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맨물 #엋문 으로는 일찍 결혼했다가 1년만에 이혼했는데 n년 뒤 박문대가 취직한 회사 팀장이 하필 신재현임 근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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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나@Western_BF
16 views Sep 26, 2026 ~44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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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맨물 #엋문 으로는

일찍 결혼했다가 1년만에 이혼했는데 n년 뒤 박문대가 취직한 회사 팀장이 하필 신재현임 근데

- 자기야 이것 좀 해줘요

- 자기야 서류 잘못 됐다

- 자기야 오늘 회의 잊지 말고

이래서

- 너 미친새끼냐? 이혼한지가 언젠데 자기야 자기야 거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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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더니만 신재현은 모든 부하직원한테 자기야 라고 호칭 통일하고 다님

- 나는 문대 씨가 원하는 것처럼 남들과 똑.같.이. 대하는 것뿐인데 왜 예민하게 굴어요? ^^

이러면 또 할말 없음 진짜 남들한테도 자기야라고 부르고 본인만 예민한 사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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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문대 씨.
- 뭐요 팀장님
- 내 기억이 멀쩡하다면 나는 자기가 아니라 여보라고 한것 같은데
-
- 자기라고 불렀던 건 대체 어떤 새끼예요?

이러고 갑자기 신재현 버튼 눌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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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사유는 엄청 사소한 게 쌓여서 불려졌을 듯... 만나게 된 계기도 대학 선후배 사이로 이래저래 부딪치는 일이 생기다가 정붙어서 연애하고 졸업하자마자 결혼해버림 그런데 오래 연애했다고 해도 결혼은 또 달랐음 약간 환상이 와장창 깨졌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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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냥 아침밥 왜 안 챙겨먹냐는 잔소리부터 시작했음. 진짜 별거 아니었어. 그런데 여기부터 뭔가 어긋나니까 마음에 안드는게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 거지. 싸움이 너무 늘어서 이건 그냥 안 맞는 거고 사랑에 속았다고 생각한 거지.

- 우리 이혼하자

그래서 그냥 이혼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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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먼저 제안한 건 박문대였고 신재현은 굳이 묻지 않았어. 그냥 박문대가 이혼하자 하니까 알았다고 받아들인 거야. 여기서 또 억울하지. 진짜 우리는 서로 쌓인 게 많았나보다 이런 생각.

그리고 집을 나가기로 한 건 문대였고, 정리하는 마지막 날까지 대화를 안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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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볼게. 이런 말도 없이 문대는 꿋꿋이 입을 다물고 짐을 다 챙겨서 이사를 갔지. 완벽하게 이혼했어. 관계는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했지

-

그렇게 이혼하고 시간이 지나서 박문대는 꾸준히 일을 다니다가, 이직할 시기를 잡고 있었어. 아무래도 연봉 협상도 문제였고 옮길 생각하고 취업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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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오래 다닌 회사도 관두고 새로운 곳으로 좋은 조건에 이직 성공했지.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 이번에 새로 마케팅 2팀에 들어온 박문대 대...

팀장이 전 남편이랜다. 분명 이직 면접 볼 때 팀장은 신재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애초에 이혼하자마자 해외로 간 걸로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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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일이고 아니... 해외 지사에서 돌아온 새로운 팀장이랜다... 박문대랑 시기도 비슷하게 본사에 들어왔다고. 이 상황에서 바로 퇴사하겠다고 하는 것도 미친놈이고. 어쩌겠어. 그냥 다녀야지.

-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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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박 대리님.

오랜만에 본 소감? 20대의 절반 이상을 함께 하고 30대에 재회한 느낌?

- ...

아련하고 과거 생각나고 그럴 것도 없어. 그냥 ㅈ같지 뭐. 열받을 정도로 변한 게 없는 모습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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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이네요.

서류 결재하러 갔더니 한다는 소리가 이런 거라니. 회사에서 공과 사도 구분 못하는 새끼.

- 수고했어요. 이대로 진행할게요.

돌려받으면서 박문대가 잇새로 조용히 말한다.

- 죽고 싶지 않으면 남들이랑 똑같이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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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건지 마는 건지. 신재현은 그냥 박문대를 돌려보낼 뿐임. 이번 회사에서는 진짜 평생 직장이라 생각하고 다닐 생각으로 오랫동안 알아봤던 건데, 평생 직장은 무슨. 아, 물론 가능할 것 같다. 앞으로 1년 안에 요절하면 그것도 평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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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야. 이거 페이지 하나 누락됐는데요.
- 뭐, 뭐?
- 페이지 누락됐다구요.

호칭에 귀를 의심함. 지금 나를 뭐라고 부른 거야? 어이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반말이 툭 튀어나옴. 일단 그건 무시하고 일부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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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환청이야. 그렇게 믿으려고 했지. 그런데,

- 자기야. 커피 마시고 해요.

- 자기가 1팀 좀 다녀올래요?

- 자기야.

저놈의 자기야. 이거 진짜 일부러 이러는거지? 환청이 아니라 이 정도면 굳이 이혼한 전 배우자한테 엿먹으라고 하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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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현재.

- 지금 그게 중요해?
- 뭐, 문대 씨한테는 안 중요하겠죠.
-
- 이혼하고 누굴 만난 건지, 아니면 정말 사람 자체를 지워버린 건지 몰라도, 호칭도 다 잊어버리고,
- 됐습니다. 어쨌든 제가 오해한 거니까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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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소리 제법 열받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도 자기야라고 하는데 어쩌겠어. 남들한테 팀장님이 자기야 라고 하는 거 역하지 않으세요? 라고 설문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 근데 문대 씨.
- 네.
- 아니지, 자기야.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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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러 이러는 거 맞아.
- ...뭐?

미친 새끼야? 자기야 라고 하는 이유가 나 엿먹으라는 의도가 있는 게 맞았다고 본인 입으로 시인한 거지?

- 억울하잖아요.
- ...
- 당신이랑 이혼한 거.

지금 시간이 대체 몇 년이 지났는데, 대낮에 그것도 회사에서 저걸 왜 말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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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친 소리하지 마세요. 합의봤잖아요.
- 일방적인 것도 합의라고 하나보네.
- 도장 찍었고, 법원도 잘 다녀왔잖습니까.
- 그러니까 그게 억울했다는 거죠.
- ...
- 고칠 생각 안 하고 무작정 서류부터 들이미는데 나보고 어쩌란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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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진작 말하던가.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제 30대 중반을 향하고 있는 상황에 20대로 돌아가자는 거야 뭐야.

- 지금 일하는 중입니다. 사적인 이야기 자제해주세요.
- 그래요, 일 얘기할게요. 다음 주에 부산 출장 같이 갑시다.
- 뭐???
- 원하는대로 일 얘기 해드렸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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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일 얘기지. 근데 그걸 왜 날 데리고 가냐고. 마케팅에 사람이 나뿐이야? 심보가 고약하다 못해 이건 더럽다.

- 자기야.
- ...
-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 싫어요.
- ...
- 근데 어쩌겠어. 문대 씨가 이기적으로 굴겠다는데.
- ...
- 그래서 나도 좀 이기적으로 굴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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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출장 당일. 신재현이 자기 차로 가겠다고 고집 부림. 집이 어딘지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아서 박문대가 직접 신재현 집으로 가기로 함. 분명 오피스텔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없지. 그래서 전화를 건다.

- 팀장님. 서둘러 출발해야하는데 어디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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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보낼 메일이 있어서 처리 중인데 올라와서 기다릴래요?]

박문대는 질색하면서 겨우 한숨을 삼킨다. 누구 좋자고 거길 올라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신재현이라서 이것도 다 수작같아.

- 밑에서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오시죠.
[오래 걸릴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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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급.하.게 보내신다면서요? 얼른 끝내고 내려오세요.

자기만 급해? 거래처 만나러 가는 건데 어디서 지각을 하려고 해. 지금 이 건물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린다. 문대는 계속 시간 확인하면서 인터넷 뉴스 기사나 보는데 10분이 지나도 안 나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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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X 진짜...

대가리 한 대 쳐서 데려오든가 해야지. 이러다가 저 놈이 입 잘못 놀리면 거래처랑 약속 늦는 것도 다 내 탓이 될 수 있다. 결국 익숙한 그 집을 굳이 올라간다. 그런데 벨을 누르는 데도 답이 없다. 집에 있긴 한 거야? 사실 이것도 다 거짓말 아니야? 아니면 엇갈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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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는 왜 갑자기 안 받아.

바로바로 잘 받던 사람이 갑자기 전화를 안 받기 시작한다. 한 번 더 거는데 뭔가 소리가 겹쳐 들린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떨어뜨리는데, 문대가 욕을 뱉는다.

- 이 미친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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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 너머로 핸드폰 벨소리가 들린다. 신재현의 성격 상 저런 중요한 물건을 두고 다닐 리가 없다. 문 너머에 있는데도 일부러 안 열어준 거다. 그러니까,

🎵🎶🎵

- 나와, 이 새끼야.

직접 도어락을 열어달라는 거지. 아직도 비밀번호 기억하고 있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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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을 들고 일어나는 재현이다. 이미 넥타이도 매고 신발까지 다 신었으면서 이런 식으로 마주하길 바랐던 거지.

- 그래도 다 기억하네요.
- 어, 다음에는 니네 집 재산 털어가려고.
- 얼마든지요.

열받는 새끼. 운전이나 하게 차키 좀 내놓으라는데 재현은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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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도 운전은 내가 했잖아요.

이기적으로 굴겠다는 말이 생각났다. 남들이 보기에는 배려겠지. 하지만 전혀 아니다. 정말 자기 방식대로 사람을 미치도록 열받게 하는 것이 본인 말을 참 그대로 이행한다는 느낌이 들더라.

- 그럼 빨리 출발이나 하시죠. 거래가 무산되길 바라는 거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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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먹었어요?

문대는 무시한다. 걸음에 무게가 잔뜩 실렸다.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자연스럽게 신재현 차를 한번에 찾는 자신도 싫고, 그냥 이 상황이 너무 짜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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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래도 일은 일이지. 거래처 사람 앞에서도 사람 신경 건드릴까 잠깐 생각했지만,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아서 다행히 계약은 잘 성사시켰더라.

- 저녁이나 먹으러 가죠.
- 일 바쁜 거면 바로 올라가도 됩니다.
- 하루종일 돌아다녀놓고 바로 차를 4시간 운전할 만큼 바쁘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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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숙소도 잡았다. 당일치기를 하기에는 무리인 일정이었으니까. 그냥 더 같이 있기 싫었다.

