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맨물 #엋문 으로는 일찍 결혼했다가 1년만에 이혼했는데 n년 뒤 박문대가 취직한 회사 팀장이 하필 신재현임 근데 -...

일찍 결혼했다가 1년만에 이혼했는데 n년 뒤 박문대가 취직한 회사 팀장이 하필 신재현임 근데
- 자기야 이것 좀 해줘요
- 자기야 서류 잘못 됐다
- 자기야 오늘 회의 잊지 말고
이래서
- 너 미친새끼냐? 이혼한지가 언젠데 자기야 자기야 거리냐
- 나는 문대 씨가 원하는 것처럼 남들과 똑.같.이. 대하는 것뿐인데 왜 예민하게 굴어요? ^^
이러면 또 할말 없음 진짜 남들한테도 자기야라고 부르고 본인만 예민한 사람됨
- 뭐요 팀장님
- 내 기억이 멀쩡하다면 나는 자기가 아니라 여보라고 한것 같은데
-
- 자기라고 불렀던 건 대체 어떤 새끼예요?
이러고 갑자기 신재현 버튼 눌릴 것 같다
- 우리 이혼하자
그래서 그냥 이혼했어
그리고 집을 나가기로 한 건 문대였고, 정리하는 마지막 날까지 대화를 안 했어
-
그렇게 이혼하고 시간이 지나서 박문대는 꾸준히 일을 다니다가, 이직할 시기를 잡고 있었어. 아무래도 연봉 협상도 문제였고 옮길 생각하고 취업한 거니까
- 이번에 새로 마케팅 2팀에 들어온 박문대 대...
팀장이 전 남편이랜다. 분명 이직 면접 볼 때 팀장은 신재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애초에 이혼하자마자 해외로 간 걸로 암
- ...잘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에 본 소감? 20대의 절반 이상을 함께 하고 30대에 재회한 느낌?
- ...
아련하고 과거 생각나고 그럴 것도 없어. 그냥 ㅈ같지 뭐. 열받을 정도로 변한 게 없는 모습이거든.
서류 결재하러 갔더니 한다는 소리가 이런 거라니. 회사에서 공과 사도 구분 못하는 새끼.
- 수고했어요. 이대로 진행할게요.
돌려받으면서 박문대가 잇새로 조용히 말한다.
- 죽고 싶지 않으면 남들이랑 똑같이 대해.
- 뭐, 뭐?
- 페이지 누락됐다구요.
호칭에 귀를 의심함. 지금 나를 뭐라고 부른 거야? 어이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반말이 툭 튀어나옴. 일단 그건 무시하고 일부터 함
- 자기야. 커피 마시고 해요.
- 자기가 1팀 좀 다녀올래요?
- 자기야.
저놈의 자기야. 이거 진짜 일부러 이러는거지? 환청이 아니라 이 정도면 굳이 이혼한 전 배우자한테 엿먹으라고 하는 거잖아
- 지금 그게 중요해?
- 뭐, 문대 씨한테는 안 중요하겠죠.
-
- 이혼하고 누굴 만난 건지, 아니면 정말 사람 자체를 지워버린 건지 몰라도, 호칭도 다 잊어버리고,
- 됐습니다. 어쨌든 제가 오해한 거니까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 근데 문대 씨.
- 네.
- 아니지, 자기야.
- ...네.
- ...뭐?
미친 새끼야? 자기야 라고 하는 이유가 나 엿먹으라는 의도가 있는 게 맞았다고 본인 입으로 시인한 거지?
- 억울하잖아요.
- ...
- 당신이랑 이혼한 거.
지금 시간이 대체 몇 년이 지났는데, 대낮에 그것도 회사에서 저걸 왜 말하는 건데.
- 일방적인 것도 합의라고 하나보네.
- 도장 찍었고, 법원도 잘 다녀왔잖습니까.
- 그러니까 그게 억울했다는 거죠.
- ...
