?

- 비 엄청 맞았다면서요.
- 촬영이니까.
- 무릎은 괜찮아요?
196
재현이 바로 무릎을 굽혔다. 버퍼링 없이 바로 주저앉는 것을 보니 다리는 이제 거의 다 나은 모양이었다.

- 대체 누가 다 알려준 건데?
- 그냥 어쩌다가 알게 됐어요. 감기 걸린 거 아니에요?
- 괜찮아. 사소해.
197
재현이 다가와서 이마에 손을 짚었다. 분명 저는 열이 나는 상황이었고, 저보다 체온이 낮은 재현이 손을 올린다면 차갑다고 느껴야 했다.

- 열 나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 뜨거웠다.
198
- 진짜 그것 때문에 왔다고? 너 아무리 스케쥴 없다고 해도 차라리 집에서 더 쉬는 게...
​- 좋아하잖아요.
- ...
- 내가 건우 형을.

뱉어내는 숨의 온도가 너무 높았다. 이건 제 몸이 분명히 나약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를 맞았을 때와 너무 달랐다.
199
왜냐하면 한쪽 구석이 미치도록 간지럽다고 느껴졌으니까. 벌레에 물린 것도 아니었고, 무언갈 잘못 먹은 탓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 ...일단 집으로 들어와. 복도에서 크게 떠드는 거 아니야.
200
집으로 들어가니 몸이 순식간에 포근해졌다. 그럼에도 제 몸은 진정하질 않았다.

- 약 어디 있어요? 갖다 줄게요.

천천히 신발을 벗기 위해 잠시 앉은 건우를 두고 재현이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건우가 그의 바짓자락을 확 잡았다. 재현이 살짝 휘청였지만 바로 중심을 뒤를 돌았다.
201
- 그, 혹시 집안에 들어가는 게 불편한 거면...
- 야.
- 네?
- 좋아한다고 한 번만 더 말해봐.

모든 감정을 연기하는 직업을 가졌다. 완벽한 씬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끝없이 연구했다.
202
그러니까 제 속을 자꾸 이리저리 긁어대는 감정이 무엇인지 사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 건우 형.

재현은 다정하게 건우를 부르면서 한 쪽 무릎을 바닥에 붙여서 시선을 최대한 맞추었다.
203
일순간 반짝인 눈동자가 오로지 건우만을 담아냈다.

- 좋아해요.

건우가 실소를 터뜨렸다. 이건 뭐, 더 이상 부정할 수도 없었다. 재현의 멱살을 확 낚아채며 끌어당겼다.

- 형?

아무래도 나는 사실 이 애새끼한테 제대로 감긴 모양이었다.
204
-

[신재현, 김oo 감독 영화 주인공 캐스팅! 사고 후유증 이제는 없어...]

그렇게 집에만 박혀 있으며 모든 스케쥴을 취소하고 쉬기만 한 결과, 의사 진단보다 빠르게 회복했다. 뼈도 잘 붙어서 이제 불편한 거 하나도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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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다 싶어서 달려드는 영화 감독들의 러브콜에 재현은 건우와 이야기하여 현재 가장 핫하고, 바로 작년 작품으로 해외 유명 시상식에서 수상까지 한 젊은 감독의 영화를 선택했다. 사고로 휴식기를 가진 후 행보가 기대되는 탑배우와 요즘 같이 작업하고 싶은 1순위 감독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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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은 복귀 후 첫 공식 스케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 빠르게 복귀하신 느낌이 없지 않아 있는데, 회복하는 동안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셨나요? 이렇게 브라운관에 돌아올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면?
- 아무래도 팬 여러분들이죠. 제 사고를 그 누구보다 걱정해주신 분들이니까요.
207
- 여기서 연인인 류건우 씨의 영향도 있냐고 물어보면 너무 주책일까요?
- 하하, 그렇게 실례되는 질문은 아니에요. 실제로 그가 없었다면 빨리 일어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 그렇다면 혹시 연인에게 한 마디 해주실 수 있나요?
- 음...
- ...
- 사랑한다는 한 마디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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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는 이 인터뷰를 스케쥴 도중 발견하고 내내 집중하지 못했다. 메이크업 받는데 혹시 너무 덥냐면서 오해를 살 정도였다. 본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는 진정하자며 심호흡을 여러 번했다. 물론, 촬영장에 민폐를 끼치진 않았고 다행히 잘 스케쥴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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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전에 일정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급하게 소속사 대표가 저를 불렀다. 차를 돌려서 서둘러 대표와 대면했고, 대표는 뭔가 우물쭈물 망설였다. 혹시 그 사이에 악성 기사라도 퍼졌나 걱정했다. 그런데 그가 말했다.