- 제가 운전해드릴까요?
- 차에 오래 타는 것도 굉장히 피로한 거 알죠?

하지만 까라면 까야지.

- ...그래서 뭐 드시고 싶으신데요.
-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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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아무거나 먹자고 한 게 조개구이. 하나하나 분리해야하는 귀찮은 걸 왜 굳이 먹고 싶어하는 건지. 어차피 구워먹을 거면 고기가 편하지 않나. 문대는 깨작거리면서 고민한다. 이거 발라서 쟤 줘야하냐? 시X. 상사니까 그래야겠지?

- 나 안 줘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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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보는 거 알고 재현이 말한다. 문대는 그럴 생각 없었던 것처럼 냉큼 제 입에 넣는다. 그러면 접시에 새로 하나 더 얹어짐.

- 저도 안 줘도 되는데요.
- 안 먹을 건 아니잖아요. 내가 주고 싶은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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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어떻게 저런 말만 골라서 하지. 재현이 메뉴판 보더니 고민한다.

- 술 한잔 마실래요? 이런 때 아니면 마시기 힘들고, 오늘 고생했잖아요.

얼씨구.

- ...팀장님 마음대로 하시죠.

나한테 의견이 애초에 있긴 하냐,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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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술도 먹었어. 취할 정도는 아니고, 정말 딱 기분 좋을 정도. 하지만 전혀 텐션이 올라가진 않는다. 남은 술을 보면서 저거 다 마시면 각자 방 들어가겠지. 그걸 목표로 술을 마시니 즐거울 리가 있나.

- 이제 다 먹었는데 일어나죠.
- 바다 보러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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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 취하셨으면 방에 던져드릴까요?
- 그냥 보고 싶다는 건데.

신체 부위 그 어느 곳도 빨개진 곳이 없으면서 어디서 취객 코스프레야. 그렇게 울망거리는 고양이인 척 불쌍하게 굴면 내가 봐줄 것 같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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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는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밖에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나오라며 먼저 식당 밖으로 나간다. 이번엔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거다. 어디 한번 계속 앉아있다가 식당 측에 의해 쫓겨나보라지.

- ...

흡연구역 찾아서 식당 근처에서 담배를 꺼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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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아서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라이터의 그립감이 안 느껴져서 가방 속을 살핀다. 구석에 있던 라이터를 찾고 불을 붙이려는데,

- 굉장히 안 좋은 버릇이 생겼네요.

언제 나온 건지. 그 한 마디 하더니 입에 있던 걸 뺏는다.

- 돌려주세요. 아깝게 뭐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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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워요?
- 당연하죠.

거리낌없이 문대가 물고 있던 걸 제 입으로 무는 재현이다. 그리고 불을 붙여달라는 듯이 허리를 살짝 숙이는데 기어코 반말이 또 튀어나오는 문대다.

- 미쳤어?
- 아깝다면서요.
- 누가 너보고 피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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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자기한테 피우라고 안했는데.
- 지X한다. 진짜. 내가 흡연자인 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 안 좋은 버릇이니까요.
- 그래, 누구 덕에 생겼으니 누구랑 밥 먹고 피워야 하지 않겠어?

사실이다. 이혼한 이후로 후련하기는커녕 스트레스 때문에 잠시 달고 살았던 담배가 계속 떠나질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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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 차렸으면 숙소로 돌아가.

문대가 앞장선다. 뒤에서 재현이 부른다.

- 자기야.
- ...
- 문대 씨.

뒤따라오는 발소리도 안 들린다. 돌아볼 때까지 부를 생각인 듯했다. 문대는 시선을 정면으로 유지한 채 말했다.

- 빨리 오기나 하지?
- 여보.
- ...

X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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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현은 제뜻대로 모든걸 이루는 재주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칭찬이 아니다. 욕이다.

- 입 안 다무냐? 취한 척 그만하지? 아니면 진짜 취하기라도 했나봐?
- 네.
- ...
- 나 취했어요.
- ...
- 여보, 내 손 한 번만 잡아줄래요?

그리고 진짜 미친새끼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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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큰 성인이 경찰 손잡고 오고 싶지 않으면 네 발로 오지?

무시한다. 저 손을 부러뜨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어떻게 잘 돌아왔다. 다시 회사로 복귀해서 일하는데 여념이 없는 문대. 출장 간 사이에도 업무는 계속 생기지. 밀린 걸 얼른 처리하고 점심시간에 커피나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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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리님 밥 안 드세요?
- 이래저래 피곤해서 거르려구요.
- 출장 많이 힘드셨구나.
- 아, 그런 건 아니고...

물론 정답인 것 같기도 하고. 유달리 피로감이 가시질 않는다. 문대는 아예 뚜껑을 열어서 얼음을 털어 씹어먹는다. 와그작거리면서 피곤함을 떨쳐내려는데 동시에 신재현이 자꾸 생각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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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일 있으세요?
- 아,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플라스틱 컵을 구기고 말았다. 일단 죄없는 사원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색하게나마 웃어보인다.

뭐, 손을 잡아달라고? 진짜 정신이 나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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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다행히도 그 날 이후로 큰 접점이 없었다. 그래봤자 항상 하는 똑같은 짓거리. 업무 이야기를 할 때 자기야. 호칭을 빼놓지 않는다는 정도.

- 팀장님, 결재 부탁드립니다.
- 자기야, 이건 1팀 다녀와야할 것 같은데요.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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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익숙해졌다. 남들한테도 다 자기야라고 한다는데, 말하는 주둥이를 뜯을 바엔 내가 익숙해지는 게 낫지.

- 맞다, 문대씨...!
- 네?
- 혹시 애인있어요?
- 아니요.
- 아, 그럼 퇴근하고 잠깐 봐요.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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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팀 갔더니 출퇴근하면서 몇 번 인사한 정도밖에 안되는 대리가 말을 걸더라.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지만, 지금은 일을 하고 있으니 얌전히 기다리기로 한다.

그렇게 오후 일이 제법 많아서 빡세게 정신 놓고 책상에만 있었더니 퇴근할 때가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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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안 하려고 강도를 올렸더니 만나기로 한 것도 잊은 문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다.

- 문대씨! 퇴근해요?
- 아, 네. 맞다. 하실 말씀 있다고 하셨죠? 죄송합니다. 순간 잊고 갈 뻔했어요.
- 괜찮아요, 괜찮아요. 가면서 얘기해도 되는데 같이 퇴근해요!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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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는데 퇴근하는 사원들이 많으니까 조용히 귀에 속삭인다.

- 혹시 소개받으실 생각 없어요?
- ...네?
- 사실 기획팀 친구 하나가 문대씨한테 관심가지길래 물어봐준다고 했거든요.

...일단 누구 만날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내 연애는 좀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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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좋게 거절하려고 하는데,

- 문대씨는 결혼해서 안될 텐데.
- 네?
- ㅁ,뭐?

하도 사람들이 많아서 엘리베이터에 탄 줄도 몰랐다. 그나저나 귓속말로 했는데 어떻게 엿들은 거냐고. 아니, 이 정도면 들릴 거리인가.

- 결혼하셨어요...?
- 아뇨, 아뇨. 아닙니다. 팀장님이 농담하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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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는 재현을 째려본다. 허튼 소리하지 말라고.

- 그럼 소개 받으실래요?

그런 이야기는 아닐 텐데.

- 죄송해요, 제가 누구 만날 상황은 아니라서요.
- 아무래도 결혼했으니까요.

콱. 문대는 결국 재현의 발을 몰래 밟아버린다. 구두가 더러워지는 게 알 바야? 눈을 안 찌른 게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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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장님이 농담이 좀 심하시네요.

자칫하면 소문 퍼질 텐데, 대체 무슨 헛소리를 자꾸 하는 거야.

- 죄송해요,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결혼 진짜 안 했고, 아직 누구 만날 생각은 없어요.

여기서 벗어나는 게 답이다. 문대는 급한 척하면서 엘리베이터가 내려가자마자 도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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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남은 사람끼리 대화를 한다.

- 팀장님은 결혼하셨어요?
- 저요? 했죠.
- 아, 진짜요? 몰랐어요. 반지도 없으셔서.
- 아, 반지.

재현이 슬쩍 제 왼손을 앞뒤로 뒤집어본다. 그러더니 웃는다.

- 끼고 다녀야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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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문대는 회사에서 들리는 소문에 기겁한다.

- 신 팀장님 결혼했다면서?
- 언제??
- 본사 들어오시기 전에 하신 거 아닐까?
- 어디서 들었는데.
- 1팀에서 들었지. 팀장님이 직접 말했대. 그리고 손 봐봐.

문대는 그 말을 따라서 재현을 바라보는데, 왼손 약지를 보고 사레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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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반지네...
- 그치? 말 안하고 다니셔서 몰랐나봐.

시X 저게 언제적 반지인데 저걸 끼고 다녀. 진짜 또라이 새끼 아니야??? 여기 회사다. 참자. 참자.

[미치셨습니까? 빨리 반지 빼세요]
[패션 반지인데요]
[누가 패션 반지를 왼손 약지에 낍니까]
[사이즈가 맞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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홧병나서 죽어버리겠네. 물론 내가 티만 안 내면 저놈과 반지를 나눈 상대가 나인 거 모르겠지. 그래서 화나는 거야. 미쳤다고 면전에 욕 박고 싶은데 그걸 못하잖아.

[사람 죽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 맞으시죠]
[아뇨 죽이려는 의도는 없는데요]
[그럼 곱게 빼시죠? 이혼했다고 광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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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안 했다고 광고하는 거죠]

진짜 소주 원샷 하고 싶게 만드네.

[도장. 분명히. 찍었습니다. 억지 그만 부리세요.]
[밥 같이 먹어요]

얘 진짜 뭐라는 거냐.

[오늘 저녁 같이 먹으면서 얘기 좀 하죠]

부서를 옮겨버려? 아니 퇴사... 그래, 퇴사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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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퇴근. 문대는 소리없이 빠르게 자리를 정리한다. 얼핏 보면 칼퇴를 위한 움직임으로 보이지만 아니다. 모든 짐을 가방에 넣고 허리를 최대한 숙여서 자리를 빠져나가려는데,

- 박 대리님 어디 가세요?
- ...퇴근이요.
- 퇴근하고 바로 집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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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들이 다 퇴근하는 타이밍에 굳이 나를 콕 집어서 저렇게 묻는 이유는 뭐냐고. 문대가 결국 허리를 쭉 펴고 똑바로 서서 말한다.