- 고칠 생각 안 하고 무작정 서류부터 들이미는데 나보고 어쩌란 건지.
- 지금 일하는 중입니다. 사적인 이야기 자제해주세요.
- 그래요, 일 얘기할게요. 다음 주에 부산 출장 같이 갑시다.
- 뭐???
- 원하는대로 일 얘기 해드렸잖아요
- 자기야.
- ...
-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 싫어요.
- ...
- 근데 어쩌겠어. 문대 씨가 이기적으로 굴겠다는데.
- ...
- 그래서 나도 좀 이기적으로 굴어볼게요.
- 팀장님. 서둘러 출발해야하는데 어디 계세요.
박문대는 질색하면서 겨우 한숨을 삼킨다. 누구 좋자고 거길 올라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신재현이라서 이것도 다 수작같아.
- 밑에서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오시죠.
[오래 걸릴 것 같은데요]
자기만 급해? 거래처 만나러 가는 건데 어디서 지각을 하려고 해. 지금 이 건물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린다. 문대는 계속 시간 확인하면서 인터넷 뉴스 기사나 보는데 10분이 지나도 안 나오지.
대가리 한 대 쳐서 데려오든가 해야지. 이러다가 저 놈이 입 잘못 놀리면 거래처랑 약속 늦는 것도 다 내 탓이 될 수 있다. 결국 익숙한 그 집을 굳이 올라간다. 그런데 벨을 누르는 데도 답이 없다. 집에 있긴 한 거야? 사실 이것도 다 거짓말 아니야? 아니면 엇갈린 건가.
바로바로 잘 받던 사람이 갑자기 전화를 안 받기 시작한다. 한 번 더 거는데 뭔가 소리가 겹쳐 들린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떨어뜨리는데, 문대가 욕을 뱉는다.
- 이 미친 새끼가.
🎵🎶🎵
- 나와, 이 새끼야.
직접 도어락을 열어달라는 거지. 아직도 비밀번호 기억하고 있냐면서.
- 그래도 다 기억하네요.
- 어, 다음에는 니네 집 재산 털어가려고.
- 얼마든지요.
열받는 새끼. 운전이나 하게 차키 좀 내놓으라는데 재현은 주지 않는다.
이기적으로 굴겠다는 말이 생각났다. 남들이 보기에는 배려겠지. 하지만 전혀 아니다. 정말 자기 방식대로 사람을 미치도록 열받게 하는 것이 본인 말을 참 그대로 이행한다는 느낌이 들더라.
- 그럼 빨리 출발이나 하시죠. 거래가 무산되길 바라는 거 아니면.
문대는 무시한다. 걸음에 무게가 잔뜩 실렸다.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자연스럽게 신재현 차를 한번에 찾는 자신도 싫고, 그냥 이 상황이 너무 짜증난다.
- 저녁이나 먹으러 가죠.
- 일 바쁜 거면 바로 올라가도 됩니다.
- 하루종일 돌아다녀놓고 바로 차를 4시간 운전할 만큼 바쁘진 않아요.
- 제가 운전해드릴까요?
- 차에 오래 타는 것도 굉장히 피로한 거 알죠?
하지만 까라면 까야지.
- ...그래서 뭐 드시고 싶으신데요.
- 뭐든.
- 나 안 줘도 돼요.
- 저도 안 줘도 되는데요.
- 안 먹을 건 아니잖아요. 내가 주고 싶은 건데.
- 술 한잔 마실래요? 이런 때 아니면 마시기 힘들고, 오늘 고생했잖아요.
얼씨구.
- ...팀장님 마음대로 하시죠.
나한테 의견이 애초에 있긴 하냐, 이 새끼야.
- 이제 다 먹었는데 일어나죠.
- 바다 보러갈래요?
- 그냥 보고 싶다는 건데.
신체 부위 그 어느 곳도 빨개진 곳이 없으면서 어디서 취객 코스프레야. 그렇게 울망거리는 고양이인 척 불쌍하게 굴면 내가 봐줄 것 같냐고.