- 건우야.
- 네?
- 너 재현 씨랑 진짜 사귀니?
- 네?
210
진짜 사귀냐는 말에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좋아한다는 걸 인정했지만, 그 이후로 진짜 사귀자고 하기도 우스웠고, 이미 쇼윈도로 알려진 마당에 이제 와서 1일, 2일 세는 것도 이상했다.

- 이 바닥에 있으면 다 보여. 재현 씨랑 관계가 좀 달라진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211
- ...
- 언제부터? 3년 동안 아무런 진전 없었잖아. 병문안 가고 챙겨주다가 좀 마음 맞은 거야?

순간 거기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까 재현이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저와 재현의 매니저만 아는 비밀이었다. 괜히 소속사 대표들이 알면 일이 커질까봐 함구한 사실이었다.
212
- 저는 잘 모르겠는데...
- 이왕 이미지 좋은 거 진짜 사귈 거면 사귀어. 나중에 쇼윈도라고 들키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지 않겠냐.
- ...
- 진짜 사귄다면 언질이나 주라고 부른 거야.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213
신재현이랑 진짜 사귄다니. 솔직히 그러라면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감정에 너무 휩쓸린 나머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 그쪽도 이제 복귀한다니까 서로 더 윈윈하기 좋겠다.

나를 좋아하는 건 28살이 아니라 20살의 신재현이다.
214
-

재현의 복귀 기사가 나간 후, 대충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건우는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거리를 두면서 재현을 조금 살펴보았다. 의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한 달 정도면 금방 기억이 돌아오고, 가끔 운이 나쁘면 평생 기억을 못 찾을 수도 있다고.
215
그래서 과연 신재현은 기억을 언제 되찾을 것인가. 그게 관건이었다. 언제까지 저 애새끼랑 사랑놀음을 할 수는 없었다. 원래 그와 저의 관계는 오로지 비즈니스 그 자체였으니까.

[오늘도 바빠요?]
216
아직 이렇게 저쪽에서 안달나며 연락하는 것을 보면 머리에 생긴 이상이 아직도 유지되는 모양인데, 밀어내면 저 애새끼 쪽에서 걸고 넘어질 테고, 괜히 멋대로 같이 놀면 나중에 돌아왔을 때 관계가 이상해질 테고.

[어, 많이]

그러니까 이건 탐색이다.
217
-

드라마는 어느덧 종방까지 얼마 안 남았다. 오늘은 마지막 촬영 날이었다. 몇 달동안 하루 내내 보면서 정이 많이 들었던 스탭들과도 이제 끝이었다. 언제나 마지막은 아쉬운 법이었다. 건우는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
218
NG가 좀 난다고 해도, 여기서 빠르게 끝나면 또 그거대로 서운하니 촬영장 분위기가 여태껏 진행했던 것 중 가장 좋았다.

- 이제 마지막 씬입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고 마지막까지 다들 파이팅!
219
오직 한 씬만 남겨두었다. 드라마는 화제성 1위였고, 주연 배우들도 벌써부터 차기작 대본이 줄줄이 들어올 만큼 인기였다. 이제 대장정을 마치고 유종의 미를 거둘 때였다.