- 아뇨, 약속이 있어서요.

그리고 뒷말은 조용히 입모양으로만 보인다. 니가 밥. 먹자며. 재현이 답변에 만족했는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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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들어가세요. 다른 분들도 얼른 퇴근하세요.

멀쩡한 정신으로 집 가기에는 진짜 글러먹었네.

[주차장에 가있어요]

문대는 문자를 보고 1층이 아닌 지하주차장까지 한번에 내려간다. 넓은 곳에서 얼마 전에도 탔던 그 익숙한 차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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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 옆에 서있는 차를 발견하고 재현을 기다린다.

- 그래서 무슨 일이라구요?
- 그러니까 오늘...

그러다 들리는 회사 사람들 소리에 기둥 뒤에 숨으며 차보다 높이가 낮도록 주저 앉는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속으로 욕을 삼킨다. 신재현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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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휴...

그렇게 몇 분 지났나. 다리가 저려올 때쯤 바로 옆에 있는 재현의 차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그와 동시에 핸드폰이 울렸다. 받으려고 하면, 금방 뚝 꺼지더라.

- 아. 귀엽게 봐달라고 그렇게 올려다보는 거예요?
- ...미치셨어요?

얼른 무릎을 털고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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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이나 빨리 먹고 헤어집시다.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후다닥 조수석에 탄 문대가 좌석에 앉자마자 이상하다는 듯 말한다.

- 뭔데 의자가 눕혀있어.

천천히 좌석을 세우려는데 재현이 갑자기 어깨를 꾹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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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해!
- 아. 다른 부서 사람 지나가거든요. 썬팅 되어있다고 해도 혹시 모르잖아요?
- 내가 네 차를 몰라? 그냥 손 치우지? 안 보이는 거 아니까.
- 얼마나 안 보이는데요.
- 실루엣도 안 보이잖아.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게 힘을 더 주는 재현이 점점 제 몸을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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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는 바로 낌새를 눈치채고 인상을 확 구긴다.

- 그걸 다 기억해요?
- ㅈ같은 건 원래 오래 남는 법이니까.

아하. 재현이 손가락을 올려 문대의 입술을 가볍게 쓸듯이 만진다.

- 그러니까 어떻게든 난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는 거네.
- 진짜 이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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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갔네요. 의자 올리고 안전벨트 매요. 출발하게.

진짜 너무 열받는다.

둘이 저녁 먹자더니 도착한 곳은 고급 한정식 집. 이런 건 접대할 때나 오는 곳 아니냐. 결혼했을 때도 단둘이 오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땐 여기 오자고 했어도 뜯어말렸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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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서 다 예약해놨으니까 편하게 즐겨요.
- 상대가 넌데 어떻게 편해?
- 그럼 불편하게 생각해요. 난 그게 더 좋으니까.
- 뭐?

태연하게 물을 따르면서 재현이 말한다.

- 원래 불편하다는 게 그만큼 신경 쓴다는 거잖아요. 편한 사이보다 불편한 사이가 위험하다는 거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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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랑 나랑 위험해지는 일은 살기가 느껴질 일 말고 없어.

칼이 없는 게 아쉽네. 문대는 젓가락 하나를 바라본다. 이거로 최대한 힘주면 찌르는 건 될 수도.

- 일단 밥이나 먹을까요?

그래. 빨리 밥이나 먹고 헤어지자고.
70
한창 밥을 먹고 배가 부를 즈음, 재현이 운을 다시 띄운다.

- 좋아해요.
- ...
- 들었어요?
- 응. 그런데 못 들은 척 하려고.

아마 대화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거겠지. 배가 어느 정도 찬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아니면 먹은 걸 뱉어내게 하려고 저러는 거라고 비난해야 하는지.
71
- 받아줄 생각도 없고, 반지나 좀 빼지?
- 패션 반지라니까요.

자랑스럽게 왼손 약지를 보여주면서 패션 반지? 차라리 가운데 손가락에 끼고 욕을 하는 게 훨씬 낫다.

- 난 이해가 안돼.
- 응, 나도 너 이해가 안돼.
- 여보는 나 좋아하잖아요.
- 여보는 전화할 때나 쓰는 말이고.
72
식사를 아예 마무리하겠다는 듯 문대가 티슈를 뽑아 입가를 닦아내고 물을 쭉 들이켰다.

- 늦어도 너무 늦었어.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거 하나도 없다고.
- 그럼 나를 사랑했던 마음도 안 바꿨다는 거네.
- 이혼하기로 결심했던 그 마음이 안 바뀐 거지. 너 혹시 모자라?
73
재현도 밥을 다 먹었는지 수저를 내려놓았다.

- 솔직하게 나 싫어서 헤어진 게 아니었으니까요. 안 맞는다고 판단하면서 억지로 밀어냈잖아.

맞는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진리라고 한들 납득하기 싫고,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고 싶다.
74
- 좋아한다고 해서 어쩔 건데? 난 애정보다 혐오가 더 큰데.
- 누군 아닌 줄 알아요?
- 그럼 이해관계가 딱 맞네. 계산하고 헤어지자. 반지는 제발 버리고.
- 여보도 안 버린 반지를 내가 왜 버려요.
- ...

침실 서랍장 구석에 넣어둔 반지가 떠올랐다. 그래. 안 버렸다.
75
그렇다고 해서 미련이 뚝뚝 흘러 넘친다는 뜻은 아니다.

- 나도 당신이 제일 미워요. 그런데 왜 그러겠어.
- ...
- 아마 반지를 버리지 못한 이유랑 같겠죠.
- ...그런 이유 알고 싶지도 않아.

재현은 외투와 짐을 챙기며 슬슬 일어날 채비를 한다.
76
생각보다 짧게 끝난 대화에 문대가 의아해하면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함께 후다닥 챙긴다.

- 데려다 줄게요.
- 됐어. 집 가까우니까 걸어갈거야.
- 나 앞으로 회사에서 결혼했다고 해도 부정 안 할 거예요.
- 그러세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팀장님.
77
- 결혼 사진 액자에 끼워서 책상에 둬도 된다는 거죠?
- 미쳤냐?

재현은 먼저 일어나서 자연스럽게 문대의 손등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다. 입술이 닿은 부분부터 시작해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 박문대 대리님, 그럼 기회 좀 줄래요?
- ...
- 저랑 데이트해요.
- ...
- 나 진짜 진심이에요.
78
이렇게 해봤자 이미 끝난 사이에서 구질구질해질 뿐이다. 새롭게 사랑을 시작한다고 해도 신재현은 아니다. 그냥 내 마음이 안된다고 말하란다.

- 나도 진심이야.
- ...
- 싫어.

그러니까 그만 추해지자고, 제발.
79
-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문대는 머리가 아픈 건지 계속 관자놀이를 짚으면서 키보드를 두들긴다. 최근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컨디션이 안 좋을 수밖에 없다. 눈도 몇 번 깜빡이면서 몰래 불편한 티를 낸다.

- 대리님, 파일 한 번만 확인해주실래요?
- 네?
80
- 그거 내일까지 넘겨달라는데 혹시 오류가 있는지 확인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 ...아, 네

그런 건 좀 본인이 알아서 하면 안 되나. 하지만 굳이 싸우고 싶지도 않고 설령 그렇다 해도 따지고 들 기력도 없다. 대충 넘겨받고, 내일까지라니까 우선 본인 업무부터 끝내고 봐주려고 한다.
81
여차하면 내일 오전에 빠르게 넘기면 되니까.

- 대리님, 점심 안 드세요?
- 저 오늘은 생각이 없어서요.
- 커피라도 사다드릴까요?
- 아, 그래주시면 감사합니다.

점심 챙겨먹기도 번거롭고, 그냥 책상에 엎드려서 잠시 쉬다가 다시 오후 업무 시작.
82
겨우 커피로 정신줄 잡으면서 칼퇴각만 노리는데, 자꾸 고장난 가전제품을 수리하듯 이마를 콩콩 치게 된다.

- 자기야, 오전까지 보내달라고 한 파일 어떻게 됐어요?
- 네, 네?
- 오전까지 차트 정리해서 보내달라고 했잖습니까.
- 그... 그게,
83
아? 고요한 사무실에서 갑자기 들리는 대화소리에 문대가 돌아본다.

- ...바, 박 대리님한테 넘겨드렸는데.

뭐?

- oo씨한테 드린 건데 그게 왜 박 대리님한테 가있어요.
- 차트 한번 검토해주신다고 하셔서...
84
갑자기 머리가 더 지끈거린다. 니가 봐달라며, 니가. 엄한 꼴 당하겠다 싶어서 문대가 한숨 한번 푹 쉬고 말한다.

- 검토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저는 내일까지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후에 제 업무 끝나고 봐주려고 했구요.

흐음. 재현이 발발 떠는 사원과 문대를 번갈아 바라본다.
85
대충 무슨 상황인지 다 파악됐다.

- 일단 최대한 빨리 오늘 안에 넘겨주세요.

하. 문대는 안 그래도 제 일도 못 끝냈는데 남의 것을 먼저 봐주게 생겼다. 자칫하면 야근할지도 모른단 생각. 짜증에 피로감이 쌓이며 두통이 더 몰려온다.
86
4시. 일단 급하다는 것부터 얼른 넘겨준다. 그와중에 차트에 오류가 생각보다 있어서 열이 나더라. 일처리를 이렇게 하는데 어떻게 이 회사에 입사한 건지. 본인이 입력하면서 확인도 못 하나?

- 아까 난감하셨겠어요.
- 아,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87
머리를 잠깐 식힐 겸, 탕비실에 들러서 물이나 따르는데 동료가 말한다. 적당히 대답하는데 어째 숨쉬기 벅찬 느낌이다.

- 근데 혹시 아프세요? 볼이 되게 빨개요.
- 아... 머리가 좀 아파서 그런 가봐요. 퇴근하고 집 가서 쉬면 괜찮아질 걸요.
- 저 두통약 있는데 드릴까요?
88
- 아, 괜찮아요. 어차피 곧 퇴근인데.
- 퇴근한다고 다 낫는 게 아니잖아요. 자리에 계시면 찾아서 갖다드릴게요.
- ...감사합니다.

문대는 찬물을 한번 쭉 들이키고 텀블러에 가득 담아간다. 다시 자리에 앉는데 어째 뭔가 더 어지러운 느낌이다. 그냥 단순한 스트레스가 아닌 건가.
89
얼굴이 빨갛다는 말이 생각나 제 뺨을 만져본다. 뜨거운 건가? 잘 모르겠다.