- ...
흡연구역 찾아서 식당 근처에서 담배를 꺼내든다.
- 굉장히 안 좋은 버릇이 생겼네요.
언제 나온 건지. 그 한 마디 하더니 입에 있던 걸 뺏는다.
- 돌려주세요. 아깝게 뭐하는 겁니까.
- 당연하죠.
거리낌없이 문대가 물고 있던 걸 제 입으로 무는 재현이다. 그리고 불을 붙여달라는 듯이 허리를 살짝 숙이는데 기어코 반말이 또 튀어나오는 문대다.
- 미쳤어?
- 아깝다면서요.
- 누가 너보고 피우래?
- 지X한다. 진짜. 내가 흡연자인 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 안 좋은 버릇이니까요.
- 그래, 누구 덕에 생겼으니 누구랑 밥 먹고 피워야 하지 않겠어?
사실이다. 이혼한 이후로 후련하기는커녕 스트레스 때문에 잠시 달고 살았던 담배가 계속 떠나질 않았으니까.
문대가 앞장선다. 뒤에서 재현이 부른다.
- 자기야.
- ...
- 문대 씨.
뒤따라오는 발소리도 안 들린다. 돌아볼 때까지 부를 생각인 듯했다. 문대는 시선을 정면으로 유지한 채 말했다.
- 빨리 오기나 하지?
- 여보.
- ...
X발.
- 입 안 다무냐? 취한 척 그만하지? 아니면 진짜 취하기라도 했나봐?
- 네.
- ...
- 나 취했어요.
- ...
- 여보, 내 손 한 번만 잡아줄래요?
그리고 진짜 미친새끼가 분명하다.
무시한다. 저 손을 부러뜨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어떻게 잘 돌아왔다. 다시 회사로 복귀해서 일하는데 여념이 없는 문대. 출장 간 사이에도 업무는 계속 생기지. 밀린 걸 얼른 처리하고 점심시간에 커피나 마신다.
- 이래저래 피곤해서 거르려구요.
- 출장 많이 힘드셨구나.
- 아, 그런 건 아니고...
물론 정답인 것 같기도 하고. 유달리 피로감이 가시질 않는다. 문대는 아예 뚜껑을 열어서 얼음을 털어 씹어먹는다. 와그작거리면서 피곤함을 떨쳐내려는데 동시에 신재현이 자꾸 생각나지.
- 아,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플라스틱 컵을 구기고 말았다. 일단 죄없는 사원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색하게나마 웃어보인다.
뭐, 손을 잡아달라고? 진짜 정신이 나갔지.
- 팀장님, 결재 부탁드립니다.
- 자기야, 이건 1팀 다녀와야할 것 같은데요.
- 네.
- 맞다, 문대씨...!
- 네?
- 혹시 애인있어요?
- 아니요.
- 아, 그럼 퇴근하고 잠깐 봐요.
- ...네?
그렇게 오후 일이 제법 많아서 빡세게 정신 놓고 책상에만 있었더니 퇴근할 때가 되었더라.
- 문대씨! 퇴근해요?
- 아, 네. 맞다. 하실 말씀 있다고 하셨죠? 죄송합니다. 순간 잊고 갈 뻔했어요.
- 괜찮아요, 괜찮아요. 가면서 얘기해도 되는데 같이 퇴근해요!
- 네.
- 혹시 소개받으실 생각 없어요?
- ...네?
- 사실 기획팀 친구 하나가 문대씨한테 관심가지길래 물어봐준다고 했거든요.
...일단 누구 만날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내 연애는 좀 아닌 것 같은데.
- 문대씨는 결혼해서 안될 텐데.
- 네?
- ㅁ,뭐?
하도 사람들이 많아서 엘리베이터에 탄 줄도 몰랐다. 그나저나 귓속말로 했는데 어떻게 엿들은 거냐고. 아니, 이 정도면 들릴 거리인가.