- 액션!!!

쌀쌀한 날씨, 이제는 대사를 뱉을 때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220
코트를 입은 남자주인공의 목도리가 바람을 타고 팔랑거렸다. 옷 매무새를 정리하기 위해 잠시 멈춰섰다. 그 순간 더 세게 분 바람이 잠깐 풀어버린 목도리를 뒤로 날려보냈다. 제 물건을 찾기 위해 몸을 돌렸다. 어떤 어린 소녀가 다가와 그에게 떨어뜨린 목도리를 건네주었다.
221
남자주인공은 무릎을 굽히고 어린 소녀에게 시선을 맞추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물었다.

-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될까?

소녀가 해맑게 웃으면서 가슴에 박힌 유치원 명찰이 클로즈업되었다.
222
- 끝! 수고하셨습니다!!!

감독이 박수를 치며 먼저 벌떡 일어났다. 모든 스탭이 연달아 박수를 마구 보냈다. 누구 하나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고생했다면서 손바닥에 불이 날 만큼 짝짝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건우도 함께 합을 맞춘 어린이와 인사하고 모두에게 허리를 숙였다.
223
심지어 매니저는 그동안 고생했다며 꽃다발을 주었다. 이런 건 저보다 더 힘들었던 스탭들한테 줘야 하는데, 건우는 감독님이라도 받으라며 건넸다. 그리고 여기저기 인사하고 촬영장을 다함께 정리하며 종방연 때 보자는 말과 함께 촬영은 모두 끝이 났다.
224
- 바로 집으로 갈래? 아니면 다른 뒤풀이라도 있어?
- 아, 없어요. 종방연 때 다 한 번에 만나기로 해서.
- 그러면 쉬러 갈래?
- 음...
- 응?

건우는 잠시 고민했다. 이제 저는 스케쥴에 여유가 생길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모두 미뤘으니 구실은 이제 다 떨어졌으며 대놓고 피해다닐 수는 없었다.
225
- 신재현 좀 만나러 갈게요.

그러니까 이제 이쪽과도 끝을 낸다 하더라도 뭔가 시원하게 해결해야 했다.

재현의 집이었다. 바로 찾아간다고 했을 뿐인데 그는 당황하거나 미루는 것 없었다. 환영해주며 곧장 문을 열었다. 이제 이 집도 좀 익숙해졌네. 건우가 집안으로 들어갔다.
226
- 마지막 촬영은 잘 끝났어요?
- 그렇지.
- 종방연은 언제예요?
- 일주일 뒤. 다른 사람들 스케쥴 좀 맞추느라.
- 이제 좀 쉬겠네요.
- 쉬어야지.
- 커피 마실래요?
- 응.

잠시 앉아있으라고 하면서 재현은 주방으로 갔다.
227
건우는 소파에 앉는가 싶더니 그대로 다시 일어나 집안을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여전히 집안은 참 깔끔했다.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법이었다. 원래 막 사회생활 시작하는 20살들은 집안이 더럽기도 할 텐데 그런 걸 본 적이 없네.
228
침실이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재현은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인지 의심이 될 만큼 침구를 빳빳하게 정리했다. 잘못 걸터 앉으면 자국이 남아서 이 모양을 헤칠 것 같았다. 집을 그저 둘러보았다. 당연히 곳곳에 팬들이 준 선물도 전시되었고, 시상식 트로피도 많았다.
229
그러다가 문득 침대 옆 협탁이 눈에 들어왔다. 협탁에 달린 작은 서랍에 손이 갔다.

- ...

그 안에 별 게 있진 않았다. 대본이었다. 자기 전까지도 대본을 숙지하는 모양이었다. 배우들이라면 이런 경우가 많았다. 당장 저도 그러했으니까.
230
건우는 이번 영화의 자세한 스토리가 조금은 궁금했다. 슬쩍 넘겨보았다.