- ...박 대리님!
- 네?
- 이거, 약. 얼른 먹어요.
- 아, 감사합니다.

바로 약을 찾아서 건네준 덕에 문대는 얼른 물과 함께 삼켜낸다.
90
바로 나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나을 거라며 문대는 다시 일에 집중한다.

- 오늘은 다들 여기까지하고 퇴근할게요. 박 대리님은 일단 세이브 파일만 넘겨주세요. 나머진 제가 할 테니까.
- 고생하셨습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91
바로 퇴근시켜준다고 하니 모두가 좋아하는데 문대는 열심히 일하다가 어리둥절한다. 정신이 어지러워서 헛소리를 들은 건가. 다시 말해달라는 듯이 재현을 바라본다.

- 자기야.
- ...
- 파일 넘기고 퇴근해요.

그러니까 왜. 오늘 회사에 큰 행사라도 있대?
92
- 아뇨, 이거 금방 끝나니까 얼른 하고 퇴근할게요.

그래도 일단 거절한다. 재현이 아니더라도 남한테 제 일을 떠맡기는 성격은 아니다. 모두 퇴근하면서 어수선한 틈을 타 재현이 다가와 조용히 말한다.

- 여보.
- 호칭 똑바로 안 하세요?
- 그래요, 자기야.
- ...
- 아프면 얼른 가서 쉬어요.
93
아픈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앓는 소리 낸 적도 없는데. 머리를 너무 많이 두들겼나. 그런 문대의 표정을 읽어낸 재현이 대답한다.

- 반지 주고받아 본 사이면, 이 정도는 기본이에요.
- ...
- 데려다줘요?
- 아뇨, 됐습니다.
94
얼른 파일을 정리해서 보내고 문대는 짐을 챙긴다. 책상에 손을 짚고 일어나는데 이상하게 온몸이 떨린다.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약을 먹어도 이 정도라니.

- 기다려요.

재현이 가볍게 어깨를 눌렀을 뿐인데 문대가 힘없이 풀썩 앉는다.
95
- 데려다줄게.
- 필요없다고.
- 앓아 누워서 회사에 필요 없어지고 싶은 거 아니잖아요. 그냥 말 듣는 게 낫지 않나.

...말을 꼭 저렇게 하냐고. 이러나저러나 안 그래도 몸에 힘이 없어서 이 상황에서는 절대적인 약자다.
96
문대는 허튼 수작 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한번 노려보고 가방을 끌어 안은 상태로 앉아서 기다린다.

-

얌전히 차에 올라타는 동안에도 재현은 별 말을 안 한다. 정말 데려다주는 것 외에 아무 의도도 없다는 것처럼 군다. 그런갑다 하면서 문대는 잠시라도 편히 기댄다.
97
- 어디로 내려줘요?
- 뭐가.
- 집 주소.
- ...
- 안 알려줄 거잖아.
- ...
- 우리집으로 가요?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맞다. 그걸 잊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머리가 아프면 그런 것도 잊어버리는 건지. 집 근처에 있는 건물이라도 대야 하나. 그래봤자 어차피 또 들키겠지.
98
문대는 느릿하게 팔을 뻗으며 손바닥을 내보인다.

- 핸드폰 줘봐. 내비 찍게.

마음을 열어준다거나 그런게 아니다. 그냥 사리분별이 안되기도 하고. 정말...

- 여기 맞아요?
- 어, 출발해.

아무 의미 없는 거다.
99
-

다음날, 문대는 집 가자마자 푹 잔 덕분인지 머리가 확실히 맑아졌다. 너무 오래 잔 탓에 몸이 좀 뻐근하긴 했지만, 간만에 깊은 잠에 빠져든 덕에 제법 좋았다.

- 오늘은 괜찮아보이네?
- 네, 약 챙겨주신 덕분이에요.
- 아니에요, 진짜 별 거 아닌데요.
100
어제 약 챙겨준 동료와 출근해서 잠시 담소를 나누는데 팀장인 재현이 출근하면서 뭔가 잔뜩 챙겨왔는지 사원들에게 하나씩 건넨다.

- 아침이니까 다들 힘내라는 의미로 마시고 시작해요.

자양강장제를 하나씩 건넨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문대에게는 두 개를 준다.
101
- 팀장님.
- 오늘 하루도 화이팅합시다.

말을 끊으면서 재현은 손을 뒤로 빼서 상표가 보이도록 병을 돌려준다. 그러니까 하나는 감기약이다.

- ...아.

문대는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먼저 따서 마신 후 개인 쓰레기통에 우선 넣어둔다. 감기는 거의 다 나았지만 말이다.
102
점심 시간. 간만에 담배를 피러 가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간 문대. 근데 막상 올라가놓고 라이터를 두고 온 게 생각났다. 그렇다고 다녀오긴 귀찮고. 문대는 아쉬움에 몇번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바람이나 쐬기로 한다.

- 담배 끊었어요?
-아뇨, 라이터가 없어서요. 가지러 갔다오긴 번거롭잖아요.
103
언제 있던 건지 재현이 물었다.

- 감기는 다 나았고?
- 네. 배려해주신 덕분에요.

그래도 이 정도 감사는 당연히 표현해야지.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데 왼손이 또 눈에 띈다. 여전히 반지가 끼워져 있다.
104
- ...반지 진짜 안 빼십니까.
- 벌써 낀 지 일주일 넘은 거 같은데요.
- 이제 뺄 때 됐네요.
- 제 손가락에 반지가 없으면 허전하다는 거죠.
- 다른 거 사드려요?
- 커플링 새로 맞추자구요?

그런 이야기가 아닌 거 뻔히 알 텐데.
105
-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비집고 들어오려고 하시네요.
- 그렇게 느껴지면 다행이네요.
- 됐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 갑자기?
- 덕분에 집 구석에 처박혀 있던 반지를 오늘 안에 버려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럼 저는 먼저 업무 때문에 내려가보겠습니다. 문대는 빠르게 대화를 마치고 가버린다.
106
그렇게 말해놓고 남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커피를 사들고 사무실로 돌아간다.

- 대리님, 그거 들었어요?
- 어떤 거요?
- 이번 주 금요일에 마케팅 팀 전체 회식 한대요!
- 네?
107
...대체 회식이란 뭘까.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데 의무적으로 한 달에 한 번은 모두가 회식을 외친다. 막상 다같이 술 마시면 즐기는 듯 하다가도 모두가 다음 날 피곤에 쩔어서 죽어가면서 진짜 왜.

- 아까 우연히 복도에서 1팀 이야기 들었거든요. 아마 팀장님 오시면 말해주실 것 같아요.
108
- ...그렇구나. 알겠습니다.

벌써 금요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빌게 됐다.

그리고 점심시간 끝. 정말 소식 들은 대로 재현이 오후 업무 시작하기 전에, 말해주더라.

- 이번 주 금요일에 마케팅 전체 회식 있습니다. 다들 일정 빼놓으세요.
109
어제의 두통이 금요일에 찾아왔다면 그럴싸한 이유로 빠질 수 있었을 텐데. 어휴.

퇴근하고 문대는 집에서 혼자 저녁을 챙겨먹은 후, 쓰레기를 정리한다. 종량제 봉투를 묶어두고, 잠시 고민한다. 지금 버리고 올까. 아니면 출근하면서 버릴까.

- 지금 가자.
110
아무래도 아침이 되면 또 잊어버릴 수도. 생각난 김에 얼른 다녀오자며 다시 가볍게 외투를 챙겨입다가 그만 소매 끝이 서랍장에 걸린다.

- 아.

적당히 올이 나가지 않게 빼내는데 서랍장이 함께 열린다. 덜컹거리면서 안에 밀어넣어진 물건들이 훅 튕겨나오는데, 문대가 보자마자 한숨을 쉰다.
111
- x발...

그래, 맞다. 오늘 집 가면 반지 버리기로 했다. 문대는 잠시 고민한다. 쓸데없이 왜 아직까지도 반짝거려. 반지를 챙겨서 묶어둔 종량제 봉투 틈새로 넣어버린다. 금으로 되어있어도 그게 알 바인가. 팔기 위해 돌아다니는 시간도 아까워.
112
문대는 집 앞으로 나와 종량제 봉투를 툭 던져놓고 그 앞에 서있는다. 이미 쓰레기 사이로 파묻혔지만, 꺼내면 다시 빛날 생각에 기분이 나쁘다. 그래, 진짜 미련 버리자. 곧바로 발걸음을 돌린다.
113
-

금요일. 회식 날. 문대는 제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길 바랐다. 안타깝게도 제 일상은 언제나 똑같았다. 그저 평범했다. 차라리 오늘 안에 끝내야 하는 업무가 생겨서 본인만 사무실에서 야근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 오늘 다들 회식인 거 아시죠? 그 전까지 다들 힘내서 일합시다.
114
회식 생각하니까 더 힘이 안나는데 말이지. 그래도 분위기를 올리겠다고 박수를 치는 재현의 손을 보는데,

- ...

그래, 반지 버린 건 역시 최고의 선택이었다. 더 이상 저놈의 약지에 있는 것과 똑같은 물건은 없으니까.
115
퇴근. 다 함께 회식 장소에서 만났다. 적당히 건배사를 한 후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신입사원도 아니고, 팀장도 아니었다. 적당히 눈에 띄지 않는 중간이라서 술을 어느 정도 흘리는 것도 가능했다.

- 박 대리님! 한 잔 받으세요!
- 아, 네.
116
그냥 얼른 시간이 지나길 바라면서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만 한다.

한창 술을 주거니 받거니, 문대는 눈치껏 잠시 화장실로 간다. 손을 씻으면서 거울을 보고 매무새나 정리한다. 취할 만큼 마시지도 않아서 흐트러진 부분은 거의 없었다.
117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손잡이를 만지기도 전에 알아서 열리더라.

- ...
- ...

누가 문을 여나 했더니 재현이었다. 그런데 딱히 입을 열지 않고 뭔가 마음에 안든다는 듯 인상을 좀 찌푸리더니 문대를 지나친다. 그런데 그 순간에 술냄새가 훅 났다. 취했나?
118
그렇게 다시 회식. 제법 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얼굴이 벌게졌다거나, 목소리가 커졌다거나, 아니면 휘청거린다거나. 그런 식. 문대는 슬슬 집에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좀 더 지났을까.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누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든다.