- 결혼하셨어요...?
- 아뇨, 아뇨. 아닙니다. 팀장님이 농담하시는 거예요.
- 그럼 소개 받으실래요?
그런 이야기는 아닐 텐데.
- 죄송해요, 제가 누구 만날 상황은 아니라서요.
- 아무래도 결혼했으니까요.
콱. 문대는 결국 재현의 발을 몰래 밟아버린다. 구두가 더러워지는 게 알 바야? 눈을 안 찌른 게 다행이지.
자칫하면 소문 퍼질 텐데, 대체 무슨 헛소리를 자꾸 하는 거야.
- 죄송해요,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결혼 진짜 안 했고, 아직 누구 만날 생각은 없어요.
여기서 벗어나는 게 답이다. 문대는 급한 척하면서 엘리베이터가 내려가자마자 도망친다.
- 팀장님은 결혼하셨어요?
- 저요? 했죠.
- 아, 진짜요? 몰랐어요. 반지도 없으셔서.
- 아, 반지.
재현이 슬쩍 제 왼손을 앞뒤로 뒤집어본다. 그러더니 웃는다.
- 끼고 다녀야죠, 뭐.
- 신 팀장님 결혼했다면서?
- 언제??
- 본사 들어오시기 전에 하신 거 아닐까?
- 어디서 들었는데.
- 1팀에서 들었지. 팀장님이 직접 말했대. 그리고 손 봐봐.
문대는 그 말을 따라서 재현을 바라보는데, 왼손 약지를 보고 사레가 들린다.
- 그치? 말 안하고 다니셔서 몰랐나봐.
시X 저게 언제적 반지인데 저걸 끼고 다녀. 진짜 또라이 새끼 아니야??? 여기 회사다. 참자. 참자.
[미치셨습니까? 빨리 반지 빼세요]
[패션 반지인데요]
[누가 패션 반지를 왼손 약지에 낍니까]
[사이즈가 맞으니까?]
[사람 죽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 맞으시죠]
[아뇨 죽이려는 의도는 없는데요]
[그럼 곱게 빼시죠? 이혼했다고 광고하세요?]
진짜 소주 원샷 하고 싶게 만드네.
[도장. 분명히. 찍었습니다. 억지 그만 부리세요.]
[밥 같이 먹어요]
얘 진짜 뭐라는 거냐.
[오늘 저녁 같이 먹으면서 얘기 좀 하죠]
부서를 옮겨버려? 아니 퇴사... 그래, 퇴사가 답이다.
- 박 대리님 어디 가세요?
- ...퇴근이요.
- 퇴근하고 바로 집 가세요?
- 아뇨, 약속이 있어서요.
그리고 뒷말은 조용히 입모양으로만 보인다. 니가 밥. 먹자며. 재현이 답변에 만족했는지 웃는다.
멀쩡한 정신으로 집 가기에는 진짜 글러먹었네.
[주차장에 가있어요]
문대는 문자를 보고 1층이 아닌 지하주차장까지 한번에 내려간다. 넓은 곳에서 얼마 전에도 탔던 그 익숙한 차를 찾는다.
- 그래서 무슨 일이라구요?
- 그러니까 오늘...
그러다 들리는 회사 사람들 소리에 기둥 뒤에 숨으며 차보다 높이가 낮도록 주저 앉는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속으로 욕을 삼킨다. 신재현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고.
그렇게 몇 분 지났나. 다리가 저려올 때쯤 바로 옆에 있는 재현의 차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그와 동시에 핸드폰이 울렸다. 받으려고 하면, 금방 뚝 꺼지더라.
- 아. 귀엽게 봐달라고 그렇게 올려다보는 거예요?
- ...미치셨어요?
얼른 무릎을 털고 일어난다.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후다닥 조수석에 탄 문대가 좌석에 앉자마자 이상하다는 듯 말한다.