- ...?

건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사를 보는 게 아니라 대본을 전체적으로 빠르게 넘겼다.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231
- 언제 방으로 들어왔어요?
- ...야.

대충 다 살핀 건우가 재현에게 대본을 흔들며 물었다.

- 너 기억 돌아왔지.

고작 대본 하나로 이런 유추가 가능하냐고 물을 수 있었다. 건우는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재현에게 보여주었다.
232
거기에는 대사를 제외하고 지문이 싹 지워져 있었다. 예전에 재현이 그런 말을 했었다.

[연기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고요? 뭐, 동료 배우로서 그 정도는 궁금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저 딱히 별거 없어요.]
[별거 없는 게 뭔데.]
[지문을 다 지워요.]
[왜?]
233
[내가 대사를 칠 때 어떻게 연기할지 지문이 먼저 제시해주니까 나만의 연기를 막아버리니까요. 독창적인 느낌을 낼 수가 없거든요.]

물론 이 사실을 매니저에게 전달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연기가 뭔지도 모른다는 애새끼가 지문을 다 지우면 과연 연기를 제대로나 할 수 있을까.
234
말이 안 됐다. 무엇이든 기초가 있어야 발전이 가능했으니까.

​- 아니요.
- 거짓말하지 마. 너 이거 이번에 들어가는 영화 대본이잖아.
- 건우 형.
- 언제인데?

얘는 대체 언제부터 기억이 돌아온 걸까.
235
바쁘다면서 내가 밀어냈을 때도 기억이 돌아왔으니까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을까. 할 말이 많은데, 정말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따져야 할지 감이 안 왔다. 나오는 건 한숨이었다.

- 기억 되찾은지 얼마나 됐냐고. 나 그만 속여.

양손에 뜨거운 커피를 들고 있던 재현이 잠시 옆에 내려놓았다.
236
- ...2주.
- 2주 됐다고?
- 2주만에 찾았다고요.
- 뭐?

이런 미친. 그때면 퇴원도 하지 않았을 때였다. 기억 잃었다고 사람 속인지가 2달을 훨씬 넘겼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너무 안일했던 모양이었다. 이놈은 연기자인데.
237
- 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아니다.
- 형.
- 뭐, 휴식기에 심심해서 가지고 놀고 싶기라도 했어? 네 말 따라 계속 불려나와주니까?
- 그럴 리가 없다는 거 잘 알잖아요.

그걸 잘 알았다.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238
왜 제 이미지를 바꿔가면서 이렇게까지 잘해주려고 하고, 사랑을 속삭인 걸까. 건우는 차라리 저를 가지고 놀았다는 쪽이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었다.

- 진심이라서요.
- ...뭐가.
- 내가 형 좋아하는 게 진심이라서.
- ...
- 그러니까,
239
재현은 두손을 모아 제 얼굴을 크게 쓸면서 머리카락까지 한 번에 넘겼다. 그렇게 뻔뻔하던 놈이 저런 식으로 나오는 건 또 처음이었다.

- 사실 처음부터 형 좋아했다는 소리예요.

이게 무슨 소리일까. 쇼윈도가 아니었던가. 서로 윈윈하기 위해서 조작된 관계였는데 처음부터라니.
240
- 너 진짜 대체 무슨 말을...
- 이거 봐.
- ...
- 말하면 못 믿으니까 내가 이렇게 돌아서 왔잖아요.

차라리 처음 쇼윈도를 제안하기 전에 고백을 받았다면 충격을 덜 받았을까. 아니, 그때는 애초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고백하냐고 거절했을 가능성이 더 컸다.
241
자그마치 3년동안 기회를 엿보다가 사고가 났을 때 정말 기억을 잃고, 기억을 잃은 자신이 무작정 저지른 이 일을 기회라고 붙잡은 것이다. 아, 진짜 망할...