- 혹시 신 팀장님 댁 어딘지 아시는 분!!!
119
뭐? 누구? 설마 마케팅 2팀 신재현 팀장? 문대가 그쪽 테이블을 바라보는데 턱을 괸 채로 깜빡거리면서 자꾸 넘어지려 한다.

- 세상에, 팀장님 취하셨어요?
- ...나 팀장님 취하신 거 처음 봐.
- 어떡하죠? 팀장님 오늘 회식한다고 차는 회사에 두고 오셨죠?
120
남들 앞에서 망가지는 모습 절대 보여주지도 않는 신재현이 이렇게 사람 많은 회식 자리에서 취했다고? 문대는 거짓말이라고 여겼다.

- 팀장님 댁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것 같은데...
- 결혼했다고 하셨는데 혹시 가족분 부를 수는 없으려나.
121
결혼. 또 열받게 하네. 문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현의 테이블로 간다. 기울어지는 재현의 몸을 받아주면서 한숨을 크게 쉬고 말한다.

- 저 팀장님 댁 어딘지 알아요.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 대리님 알아요???
- 어떻게 알아?
- 그냥, 뭐... 저번에 출장 때문에 좀 알게 됐어요.
122
적당히 둘러대고 재현을 부축한다. 진짜 x발. 더럽게 무겁네. 대체 어울리지도 않는 짓은 왜 한 거야. 아무리 회식이라지만 술을 뺄 줄 모르는 놈도 아니면서 얼마나 받아먹었길래.

- 그럼 고생해.
- 문대씨 먼저 들어가!!
- 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123
문대는 빠르게 택시를 잡고 재현을 뒷좌석에 던지듯이 태워버린다. 주소만 기사한테 불러주면 알아서 계산하겠지.

- xxxx로 가주세요.
- 손님은 같이 안 타세요?
- 네?

널브러진 재현이 걱정된다는 듯이 택시 기사가 말하자 문대가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고 결국 그 옆에 같이 탑승한다.
124
택시비는 나중에 청구하겠다.

어떻게 잘 도착한 재현의 집. 내가 이 집을 또 오게 될 줄이야. 문대가 속으로 욕하면서 택시비를 결제하고 재현과 함께 내린다.

- 정신 좀 차려. 이제 집은 알아서 기어들어가.
125
똑바로 서라면서 문대가 중심을 잡아주자, 택시를 타고 오면서 잠시 잠이 깬 건지 재현이 몇 번 눈을 감았다 뜬다. 앞에 있는 사람이 문대인 걸 확인하더니 고양이마냥 부비적거리면서 문대의 쇄골 부근에 얼굴을 파묻는다.

- 집 들어가라고 했다.
- 문대 씨...
- 야.
- 자기야...
- ...
- ...여보야.
126
술버릇 한 번 지독하네. 애초에 술냄새가 많이 난다고 해서 정말 취한게 맞긴 할까. 사실 여기까지 끌고 오려고 수작 부린 건 아닐까. 여전히 의심을 거듭한다.

- 신재현 팀장님. 회식 끝났구요. 빨리 집 들어가세요.

얼른 현실로 돌아오라는 듯 또박또박 말해준다.
127
밀쳐내면 뒤로 넘어질까봐 차마 양심이 있어서 그러진 못하겠고. 대신 손으로 툭툭 친다. 그러면 재현이 주머니에서 뭔가 부시럭거리면서 꺼낸다.

- ...버리지 마요.
- 뭘요.
- ...이거.
- ...
128
손가락 사이에 차가운 금속이 느껴졌다. 문대가 흠칫하며 확인한다.

- 야, 너...

얼마 전에 버렸던 반지. 이거 분명히 종량제 봉투에 쑤셔넣었는데. 왜 얘가 가지고 있어? 재현은 취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 ...그리고 나도 버리지 마.
129
실로 오랜만에 끼워진 반지는 여전히 제 손에 꼭 맞아서 쉽게 빠지질 않았다. 문대는 재현을 내치는 것이 힘들었다. 동정? 애정? 양심? 확실하게 정의 내릴 수 없었다.

- 일단 팀장님 진짜 많이 취하셨어요. 걸어들어가실 수 있어요?

굳이 정의하지 않기로 했다. 복잡한 문제에 파고들기 싫었으니까.
130
- 같이 돌아가면 안 돼요?

정말 취한 게 맞긴 한가 보다. 출장갔을 때 했던 어설픈 주정이랑 차원이 다르다. 여전히 제게 기대고 있는 재현을 떨어뜨려놓으려 한다.

- 집 안에 들어가는 것만 보고 갈게요, 그럼.
131
두고 가면 집이 코앞인데 땅바닥에서 잘 것 같았다. 걸어갈 정도로 부축하면서 데려간다. 여전히 오늘도 바뀌지 않은 비밀번호. 문대는 직접 문을 열고 현관에 던지듯이 재현을 내려놓는다.

- 신발 벗고 옷도 갈아입으세요.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 ...
- 저기요, 팀장님.
132
눈을 감고 있는 재현의 볼을 가볍게 툭툭 건드린다. 느릿하게 눈을 뜬 재현이 문대를 확 끌어당기며 제 위로 넘어뜨린다.

- 야, 야!!!

...진짜 넌 다시는 술 이렇게 마시지 말아라. 문대가 어떻게든 벗어나서 결국 신발을 벗겨준다. 이게 무슨 짓이야. 거의 질질 끌듯이 일으켜서 침대에 던져둔다.
133
- ...

어떻게 가구가 배치부터 물건까지 바뀐 게 없냐. 문대는 침대 옆에 놓인 액자를 들어본다. 결혼 사진. 속이 뒤틀린다.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빼내서 액자 앞에 두고 액자는 사진이 보이지 않게 엎어버렸다.
134
-

재현은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자신이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부터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술을 마신 게 처음이었지만, 필름이 끊기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버리지 마요.]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기억한다는 소리였다. 거짓도 아니고 진심이었으니 후회하진 않는다.
135
그저 그 말을 들었을 때 박문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고개를 돌렸다.

- ...

건드린 적이 없던 결혼 사진이 보이지 않게 엎어져 있고, 그 앞에 반지가 있었다. 제 손가락을 살폈다. 멀쩡하게 끼워져 있었다. 저건 제것이 아니었다. 재현은 다른 반지도 함께 옆에 두었다.
136
-

- 좋은 아침이에요
- 팀장님, 안녕하세요!
- 금요일엔 잘 들어가셨어요??

월요일. 재현은 출근했다. 만취했던 그를 걱정하는 사원들에게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문대는 아직 출근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날 이후로 감사를 담은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137
문대는 아슬아슬하게 1분 전에 출근했다. 월요일은 역시 다른 날보다 유난히 출근길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가볍게 어깨를 두들기면서 컴퓨터부터 켰다.

- 박 대리님, 커피 드세요.
- 네?
- 회식 때 고생하셨으니까 커피 드린다구요.

재현이 기다렸다는 듯 커피를 건넸다.
138
문대는 받으면서 뭔가 떨떠름했다. 어딘가 이상한 것 같은데.

일단 커피를 마시면서 일하는데,

- 박문대 대리님, 파일 하나 보냈는데 다시 확인 부탁해요.

- 박 대리님, 오늘 안에 그거 가능해요?

아, 이상한 부분을 알아냈다.

- 박 대리님.

그는 나를 더 이상 자기야 라고 부르지 않는다.
139
그래서 모든 사원들한테도 평등하냐고? 아니. 그냥 나한테만.

- 자기야, 여기 이상한데.

눈치를 채달라거나 엿 먹으라는 의도가 아닌 것 같았다. 왜냐면 반지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버리지 말아달라더니. 정작 본인이 버렸잖냐.
140
- 대리 님, 오늘도 혹시 아파요?
- 네?
- 그냥 표정 안 좋아보이실래 아프시다면 약 드리려구요.
- 아, 진짜 괜찮아요. 월요일이라 피곤했나봐요.
- 하긴 직장인들한테 월요병은 어쩔 수 없죠.

싫다며. 그렇게 싫다고 계속 밀어냈잖아. 저쪽에서 떨어져 나가줬는데, 뭐가 문제야.
141
결혼 사진 간만에 다시 봤더니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어?

- 여기 차트 완전 뒤죽박죽인데요...?
- 네???

대체 얼마나 엉망이면 사소한 거에서 실수까지 하는 거냐고.

-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안에 다 수정해서 내일 다시 넘겨드릴게요.

결국 야근 확정이다.
142
모두가 퇴근한 와중에도 문대는 낮에 실수했던 부분들을 하나씩 다 체크하면서 수정 중이다. 누구 탓할 것도 없다. 정신을 빼놓고 일한 제 탓이니까. 저녁은 얼른 끝내고 집에서 늦게라도 먹으면 될 일이었다.

- ...에휴.

사람이 없다는 것은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143
꼭 대화로만 인기척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보니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분위기가 혼자임을 실감나게 했다.

- 아으,

잠시 기지개를 켜며 탕비실로 갔다. 어느새 비워진 텀블러에 물을 다시 가득 채우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다. 우득거리는게 역시 오래 일하긴 했다고 느낀다.
144
정말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데,

- ...뭐하세요?
- 아.

몰래 들르려고 했던건지 딱 걸렸다는 듯 재현이 짧게 탄식하다가 자연스럽게 들고 있던 것을 내보였다.

- 저녁 안 먹었죠?
- ...네, 뭐.
- 야근하는데 힘내요. 두고 갈게요.
145
재현이 정말 두고 가기만 하고, 문대는 내용물을 확인한다. 이걸 어떻게 혼자 다 먹으라고. 취향껏 골라먹으라고 하지만, 양이 너무 많은 건 아닌지.

- 저기요, 팀장님.

사무실을 나가려는 재현을 붙잡는다.

- ...저녁 드셨어요?
146
- 아직 안 먹었는데 왜요?
- ...

어서 다음 말을 해달라는 듯 재현이 빤히 바라보았다. 문대는 괜히 봉투를 부시럭거리며 소리를 냈다. 그냥 되는대로 아무거나 집어서 보여주었다.

- 이거.
- ...
- ...좋아하시잖아요.
147
사실 신재현이 가리는 음식은 없다. 그렇기에 이게 헛소리임을 아주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재현은 퍽 웃음을 터뜨렸다.

- 나 거절 안해요.
- 그러시든가요.

탕비실에서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뭔가 어색했다. 차라리 저번에 한정식 집이 더 나았다.
148
사람이 어색함을 느끼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냥 심경의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 먹는 양이 줄어든 것 같네요.
- 누구랑 먹어서 안 들어가는 거야.
- 먹자고 한 건 당신이면서.
- 애초에 이렇게 많으면 다 못 먹어.
149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보면 식탁에서 깨작거리기 말라고 잔소리할 수준이었다. 젓가락으로 콕콕 찌르듯이 찔끔찔끔 먹었다.