- 뭔데 의자가 눕혀있어.
천천히 좌석을 세우려는데 재현이 갑자기 어깨를 꾹 누른다
- 아. 다른 부서 사람 지나가거든요. 썬팅 되어있다고 해도 혹시 모르잖아요?
- 내가 네 차를 몰라? 그냥 손 치우지? 안 보이는 거 아니까.
- 얼마나 안 보이는데요.
- 실루엣도 안 보이잖아.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게 힘을 더 주는 재현이 점점 제 몸을 기울인다.
- 그걸 다 기억해요?
- ㅈ같은 건 원래 오래 남는 법이니까.
아하. 재현이 손가락을 올려 문대의 입술을 가볍게 쓸듯이 만진다.
- 그러니까 어떻게든 난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는 거네.
- 진짜 이 미친...
진짜 너무 열받는다.
둘이 저녁 먹자더니 도착한 곳은 고급 한정식 집. 이런 건 접대할 때나 오는 곳 아니냐. 결혼했을 때도 단둘이 오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땐 여기 오자고 했어도 뜯어말렸겠다만.
- 상대가 넌데 어떻게 편해?
- 그럼 불편하게 생각해요. 난 그게 더 좋으니까.
- 뭐?
태연하게 물을 따르면서 재현이 말한다.
- 원래 불편하다는 게 그만큼 신경 쓴다는 거잖아요. 편한 사이보다 불편한 사이가 위험하다는 거 몰라요?
칼이 없는 게 아쉽네. 문대는 젓가락 하나를 바라본다. 이거로 최대한 힘주면 찌르는 건 될 수도.
- 일단 밥이나 먹을까요?
그래. 빨리 밥이나 먹고 헤어지자고.
- 좋아해요.
- ...
- 들었어요?
- 응. 그런데 못 들은 척 하려고.
아마 대화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거겠지. 배가 어느 정도 찬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아니면 먹은 걸 뱉어내게 하려고 저러는 거라고 비난해야 하는지.
- 패션 반지라니까요.
자랑스럽게 왼손 약지를 보여주면서 패션 반지? 차라리 가운데 손가락에 끼고 욕을 하는 게 훨씬 낫다.
- 난 이해가 안돼.
- 응, 나도 너 이해가 안돼.
- 여보는 나 좋아하잖아요.
- 여보는 전화할 때나 쓰는 말이고.
- 늦어도 너무 늦었어.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거 하나도 없다고.
- 그럼 나를 사랑했던 마음도 안 바꿨다는 거네.
- 이혼하기로 결심했던 그 마음이 안 바뀐 거지. 너 혹시 모자라?
- 솔직하게 나 싫어서 헤어진 게 아니었으니까요. 안 맞는다고 판단하면서 억지로 밀어냈잖아.
맞는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진리라고 한들 납득하기 싫고,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고 싶다.
- 누군 아닌 줄 알아요?
- 그럼 이해관계가 딱 맞네. 계산하고 헤어지자. 반지는 제발 버리고.
- 여보도 안 버린 반지를 내가 왜 버려요.
- ...
침실 서랍장 구석에 넣어둔 반지가 떠올랐다. 그래. 안 버렸다.
- 나도 당신이 제일 미워요. 그런데 왜 그러겠어.
- ...
- 아마 반지를 버리지 못한 이유랑 같겠죠.
- ...그런 이유 알고 싶지도 않아.
재현은 외투와 짐을 챙기며 슬슬 일어날 채비를 한다.
- 데려다 줄게요.
- 됐어. 집 가까우니까 걸어갈거야.
- 나 앞으로 회사에서 결혼했다고 해도 부정 안 할 거예요.
- 그러세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팀장님.
- 미쳤냐?
재현은 먼저 일어나서 자연스럽게 문대의 손등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다. 입술이 닿은 부분부터 시작해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 박문대 대리님, 그럼 기회 좀 줄래요?
- ...
- 저랑 데이트해요.