- 내가 너를 싫어한다는 건 아니야.
- ...
- 그런데 나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겠냐.
242
-

일주일 뒤, 드라마 종방연이었다. 건우는 그동안 푹 쉬면서도 재현의 생각을 지우진 않았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었다. 그래, 넌 사실 나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거짓말까지 했구나, 라면서 감동 받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243
엄연히 사람을 속인 것 아니던가. 저런 거짓말쟁이를 대체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

[얼마나 기다릴까요?]

그와중에 재촉. 건우는 조금 의심이 될 정도였다. 기억 돌아오긴 했는데 왜 사람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전혀 못 받았을까. 이놈은 원래부터 애새끼였던 건가.
244
그런데 그 본성을 다 감춘 건가. 연기를 너무 잘하니까 이걸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건지.

- 건우야.
- 네?
- 기자들이 너무 많은데?
- 네?

종방연에 기자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긴 했다. 그런데 매니저가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물론 화제성 1위의 드라마였지만, 어째 낌새가 이상했다.
245
매니저가 차를 세웠다.

- 잠시만 내리지 말고 기다려.
- 네.

상황 파악하기 위해 가만히 대기했다. 몇 번 여기저기 무언가 확인하던 매니저가 건우에게 말했다.

- 건우야.
- 네?
- ...너희 혹시 쇼윈도야?
246
건우가 빠르게 제 핸드폰을 켰다. 부재중이 잔뜩 찍혀 있었다. 모르는 번호, 소속사, 지인... 그러니까 아주 여기저기서 난리였다.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자마자 보이는 기사는 그거였다.

[신재현, 동료 여배우 이OO과 데이트 포착.. 류건우와는 사실 쇼윈도]
247
- 이게 무슨,

기사 이미지를 확대했다.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썼지만 누가 봐도 신재현이었다. 카페에서 동료 배우에게 커피를 건네는 모습이었다. 이건 그냥 척봐도 별거 아닌 사진이었다. 그런데 대뜸 저와 쇼윈도라는 기사까지 올라가다니. 이건 이상했다. 건우는 SNS를 뒤적거렸다.
248
류건우랑 신재현 구라라면서?
- 솔직히 걔네 3년 넘게 사귄다는데 1년 전에? 우연히 본 적 있는데 진짜 둘이 대화 한 마디도 안 함. 사귀는지 의심될 정도였음. 뭐라하지? 걍 좀 보여주기 식?ㅋㅋㅋ 일부러 사진 찍히려고 붙어 있는 느낌이었음..
249
ㄴ 와 뭐야
ㄴ 그래놓고 이제 진짜 연애한다고 신재현은 저러고 있고?
ㄴ ㄹㅈㄷ 걍 짜고치는 거였네ㅋㅋㅋ
ㄴ 연예계 걍 ㅈㄴ 무섭다

기다렸다는 듯이 목격담이 터져나왔다. 비슷한 내용의 게시글이 여러 개였다. 그래서 저렇게 기자들이 진을 쳤구나. 종방연까지 찾아와서 먼저 기사 한줄 쓰려고.
250
건우는 머리가 아팠다. 아무리 뒤져도 다 같은 이야기였다.

ㅅㅈㅎ ㄹㄱㅇ 걔네 진짜 맞음
- 나 한두 달 전에 영화보러 갔는데 우연히 ㅅㅈㅎ 만났거든? 싸인해달라고 하려했는데 데이트 중이라 곤란하다고 했음...
251
글고 보여주기식? 그거 절대 아니던데ㅋㅋㅋ ㅅㅈㅎ이 ㄹㄱㅇ 바라보는 시선 걍 꿀 뚝뚝임... 게다가 쇼윈도가 대체 왜 사석에서 백허그를 함 말도 안되는 소리 ㄴㄴ
ㄴ 이건 또 뭐야
ㄴ 이거 찐임? 인증 좀
ㄴ ㅅㅂ 인증을 어떻게 해 영화표도 버렸는데
ㄴ 응 안 믿어
ㄴ 엥 난 이게 더 진짜 같기도
252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찾은 최근 이야기. 건우는 거기서 멈칫했다. 타이밍이 좋게 제 핸드폰 상단에 알림이 떴다.