- 요즘 말 잘 듣네.
- 어떤 거요?
- ...그냥 이거저거.

차마 반지도 안 끼고, 자기야 소리도 관뒀다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충 흘렸다.
150
- 자기.
- ...
- 이거 말하는 건가?

크흠. 문대가 헛기침을 한다.

- 역시 남들한테도 자기야 라고 한다고 해서 당신한테도 호칭을 통일할 필요가 없겠더라구요.
- 그래.
- 그쵸, 여보?
- ...
151
그래, 곱게 넘어갈 인간이 아니었지. 문대는 대답하지 않는다. 어느새 밥을 다 먹고 쓰레기를 치우자 재현이 묻는다.

- 일 얼마나 남았어요?
- 금방 끝납니다.
- 그럼 기다릴게요, 데려다줄게.
- ...그러라고 집 주소 알려드린 거 아닙니다.
- 난 이러려고 알아낸 거 맞는데.
152
문대는 재현을 노려보려다가 만다. 그래, 다 무슨 소용이겠어. 기다리고 싶으면 어디 한번 기다려보라며, 문대는 그냥 자리에 앉는다. 다시 모니터를 키고 일하기 시작하는데,

- 기다릴거면 본인 자리에서 기다리세요. 일 많으시잖아요.
- 급한 건 아니라서요.
153
- 상사가 이렇게 관심가지는 거 부하직원들이 제일 싫어하는 거 알아요?
- 여보는 나 상사라고 생각 잘 안 하잖아요.
- 제가 그렇다고 회사에서 이름 불렀습니까?
- 반말은 많이 했죠.

차라리 일을 빨리 끝내고 말지. 문대는 속력을 올린다.
154
어떻게든 시선을 무시하고 열심히 한 결과 30분 뒤에, 컴퓨터를 껐다.

- 수정할 것도 없네요.
- 그와중에 그건 또 보셨습니까?
- 바로바로 말해주면 나중에 고칠 것도 없잖아요.
- 아, 예...

어쨌든, 이제야 퇴근. 재현과 함께 지하로 내려가서 자연스럽게 차에 탄다.
155
- ...경로 저장해놨어?
- 당연하죠.
- 그럴 것 같았어.

찍어줄 필요도 없었다. 알아서 출발하라며 안전벨트부터 맸다.

퇴근길이라면 막히기 마련인데, 확실히 야근하긴 했나보다. 보통 시간보다 도로에 차가 적었다. 밥을 먹기도 했고, 늦게까지 일을 했다보니 졸음이 쏟아졌다.
156
문대는 꾸벅 졸다가 그만 청색 신호에 맞춰 출발하는 차 덕분에 머리를 콩 부딪쳤다.

- ...
- 많이 아파요?
- 아니.

사실 제법 아프다. 문대는 몰래 부딪친 부분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157
- 그런 거 보면 참 귀여운 것 같아요.
- 그런 의도는 하나도 없었는데.
- 의도하지 않았는데 귀여워 보이는 건 내가 당신 좋아한다는 거죠.

말 한 번 참 어떻게든 낯간지럽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집이 먼 건 아니라서 금방 도착해 문대는 내린다.
158
-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말하는데, 재현은 그냥 내린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 뭐라구요?
-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 그래요.
- 야.

지난 주에 그런 일도 있었고, 계속 얼굴 볼 사이라 그런가. 그냥 문대는 물어보기로 했다.
159
- 정말 아직도 나랑 다시 시작하고 싶어?
- 당연히.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칼같이 대답했다. 신재현은 안되는 일에 깔끔하게 포기하고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매달렸다. 스스로를 바꿔서라도 쟁취하고 싶다거나 불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160
- 우리 이제 나이도 많아. 그럴 여유 없어.
- 그러면 이게 마지막이잖아요.
- ...
- 마지막 연애야.
- ...
-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연애할 때 그 상대가 당신이면 좋겠어요.

연애? 너랑 내가 다시 연애? 연애 시절이 이제는 까마득해서 그때 어떻게 사랑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161
- 그러다 또 헤어지자고 하면?
- 그럼 내가 또 붙잡는 거죠.
- ...
- 그렇게 계속 붙잡으면서 어떻게든 이어가면
- ...
- 결국 서로의 마지막이 될 수 있잖아.

이렇게 간절하면서 왜 그때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도장을 찍은 건지. 이제와서 다 소용없는 이야기일까.
162
그래서 나는 신재현을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솔직하게 말해서 안 맞아서 헤어진 거지, 누구 하나 잘못했다고 할 것도 없었으니까.

- 너가 데이트 하자고 했었지.
- 네.
- ...하자.
- 네?
- 한 번 해보자고.
- ...
- 연애는 아니고, 하여튼 그...
163
재현이 웃는다. 서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며 탐색의 의미라고 해도, 괜찮았다. 그거면 됐다. 허리를 살짝 굽히며 손을 내밀었다.

- 이렇게 데이트 신청할까요?
- 낯간지럽게 뭐하는 짓이야.
- 아무래도 연애하는 사이는 아니니까 포옹이나 키스는 이르잖아요.
- ...어이가 없어서.
164
연애 초반에도 이렇게 안했던 것 같은데. 이러니까 또 새로운 것 같기도 하고.

- 이번 주 주말 어떠세요, 박문대 대리님?
- 네, 시간 빕니다. 알아서 하세요.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었다. 손을 한 번 잡아주자 재현이 말했다.

- 고마워요.

기회를 다시 줘서.
165
-

다음 날에도 큰 변화는 없다. 사적인 관계에서 변화가 조금 있을 뿐, 표면 상으로는 직장 동료니까.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하고,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낼 뿐이다.

- 다들 커피 한 잔씩 하세요.

아주 약간 다른 점이 있다고 하면,

[점심 같이 먹을래요?]

이런 정도랄까.
166
점심시간.

- 대리님! 새로 생긴 식당 가보려는데 같이 가실래요?
- 아뇨, 저 이미 먹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요.
- 아, 그래요? 그럼 다음에 같이 가요!
- 네.

동료들의 식사 제안도 거절하고 재현과 함께 밥을 먹는다. 문대는 괜히 툴툴거린다.
167
- 데이트는 분명 주말이었는데 너무 성질 급한 거 아닙니까?
-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는데 나를 선택해준 건 당신이구요.
- ...
- 그래서 싫어요?
-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한창 밥을 먹다 보면 재현이 물어본다.

- 최근에 영화 봤어요?
- 딱히 볼 시간도 없었습니다.
- 그럼 주말에 영화나 봐요.
168
영화 안 본지 진짜 오래 됐는데. 그렇다고 문화생활을 엄청 즐기는 성격도 아니다. 영화라... 영화...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 걱정하면 재현이 말한다.

- 당신이랑 함께 하는데 뭔들 싫겠어요.

크흠. 문대는 일부러 수저가 부딪치는 소리를 크게 내며 남은 음식들을 싹싹 긁어먹는다.
169
-

그렇게 주말. 오전부터 문대는 깔끔하게 꾸미고 집 앞으로 나온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왔지만, 상대는 훨씬 더 일찍 나왔다는 듯 차에 기대어 나오는 문대를 맞이한다.

- ...대체 몇 시부터 기다린 거야?
- 글쎄요?
- 설마 잠도 안 잤어?
- 누구랑 데이트하는데 잠이 오겠어요?
170
그래서 몇 시부터 기다린 건데... 괜히 물어봤자 또 엉뚱한 대답을 할 것이라며, 문대는 자연스럽게 차에 탄다.

우선 점심부터 먹은 후 영화관. 직접 무엇을 볼지 고민하면서 영화 티켓까지 사셨다고 하니, 얻어먹기만 할 수 없다며 문대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기로 한다.
171
팝콘 사면 다 먹기는 하려나. 바로 직전에 점심을 먹었는데.

- 굳이 안 사도 되는데요.
- 얻어먹기 싫어서 그래.
- 빚지는 거 같아서?
- 응. 나중에 뭐라도 해줘야할 것 같잖아.

대충 주문하고 결제하기 위해 카드를 내미는 문대를 막고 재현이 냉큼 제 카드를 내민다
172
아니, 야. 막을 새도 없이 이미 알바생은 재현의 카드로 결제를 끝내버렸다. 카드를 돌려받은 재현이 말한다.

- 그럼 계속 잘해줘야겠다.
- ...
- 그렇게라도 나를 만날 생각이 들 거 아니에요.

대체 뭔... 문대는 뺨을 긁적이면서 팝콘통을 품에 안고 영화관으로 들어간다.
173
광고 시간도 지나고 본격적으로 영화에 시작했을 때 재현이 옆에서 툭툭 친다.

- 왜.

콜라를 마시다 말고 작은 목소리로 묻자 재현은 문대가 다른 한 손으로 끌어안고 있는 팝콘통을 가리킨다.

- 이거 달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문대가 넘겨준다.
174
뭐 이런 걸 가지고. 손 뻗으면 닿을 수준인데 굳이 가져가고 싶었나? 별다른 의도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재현은 냉큼 문대의 빈 손을 잡는다.

- ...

그러니까 여태 잡고 싶어서 눈치를 봤는데 양손이 바빠서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175
어린애 같기는. 문대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자 재현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에? 문대가 바라보자 재현이 말한다.

- 좋아서.

-

영화까지 잘 보고, 정말 평범한 데이트 코스를 즐기면서 재현과 하루를 보냈다. 사실 거창할 것도 없어서 내내 긴장이 되었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176
- 저녁 먹기에는 조금 이르네요. 게다가 팝콘 먹은 것도 아직 소화 잘 안됐죠?
- 아무래도.
- 가볍게 드라이브하는 겸 집으로 데려다줄까요?
- 그래.

드라이브는 생각을 정리하기 딱 좋았다.
177
같이 탄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며 교감한다기 보다, 창을 열고 바람을 쐬면서 누구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게 그러했다.

- 생각보다 되게 빨리 도착했네요.
- 아무래도 우리가 놀이공원 같은 먼 곳을 간 게 아니잖아.

멀리 나간 것도 아니었다. 제법 짧은 코스에 재현이 조금 아쉬운 소리를 냈다.
178
- 고생했어.
- 이게 무슨 고생이에요.

하여튼. 그냥 아침부터 차 끌고 나오느라 고생한 거라며, 문대가 손을 흔든다.