- ...
- 나 진짜 진심이에요.
- 나도 진심이야.
- ...
- 싫어.
그러니까 그만 추해지자고, 제발.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문대는 머리가 아픈 건지 계속 관자놀이를 짚으면서 키보드를 두들긴다. 최근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컨디션이 안 좋을 수밖에 없다. 눈도 몇 번 깜빡이면서 몰래 불편한 티를 낸다.
- 대리님, 파일 한 번만 확인해주실래요?
- 네?
- ...아, 네
그런 건 좀 본인이 알아서 하면 안 되나. 하지만 굳이 싸우고 싶지도 않고 설령 그렇다 해도 따지고 들 기력도 없다. 대충 넘겨받고, 내일까지라니까 우선 본인 업무부터 끝내고 봐주려고 한다.
- 대리님, 점심 안 드세요?
- 저 오늘은 생각이 없어서요.
- 커피라도 사다드릴까요?
- 아, 그래주시면 감사합니다.
점심 챙겨먹기도 번거롭고, 그냥 책상에 엎드려서 잠시 쉬다가 다시 오후 업무 시작.
- 자기야, 오전까지 보내달라고 한 파일 어떻게 됐어요?
- 네, 네?
- 오전까지 차트 정리해서 보내달라고 했잖습니까.
- 그... 그게,
- ...바, 박 대리님한테 넘겨드렸는데.
뭐?
- oo씨한테 드린 건데 그게 왜 박 대리님한테 가있어요.
- 차트 한번 검토해주신다고 하셔서...
- 검토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저는 내일까지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후에 제 업무 끝나고 봐주려고 했구요.
흐음. 재현이 발발 떠는 사원과 문대를 번갈아 바라본다.
- 일단 최대한 빨리 오늘 안에 넘겨주세요.
하. 문대는 안 그래도 제 일도 못 끝냈는데 남의 것을 먼저 봐주게 생겼다. 자칫하면 야근할지도 모른단 생각. 짜증에 피로감이 쌓이며 두통이 더 몰려온다.
- 아까 난감하셨겠어요.
- 아,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근데 혹시 아프세요? 볼이 되게 빨개요.
- 아... 머리가 좀 아파서 그런 가봐요. 퇴근하고 집 가서 쉬면 괜찮아질 걸요.
- 저 두통약 있는데 드릴까요?
- 퇴근한다고 다 낫는 게 아니잖아요. 자리에 계시면 찾아서 갖다드릴게요.
- ...감사합니다.
문대는 찬물을 한번 쭉 들이키고 텀블러에 가득 담아간다. 다시 자리에 앉는데 어째 뭔가 더 어지러운 느낌이다. 그냥 단순한 스트레스가 아닌 건가.
- ...박 대리님!
- 네?
- 이거, 약. 얼른 먹어요.
- 아, 감사합니다.
바로 약을 찾아서 건네준 덕에 문대는 얼른 물과 함께 삼켜낸다.
- 오늘은 다들 여기까지하고 퇴근할게요. 박 대리님은 일단 세이브 파일만 넘겨주세요. 나머진 제가 할 테니까.
- 고생하셨습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 자기야.
- ...
- 파일 넘기고 퇴근해요.
그러니까 왜. 오늘 회사에 큰 행사라도 있대?
그래도 일단 거절한다. 재현이 아니더라도 남한테 제 일을 떠맡기는 성격은 아니다. 모두 퇴근하면서 어수선한 틈을 타 재현이 다가와 조용히 말한다.
- 여보.
- 호칭 똑바로 안 하세요?
- 그래요, 자기야.
- ...
- 아프면 얼른 가서 쉬어요.
- 반지 주고받아 본 사이면, 이 정도는 기본이에요.
- ...
- 데려다줘요?
- 아뇨, 됐습니다.
- 기다려요.
재현이 가볍게 어깨를 눌렀을 뿐인데 문대가 힘없이 풀썩 앉는다.