[사실 아니에요]
[전화해도 돼요?]
[종방연 갔는데 괜찮아요?]

우르르 메시지를 쏟아내는 재현이었다. 건우는 답장하지 않았다. 그대로 핸드폰을 껐다. 복잡했다.
253
우선 이 상황은 해결해야 했다. 매니저에게 부탁했다.

- 형, 혹시 뒤쪽으로 가주실 수 있어요? 못 지나갈 것 같아서요.
- 어, 그래.
- 그리고 이따가도 뒤쪽에서 뵐게요. 괜히 기자들한테 잡힐 수는 없으니까. 대표님한테는 가면서 연락 드릴게요.
254
급하게 차를 돌렸다. 건물을 크게 돌아 이동했다. 건우는 이 모든 소식을 접했을 대표에게 문자를 넣었다.

[일단 종방연 끝나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툭툭 건드렸다. 여전히 답장을 주지 않는데도 재현은 계속 메시지를 보냈다.
255
그와중에 배려한 건지, 아니면 안 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지 몰라도 전화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거 사실 아니에요]

건우는 고민 끝에 우선 대표에게는 이렇게까지 딱 보냈다.
256
-

[류건우 측, "쇼윈도? 사실무근" 여전히 신재현과 잘 만나고 있어..]
[신재현 측, "그저 친한 동료 사이일 뿐, 류건우와 여전히 좋은 관계"]

양 측 소속사에서 의견을 맞추어 기사를 냈다. 물론 여전히 대중들은 믿지 않았다. 아무래도 목격담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257
기자들도 건수를 잡기 위해 더 물고 늘어졌다. 그동안 건우는 드라마도 끝났겠다. 집에서 쉬며 기자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어지간하면 핸드폰을 꺼두라고 하였다. 중요한 연락까지 못 받을 수는 없었다.
258
켜두는 대신, 건우는 핸드폰을 많이 들여다보지 않고 VOD 다시보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 ...

대표는 금방 사그라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쪽에서 아니라고 하는데 뭐 어쩌겠냐면서 의견을 계속 밀고 나갈 것이라고 했다. 건우도 알았다면서 얌전히 있었다.
259
그렇게 며칠 뒤였다. 컴퓨터로 게임이라도 시작해볼까 하던 중이었다. 포털 사이트에 걸린 메인 기사가 저는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소식이었다.

- ...무슨.

[신재현❤류건우, 쇼윈도가 사실이었다? 결정적인 증언 쏟아져..]

건우는 홀린듯이 기사를 바로 클릭했다.
260
스크롤을 내리면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인 증언이라고 해봤자, 지금까지 SNS에 올라온 것들과 별다를 거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결이 달랐다.

[사고 당시 신재현의 병실에 자주 드나들던 간호사의 증언에 의하면,
261
두 사람은 완벽한 쇼윈도였고 가끔 들리는 대화에 의하면 특히나 류건우 쪽에서 쇼윈도인 것을 수없이 강조했다고 한다.]

병원 간호사라니. 이거 따지고 보면 환자 개인정보 누설 아닌가? 덕분에 여론이 사그라들기는커녕, 진짜 연인이 맞다고 주장하던 사람들까지 바보가 되고 말았다.
262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신재현]

재현의 전화가 때마침 왔다. 내내 연락을 받지 않았고 답장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건우는 받았다.

- 여보세요.
[기사 봤어요?]
- 어, 누가 환자 개인정보를 막 누설하던데.
[알아서 해결할게요.]
- 뭘 해결해.
263
이미 다 들통난 마당에 해결이라니. 간호사 고소라도 하려고?