이제 집에 들어가보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해봤자 어차피 재현이 따라 내릴 것을 알기에 말로 인사하진 않았다.

- 줄 거 있어요.
179
차에서 내리자마자, 예상대로 같이 운전자석 문을 열고 나온 재현이 이야기한다.

- 뭘?

재현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트렁크를 열어서 안에 숨어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 ...이게 뭔,
- 데이트할 때 원래 이런 거 주잖아요.

꽃다발이었다. 실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180
고작 데이트가 뭐라고 이런 걸 다 준비한 건지.

- 음, 그러니까...
- ...
- 우리 다음 주에도 만날래요?
- ...
- 나 지금 한 번 더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문대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문대는 잠시 머뭇거렸다. 거절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181
그냥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오랜만... 아니, 사실 처음일 수도 있었다. 그만큼 낯설었다.

- 다음 주에는 뭐 하시려고?
- 뭐... 놀이공원이라도 갈까요?
- 엥?
- 늦게까지 함께 있을 수 있다면서요.

아까 그 말이 그렇게 되나. 신재현이랑 놀이공원? 진짜 왜 이렇게 쉽게 상상이 안 되는 건지.
182
- 너 머리띠 씌울거야.
- 그래요.
- 버블건 사서 들고 다니라고 할 거야.
- 마음대로요.
- 페이스 페인팅도 시키고, 유치한 거 잔뜩 하라고 할 거야.

물론 정말 시킬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자신도 별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일부러 놀리기 위한 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재현은 다 받아들였다.
183
- 그 유치한 모든 게 당신 로망이라고 한다면,
- ...
- 난 그걸 이뤄주는 게 내 로망이니까요.

너와 내 사이를 대체 누가 이혼한 사이라고 여길까. 내 스스로 느끼기에도 풋풋하기 그지 없는데.

- 그래서 안 받아줄 거예요?
184
여전히 제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을 문대 쪽으로 다시 기울였다. 그제야 문대가 꽃다발을 받았다. 훅 하고 꽃향기가 났다.

- 그래요, 신재현 팀장님.
- ...
- 우리 다음 주에 또 만납시다.

문대는 확실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185
-

그렇게 직장인들은 피할 수 없는 월요일이 또 찾아온다. 주말을 어떻게 보냈든 간에, 월요일이 기분 좋을 수는 없다. 문대도 똑같았다. 기묘하게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감에 입을 가리고 일부러 하품을 크게 했다.

- 아으...

그러다가 척추 부근에서 우득하는 소리가 난다.
186
주말에 너무 푹 쉬어서 그런 탓일지도. 깜빡 졸음이 쏟아질 상황에 재현의 박수 소리에 문대가 퍼뜩 잠에서 깬다.

- 다음 주 워크샵 있는 거 알죠?

...아?

- 두 달 전부터 이야기 했고 저번에 장소 예약도 끝났는데 혹시 잊었을 것 같아서 말합니다.
187
그래, 잊은 사람이 바로 나다. 워크샵 관련으로 맡은 건 없고 그저 같이 가기만 하면 되는 사원 중 한 명이라서 문제될 건 없었지만, 어쨌든 잊고 있었다.

- 어쨌든 월요일인데 다들 이번 주도 힘내봅시다.

덕분에 잠은 깼다. 그러게. 하도 정신이 없다보니까 생각을 지워버렸다.
188
물론, 나만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잊었던 터라 뭔가 갑작스럽게 일정이 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또다시 찾아온 주말. 묘하게 이번 주는 일이 고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쉬지 못하고 밖을 나섰다. 주말 출근? 그런 거 아니다.

- 잘 잤어요?
- ...글쎄다.
189
진짜 놀이공원에 간다. 30대 남자 둘이서 놀이공원을 간다. 다행히 오픈런을 뛰거나 그런 건 아니라서, 여유롭게 일어났다만, 황금같은 주말에 사람이 바글바글한 장소라... 어쩌면 출근이 더 나을 수도.

- 놀이공원 진짜 별로 안 좋아하네요.
- 사실 싫어한다기 보다는 그냥 그거 같아.
190
- 어떤 거요.
- 조합의 문제?
- 조합?
- 30대 남자 둘이서 놀이공원...
- 어디 뉴스 기사에 나올 것처럼 이야기 하네요.

나한테는 뉴스 기사 만큼이나 생소한 이야기니까. 어쨌든 도착하고 나서 천천히 입장한다. 열심히 놀이기구 줄 서기 위해 뛰어다니는 아이들 틈에서 산책하듯이 걸어다닌다.
191
- 여기 와봐.
- 왜요?
- 오라면 와.

재현이 다가가자 문대는 바로 동물 머리띠 하나를 씌운다.

- 풉.

와. 진짜 애 하나는 데리고 올 법한 남자가 동물 머리띠를 쓴 꼴이라니. 놀리기 위한 용도가 맞지만 진짜 우습다.
192
- 맞다, 이거 써달라고 했었지.
- 쓰고 다녀.
- 그럼 우리 대리님도 이거 써야죠.
- 아니, 나는 안 쓸 건데?
- 이런거 쓰고 다니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같이 쓰고 다니는 게 덜 민망하지 않을까요?
- 거기서 거기거든.
- 아무렴 어때요.
193
재현이 문대와 어울리는 머리띠 하나를 씌워주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한다.

- 너무 예쁜데.

...장소 탓인가. 그냥 내 마음이 어려지는 것 같다.

- 그리고 이것도 들고 다니라면서.

재현이 어느새 산 건지 장난스럽게 버블건을 들고 문대에게 뿌렸다.

- 야!!!
- 하하하!
194
결국 사이좋게 머리띠도 하나씩 하고, 지도를 보며 천천히 돌아다닌다. 놀이공원이라는 게 10대 때 소풍 이후로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롤러코스터가 어느 정도 재밌는지 기억도 까마득하고, 아이들이나 타는 놀이기구를 탈 수는 없었다.

- 시간은 많은데 그냥 눈에 띄는 거 타면 되죠.
195
- 진짜 놀이공원 오고 싶기는 했어?
-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데로 데이트 오겠어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 그럼 뭐든 타자.

-

모든 놀이기구를 정복하겠다는 목표가 없어서 그랬는지, 줄이 적은 걸 골라타면서 같이 있는 순간만 즐기다보니 벌써 해가 저물었다.
196
아침부터 신나게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부모의 등에 업혀서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 이따가 퍼레이드 있대.
- 보고 갈래요?
- 그래. 이거 먹고 가면 될 거 같아.

저녁을 먹고 잠시 화장실에 들러서 손을 씻었다. 물기를 닦아내고 있는데 옆에서 어린아이가 아빠를 붙잡고 묻더라.
197
- 아빠는 엄마랑 왜 결혼했어?
- 우리 아들은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할까?
- 그냥!
- 글쎄, 엄마랑 함께 하면 어딜 가도 재밌을 것 같아서?
- 무슨 말이야?
- 오늘 엄마아빠랑 놀이공원 와서 재밌지?
- 응!
- 아빠도 똑같은 거야.

핸드 드라이어가 꺼졌는데도 문대는 잠시 멍하니 손을 뻗고 있었다.
198
뒤에 있던 사람이 눈치를 주고 나서야 죄송하다며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재현이 퍼레이드가 시작했다며 어서 가자고 이끌었다.

- 이거 왜 사라고 했는지 알 거 같아요.
- 왜?

이번에는 버블건을 사람이 닿지 않게 공기 중으로 흩뿌렸다.
199
퍼레이드 조명에 반사되어 비눗방울이 너무 예쁘게 퍼졌다.

- 아무래도 당신은 가끔 이런 거에 약했으니까.

감성에 치우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때때로 분위기에 휩쓸렸다. 딱 지금 순간처럼.

- 예뻐서 잘 어울려.
200
문대에게 가까이 날아간 비눗방울 하나를 톡 건드려서 터뜨렸다. 정말 처음 연애했던 순간보다도 더 이전의 과거에 온 것만 같았다.

- 신재현 팀장님.
- 네?
- 아니다.
- ...
- 신재현.

항상 중요한 말을 할 때는 꼭 팀장님이라고 직급을 붙였다. 하지만 이번에 박문대는 선을 긋지 않았다.
201
- 말해요.

퍼레이드가 심히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형형색색의 조명이 눈부셨다. 모두가 기뻐하는 분위기에 함께 파도를 탄 것 뿐이었다.

- 너는...
- ...
- 아직도 내가 좋은 이유가 뭐야?

재현은 여전히 머리띠를 쓴 채로 고민했다. 이제 더 이상 저 모습이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202
아까 어린 아이의 대화가 생각났다. 재미 없는 짓이라도 함께 하기에 좋은 거라고.

- 나는 당신의 단점도 꼽으라고 하면 꼽을 수 있어요.
- ...
- 그런데 그 단점을 완벽히 덮어서 보이지 않을 만큼 너무 사랑하더라고.
- ...
- 좋아하는 이유보다는 그거죠.
- ...
-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203
다시 한 번 버블건을 세게 눌렀다. 비눗방울이 마구 흩날렸다.

- 내가 이런 걸 뭐 좋다고 귀찮게 손에 들고 다녔겠어요.

톡. 톡. 톡. 방울 몇 개를 또 터뜨렸다.

- 얼굴 전체에 물감을 칠하라고 해도, 당신 부탁이면 다 해줬을 텐데.

아. 이유는 없었다. 그저 너는 나 하나면 되었다.
204
이렇게나 사랑하면서 그때는 대체 왜. 과거에 억울했다. 그럼 이제 나는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그걸 정말 모르겠다.

- ...생각해볼게.
- 뭘요?
- 너와의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고.
- ...
- 당장 내일 결정이 날 수도 있고, 오래 걸릴 수도 있어.
- ...
205
- 그래도 기다릴 거야?

사실 이기적인 이야기였다. 정해진 기한도 없이 언젠가는 답을 들려줄테니 기다리라니. 시간을 낭비하라고 무려 신재현에게 요구했다.

- 얼마든지.

물론 재현은 제게 긍정적이라면 얼마가 걸려도 상관 없었다.
206
-

집으로 돌아와서 문대는 하루종일 밖에서 걸어다녔다고 씻자마자 바로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 머리를 댄 순간 귀신같이 잠이 밀려왔다. 등을 돌려서 테이블에 놓인 꽃을 바라보았다. 지난 주에 받았던 꽃다발은 이미 시들고 말았다.

- ...