- 필요없다고.
- 앓아 누워서 회사에 필요 없어지고 싶은 거 아니잖아요. 그냥 말 듣는 게 낫지 않나.
...말을 꼭 저렇게 하냐고. 이러나저러나 안 그래도 몸에 힘이 없어서 이 상황에서는 절대적인 약자다.
-
얌전히 차에 올라타는 동안에도 재현은 별 말을 안 한다. 정말 데려다주는 것 외에 아무 의도도 없다는 것처럼 군다. 그런갑다 하면서 문대는 잠시라도 편히 기댄다.
- 뭐가.
- 집 주소.
- ...
- 안 알려줄 거잖아.
- ...
- 우리집으로 가요?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맞다. 그걸 잊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머리가 아프면 그런 것도 잊어버리는 건지. 집 근처에 있는 건물이라도 대야 하나. 그래봤자 어차피 또 들키겠지.
- 핸드폰 줘봐. 내비 찍게.
마음을 열어준다거나 그런게 아니다. 그냥 사리분별이 안되기도 하고. 정말...
- 여기 맞아요?
- 어, 출발해.
아무 의미 없는 거다.
다음날, 문대는 집 가자마자 푹 잔 덕분인지 머리가 확실히 맑아졌다. 너무 오래 잔 탓에 몸이 좀 뻐근하긴 했지만, 간만에 깊은 잠에 빠져든 덕에 제법 좋았다.
- 오늘은 괜찮아보이네?
- 네, 약 챙겨주신 덕분이에요.
- 아니에요, 진짜 별 거 아닌데요.
- 아침이니까 다들 힘내라는 의미로 마시고 시작해요.
자양강장제를 하나씩 건넨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문대에게는 두 개를 준다.
- 오늘 하루도 화이팅합시다.
말을 끊으면서 재현은 손을 뒤로 빼서 상표가 보이도록 병을 돌려준다. 그러니까 하나는 감기약이다.
- ...아.
문대는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먼저 따서 마신 후 개인 쓰레기통에 우선 넣어둔다. 감기는 거의 다 나았지만 말이다.
- 담배 끊었어요?
-아뇨, 라이터가 없어서요. 가지러 갔다오긴 번거롭잖아요.
- 감기는 다 나았고?
- 네. 배려해주신 덕분에요.
그래도 이 정도 감사는 당연히 표현해야지.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데 왼손이 또 눈에 띈다. 여전히 반지가 끼워져 있다.
- 벌써 낀 지 일주일 넘은 거 같은데요.
- 이제 뺄 때 됐네요.
- 제 손가락에 반지가 없으면 허전하다는 거죠.
- 다른 거 사드려요?
- 커플링 새로 맞추자구요?
그런 이야기가 아닌 거 뻔히 알 텐데.
- 그렇게 느껴지면 다행이네요.
- 됐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 갑자기?
- 덕분에 집 구석에 처박혀 있던 반지를 오늘 안에 버려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럼 저는 먼저 업무 때문에 내려가보겠습니다. 문대는 빠르게 대화를 마치고 가버린다.
- 대리님, 그거 들었어요?
- 어떤 거요?
- 이번 주 금요일에 마케팅 팀 전체 회식 한대요!
- 네?
- 아까 우연히 복도에서 1팀 이야기 들었거든요. 아마 팀장님 오시면 말해주실 것 같아요.
벌써 금요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빌게 됐다.
그리고 점심시간 끝. 정말 소식 들은 대로 재현이 오후 업무 시작하기 전에, 말해주더라.
- 이번 주 금요일에 마케팅 전체 회식 있습니다. 다들 일정 빼놓으세요.
퇴근하고 문대는 집에서 혼자 저녁을 챙겨먹은 후, 쓰레기를 정리한다. 종량제 봉투를 묶어두고, 잠시 고민한다. 지금 버리고 올까. 아니면 출근하면서 버릴까.