[제안한 건 내 쪽이었으니까 내가 시작했다고 하면 되니까요.]
-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형]
- ...
[안 싫어한다고 해줬으니까 난 그거면 돼요.]

연락이 끊겼다.
264
다시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이미 다른 사람한테 전화 중인건지 도통 걸 수가 없었다. 건우는 핸드폰을 꽉 쥐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어냈다. 얘는 진짜 대체.

-

[신재현, 연기대상 시상자로 참석.. 논란에 대해 입 열 것인가]
[류건우, 논란 속 연기대상 참석.. 역시 대상은 류건우?]
265
연말이었다. 시상식 시즌이었고, 건우도 당연히 시상식에 참석했다. 올해 드라마 시청률은 모든 방송사 통틀어서 최고 기록이었고, 덕분에 이미 유력한 대상 후보로 언급되고 있었다. 일찍부터 샵에 가서 단장했다. 그동안 건우는 많은 생각을 정리했다.
266
혼자 해결하겠다던 신재현은 설마 여기서 일을 터뜨릴 생각일까.

- 오늘 너무 멋있는데? 역시 대상이라고 힘 준 건가?
- 형, 그렇게 비행기 태워주시다가 대상 못 타면 더 민망해져요. 마음 비우는 게 좋다니까.
- 너 아니면 대체 누가 받아.
267
- 글쎄요. 선배님들도 많으시니까요.
- 모르겠다. 나는 내 연예인 기대할란다.

어떻게 보면 내내 집에 있던 건우가 논란이 터진 후로 처음 공식석상에 나오는 날이었다. 그만큼 기자들이 저를 괴롭힐 거라고 생각했다. 계속 연락이라도 해서 말이라도 맞출걸 그랬나.
268
방송국에 도착하였다. 기자들 눈에 띄지 않는 주차장으로 들어가 무사히 건물 안으로 들어왔고, 레드카펫을 위해 대기했다. 그동안에도 SNS에서는 저를 계속 노리고 있었다.

솔직히 류건우는 별로 신재현 안 좋아하는 것 같긴 했음
ㄴ ㅇㅇ 인스타도 잘 안 하고
ㄴ 류건우는 그냥 인스타를 안해
269
ㄴ 그건 맞긴 한데ㅋㅋㅋㅋ 연인인 티도 걍 아예 안 났단 거임
ㄴ 근데 솔직히 대놓고 연애질하는 것도 웃기지 않냐?
ㄴ 그러려고 쇼윈도 했잖냐

- ...

내가 신재현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 라... 정말 나는 어떨까.
270
나는 그 애새끼에게 감긴 것이 확실했지만 신재현의 모든 부분을 다 감쌀 수 있는 걸까.

나였으면 걍 라이브라도 켰다 기사만 내니까 더 안 믿지 ㅇㅈ?
ㄴ ㅇㅈ
ㄴ ㄹㅇ임 소속사 뒤에 숨는데 어케 믿으라는 거?
ㄴ 증언 ㅈㄴ 많은데 ㅉ

- ...아.

그러게 말이다. 나 왜 지금까지 멍청하게 굴었을까.
271
-

재현이 레드카펫에 등장했다. 플래시가 마구 터지면서 기자들이 연기대상 시상자로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최근 논란의 주인공으로 한 컷 건지는 것 같았다. 레드카펫 진행자가 자연스럽게 오늘 시상식에 참여한 소감이나 물으려는데 누구 하나가 확 끼어들듯 소리쳤다.
272
- 류건우 씨와는 어떻게 된 겁니까!!! 연인이 아니라서 같이 입장하지 않으신 건가요?

시상식과 관련없는 이야기는 받지 않으려고 진행자가 거부하려 했지만, 재현이 그냥 마이크를 달라고 하였다.

- 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사실 그저 동료 사이가 맞습니다.
273
현장이 웅성거렸다. 빼액 소리 지르는 사람이 없는데 웅성거리는 것만으로 장소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 그리고...
- 류건우 씨!!!
- 류건우 씨! 여기 한 번 봐주세요!