나는 진짜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207
[좋은 꿈 꿔요]

자기야 호칭 하나에 속이 뒤틀리고, 그렇게 엮이기 싫다며 온갖 미운 소리 다 해놓고 정말 이제와서 뭐하려고.

[너도]

새로 시작한다고 해도 그거로 다 괜찮은 걸까. 그냥 너와 나의 관계가 하나부터 열까지 어렵다.
208
-

생각이 많이 필요했다. 문대는 예민해지지 않으려 했다. 일을 그르칠 수는 없으니까. 이러다 또 저번처럼 야근하는 불상사만 일어날 것이다.

- 박 대리님. 점심 같이 드실래요?
- 좋아요.

가까운 곁에 두면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최대한 생각을 끝마치기 전까지 거리를 두려 했다.
209
- 대리님은 연애 생각 없으셨죠?
- 아, 네.
- 누가 물어보더라구요.
- 아...
- 인기 많으셔서 좋으실 것 같아요!
- 글...쎄요.

그게 좋은 건가. 잘 모르겠는데.

- 맞다. 저번에 회식 때 신 팀장님 데려다 주셨잖아요.
- 네.
210
- 혹시 팀장님 와이프도 보셨어요? 결혼했다고 하셨는데 사진도 없으셔서 궁금해서.
- ...저는 뵙지 못했습니다. 집 앞에 내려드리고 바로 왔거든요.
- 아, 그럴 수 있죠.

적당히 그럴듯하게 대답을 한다. 한창 점심을 먹다보면 무언가 생각난다는 듯 상대가 또 말한다.
211
- 근데 진짜 사이 좋으신가봐요. 저번에 슬쩍 여쭤봤는데, 되게 낯설다고 해야 하나.
- 뭐가요?
- 그냥...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 좋아보이시는 느낌?

아...

- 대리님, 무, 물 드릴까요?
- 아뇨, 괜찮습니다.

왜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지.
212
- 얼굴 너무 빨개지셨어요, 혹시 목에 걸리신 거 아니에요?
- 아뇨, 아뇨.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갈 거 같아.

-

목요일. 벌써 일주일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생각 정디로 아직 제대로 안 된 거 같은데, 어떻게 시간은 이리도 빠른 건지.
213
피해다니기도 했고, 재현도 자신을 배려해주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 내일 워크샵 잊지 않으셨죠? 다들 오늘 안에 일 끝내주셔야 해요.

덕분에 회사는 바쁘게 움직였다. 다들 작은 대화도 없이 제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문대도 똑같았다.
214
어떻게든 야근 뒤 워크샵을 피하겠다는 건가. 그런 의지 덕분에 오히려 일이 빨리 끝났다. 잠시 팀장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되면 3주 연속 주말에 신재현이랑 함께 하는 거네.

- ...!

순간 눈이 마주칠 뻔해서 고개를 빠르게 숙였다. 이게 뭐야, 짝사랑하다 들킨 어린 애도 아니고.
215
-

금요일. 오전부터 오후까지의 일정을 소화하고 다 함께 고기를 구워먹으며 회포를 풀고 있었다. 문대는 굳이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그러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현을 관찰했다. 또 취하면 이번엔 집으로 데려다주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216
- 대리님... 저번에 진짜 죄송해요
- 네?
- 그... 팀장님한테 혼날 때 대리님 탓했잖아요.
- 아, 괜찮아요. 이제 다 지난 일이잖아요.
- 그래도!!! ...죄송합니다. 진짜.

술에 취한 사원이 문대를 붙잡고 사과했다. 회식 자리에서도 이렇게 취한 건 못 본 것 같은데 나름 신났던 걸까.
217
문대는 괜찮다며 달랬다. 다른 테이블에서 취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아니, 팀장님은 결혼하셨다면서 왜 사진도 안 보여주세요오, 저 진짜 궁금하다니까요?
- 함부로 보여주고 싶지 않거든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때 보여줄게요.
218
상사한데 가족 사진 보여달라고 떼쓰는 모습이라니. 사무실 안이었으면 상상도 못했을 광경이었다. 문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술 대신 물을 마셨다.

- 대체 얼마나 소중하신 거예요!
- 말로 표현 못할 만큼 소중해서 그래요.

...

- 대리님, 여기 한 잔...! 어라?
219
앞에 있던 사원이 빈 맥주병을 흔들어 보이더니 다른 병들을 하나씩 들어보며 확인했다. 전부 비었다. 문대는 기회라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제가 술 사올게요.
- 아니, 그런 거는 제가 사오는 거예요!
- 저 어차피 술도 많이 안 마셨어요. 멀쩡한 사람이 다녀와야죠.
220
- 그럼 같이 다녀와요...!
- 괜찮습니다. 앉아서 쉬고 계세요.

말단 사원이 난감한 기색을 보였지만, 문대는 바람을 쐬기 위한 핑계로 직접 심부름을 자처했다. 대충 살아있는 인원을 체크했다. 그렇게 많이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221
서둘러 다녀올 생각은 없었다. 너무 많이 마셔봤자 취객만 늘어서 사고가 생길 게 뻔했으니까. 문대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지갑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대충 나오느라 핸드폰을 두고 왔다.

- ...아.

그러고 보니까 담배 안 피운지도 꽤 됐네.
222
그렇다고 아쉽진 않았다. 그만큼 스트레스의 원인이 줄었다는 거니까. 오히려 돌아가도 핸드폰만 챙겼을 것이다. 문대는 계속해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 흠.

몇 병 사야 하지. 그래도 목적이 목적이다보니, 어느 정도는 사가야 할 텐데.
223
무리없이 들 수 있는 정도로 적당히 산 문대는 잠시 편의점 앞 테이블 위에 산 것들을 올려놓고 앉아서 쉬었다.

- ...

혼자 남게 되니 생각이 정리되기는커녕, 오히려 늘었다. 일단 자신도 술을 어느 정도 받아 먹었고, 방금 전 같은 장소에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
224
문대는 괜히 소주 한 병을 꺼내서 흔들어 보았다. 이거라도 마시면 좀 괜찮을까. 아니, 미친 짓이지. 재현이 만취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런 꼴을 보여줄 수는 없다. 취중진담이라고 한들, 좀 한심하잖아.

그래서 신재현이 한심해?

- ...

아니, 하나도.
225
자리에서 일어나 병들을 끌어안으며 향했다. 혹시 무게를 못 이기고 비닐이 찢어지면 안 되니까. 그래서 넘어지면 큰일이었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으며 펜션으로 향하면, 누군가 멀리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 ...팀장님?
- 아니, 왜... 핸드폰을 두고 가요.
226
- 잊었습니다. 어차피 편의점 금방 갔다오는 거라 필요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 ...금방이 아니잖아요.

물론, 중간에 좀 노닥거렸지만, 이렇게까지 숨이 벅찰 정도로 걱정할 수준은 아닐 텐데.

- 사람들이 저 많이 찾아요? 술 왜 이렇게 늦냐고?
- 아뇨, 그런 소리는 안 하죠.
227
- 그런데 왜 이렇게 뛰어오셨어요.
- 나는 걱정하니까요.

들고 있던 소주병들이 서로 미세하게 긁히는 소리가 났다. 재현은 자연스럽게 품에 있던 것을 가져갔다. 먼저 앞장섰다.

- 얼른 들어가요.
- 그럽시다.

굳이 나란히 걷지 않고 문대는 잠시 멈춰서 재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228
제 고민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재현이 뒤를 돌았다.

- 무슨 일 있어요?

혹시 발이라도 삔 건가 싶어서 걱정하듯 물으며 다시 되돌아왔다. 문대는 뜬금없이 말했다.

- 다시 시작할래요?
- ...
- ...
- 네?
- 우리 다시 시작할까?
229
어쩌면 금방 헤어질 수도 있지. 이 끝이 이별일 수도 있고, 재혼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재혼하더라도 다시 이혼할 지도 몰라.

- 다시 시작이라는 건...
- 처음부터 연애해볼래?

그런데 그냥 너의 말을 믿기로 했어.
230
- ...나 잡아줘.
- ...
- 너가 나 계속 붙잡을 거라며.

아무런 소통도 없이 허무하게 끝나 억울한 관계였다면, 다시 시작할 때는 다를 지도 모르니까.

- 야, 야...!

망설임없이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문대를 끌어안은 덕에 귀가 아플 만큼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231
식겁한 문대와 달리 재현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을 주었다.

- 내가 이 순간을 너무 바랐어요.
- ...
- 진짜 거짓말도 아니고, 취해서 하는 것도 아니죠?
- ...나 애초에 취하지도 않았어.

으휴. 문대가 팔을 뻗어 재현의 등을 토닥였다.
232
- 내 외투 주머니 좀 봐줄래요.
- 주머니?
- 응, 왼쪽.

문대는 손을 넣었다. 뭔가 작은 상자가 손 안에 들어왔다. 이런 크기라면 하나 밖에 없을 텐데, 설마. 품 안에서 벗어나 정체를 확인했다. 역시나.

- 이거...
- 비슷한데 좀 달라요.
233
재현은 직접 케이스를 열었다. 반지 두 개가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결혼 반지와 다른 디자인이었다. 그렇다는 건,

- 이 날을 위해 항상 품에 지니고 다녔어요.
- ...
- 새롭게 시작하는 거니까, 더 좋은 거 해주고 싶기도 했고.

반지 하나를 꺼내서 문대의 약지에 끼워주었다.
234
당연히 꼭 맞을 수밖에 없었다.

- ...진짜 바보 같네.
- 바보 같으면 뭐 어때요.

제게도 끼워달라는 듯 내밀었다. 이상하게 손이 떨렸다. 문대는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워주었다. 재현은 다시 케이스를 돌려받아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반지 낀 손끼리 잡았다.
235
- 박문대 대리님.
- 네
- 문대 씨.
- 네.
- 자기야.
- ...예.
- ...여보.

마지막 호칭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여보라, 아직 거기까진 조금 이를 수도. 그래도 다시 불리고 부를 날이 오겠지.

- 사랑해요.
- 응.
236
진짜 내가 너랑 다시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도 몰랐는데 너는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이런 결과가 온 걸까. 다시 피어나는 감정에 심장이 주체가 안됐다.

- 이제 들어갈까요?
- 그나저나 이거...
237
바닥에 잔뜩 깨져서 아스팔트를 적시는 술병들을 바라보자 재현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봉투 안에서 깨진 것이 다행이었다. 그대로 집어들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시 편의점으로 향했다.

- 같이 다녀와요.
- 그래.

기분 좋은 밤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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