무언가 덧붙이기 전에 갑자기 건우의 이름이 불렸다. 건우는 분명 이 타이밍에 레드카펫에 오르지 않았다.
274
그런데 멋있는 정장을 딱 차려입고 모델처럼 레드카펫 끝에 등장했다.

- 류건우 씨! 한 마디만 해주세요! 팬들과 대중을 기만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이순간을 절대 참을 리 없는 기자가 바로 건우에게 물었다. 건우는 당황한 기색 없이 말했다.
275
- 마이크 좀 주시겠어요?

모든 기자는 건우에게로 몸을 틀어 플래시를 마구 터뜨렸다. 레드카펫에 먼저 선 건 분명 재현이었는데, 주인공이 바뀐 느낌이었다.
276
서둘러 건네받은 마이크였다. 주목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시상식에서 이러는 것은 옳지 않았지만, 이 상황을 한 번에 정리하는 것과 동시에 그동안 묵은 수많은 감정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마법의 말이 있었다.
277
- 신재현 씨와는 실제 연인 사이입니다. 한때는 그저 좋은 동료 사이였지만, 이제는 인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좋은 모습을 보여드린다면 저희를 앞으로 예쁘게 봐주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쇼윈도 커플 논란에 대해서는 하실 말씀이 없으신가요?
278
건우는 레드카펫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재현이 있는 곳까지 도달해 그의 앞에서 웃음을 한 번 터뜨렸다. 거리낌 없이 손을 잡았다. 카메라에 아주 제대로 찍히도록 손을 내보이며 꽉 힘을 주었다.

- 우결도 진결이 되는 마당에 쇼윈도가 진짜가 되는 게 뭐가 그리 놀라울까요?
279
저와 다르게 재현은 그저 건우를 따라 잡을 뿐, 힘을 세게 주진 않았다. 그래, 기억을 잃은 게 대체 뭐가 중요했냐. 근본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 야.

건우가 마이크를 잠시 떼고 입 모양을 숨기며 재현에게 말을 걸었다.

- 네?
- 쇼해야지. 명색이 쇼, 윈도였잖냐.
- 무슨.
280
잡은 손을 확 제쪽으로 끌어당겼다. 순간 가해지는 힘에 재현의 몸이 건우 쪽으로 기울었다. 덕분에 재현의 귀가 건우의 뺨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건우가 잘 들으라고 또박또박 속삭였다.

- 여기서 네가 뽀뽀 정도는 해야 박수 받지 않겠어?
281
카메라가 수십 대였다. 그리고 지켜보는 사람은 수백 명. 안방에서 미디어를 통해 시청하는 사람은 수만 명. 이 모든 관객에게 쇼를 보여주기 아주 좋은 순간이었다. 눈이 따가울 만큼 하얗게 플래시가 계속 터졌다. 지금 해야 하나, 진짜 해도 되나. 타이밍을 잡는 도중, 건우가 말을 덧붙였다.
282
- 애새끼 누가 책임져.
- ...
- 내가 책임져야지.

이건 타이밍이 사실 필요없었다. 재현은 그대로 건우의 허리를 감싸며 제 품으로 끌어당기고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미칠 듯한 환호성이 귀청을 터뜨릴 정도였다.
283
[신재현❤류건우, 쇼윈도.. 사실이었지만 이제는 진짜 연인이야]
[신재현❤류건우, "우결도 진결이 되고, 쇼윈도도 진짜가 된다" ]
[SBC 연기대상, 이변은 없었다! 대상 류건우.. 대상 포함 '3관왕']

完
284
@Western_BF
서나@Western_BF
[청려건우] 10살 연하는 아무래도 곤란한가요?

- 배우 엋건
- 쇼윈도 커플, 기억 상실 소재
- 약 39000자

포타에 백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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