- 지금 가자.
- 아.
적당히 올이 나가지 않게 빼내는데 서랍장이 함께 열린다. 덜컹거리면서 안에 밀어넣어진 물건들이 훅 튕겨나오는데, 문대가 보자마자 한숨을 쉰다.
그래, 맞다. 오늘 집 가면 반지 버리기로 했다. 문대는 잠시 고민한다. 쓸데없이 왜 아직까지도 반짝거려. 반지를 챙겨서 묶어둔 종량제 봉투 틈새로 넣어버린다. 금으로 되어있어도 그게 알 바인가. 팔기 위해 돌아다니는 시간도 아까워.
금요일. 회식 날. 문대는 제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길 바랐다. 안타깝게도 제 일상은 언제나 똑같았다. 그저 평범했다. 차라리 오늘 안에 끝내야 하는 업무가 생겨서 본인만 사무실에서 야근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 오늘 다들 회식인 거 아시죠? 그 전까지 다들 힘내서 일합시다.
- ...
그래, 반지 버린 건 역시 최고의 선택이었다. 더 이상 저놈의 약지에 있는 것과 똑같은 물건은 없으니까.
- 박 대리님! 한 잔 받으세요!
- 아, 네.
한창 술을 주거니 받거니, 문대는 눈치껏 잠시 화장실로 간다. 손을 씻으면서 거울을 보고 매무새나 정리한다. 취할 만큼 마시지도 않아서 흐트러진 부분은 거의 없었다.
- ...
- ...
누가 문을 여나 했더니 재현이었다. 그런데 딱히 입을 열지 않고 뭔가 마음에 안든다는 듯 인상을 좀 찌푸리더니 문대를 지나친다. 그런데 그 순간에 술냄새가 훅 났다. 취했나?
시간이 좀 더 지났을까.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누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든다.
- 혹시 신 팀장님 댁 어딘지 아시는 분!!!
- 세상에, 팀장님 취하셨어요?
- ...나 팀장님 취하신 거 처음 봐.
- 어떡하죠? 팀장님 오늘 회식한다고 차는 회사에 두고 오셨죠?
- 팀장님 댁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것 같은데...
- 결혼했다고 하셨는데 혹시 가족분 부를 수는 없으려나.
- 저 팀장님 댁 어딘지 알아요.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 대리님 알아요???
- 어떻게 알아?
- 그냥, 뭐... 저번에 출장 때문에 좀 알게 됐어요.
- 그럼 고생해.
- 문대씨 먼저 들어가!!
- 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 xxxx로 가주세요.
- 손님은 같이 안 타세요?
- 네?
널브러진 재현이 걱정된다는 듯이 택시 기사가 말하자 문대가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고 결국 그 옆에 같이 탑승한다.
어떻게 잘 도착한 재현의 집. 내가 이 집을 또 오게 될 줄이야. 문대가 속으로 욕하면서 택시비를 결제하고 재현과 함께 내린다.
- 정신 좀 차려. 이제 집은 알아서 기어들어가.
- 집 들어가라고 했다.
- 문대 씨...
- 야.
- 자기야...
- ...
- ...여보야.
- 신재현 팀장님. 회식 끝났구요. 빨리 집 들어가세요.
얼른 현실로 돌아오라는 듯 또박또박 말해준다.
- ...버리지 마요.
- 뭘요.
- ...이거.
- ...
- 야, 너...
얼마 전에 버렸던 반지. 이거 분명히 종량제 봉투에 쑤셔넣었는데. 왜 얘가 가지고 있어? 재현은 취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 ...그리고 나도 버리지 마.
- 일단 팀장님 진짜 많이 취하셨어요. 걸어들어가실 수 있어요?
굳이 정의하지 않기로 했다. 복잡한 문제에 파고들기 싫었으니까.
정말 취한 게 맞긴 한가 보다. 출장갔을 때 했던 어설픈 주정이랑 차원이 다르다. 여전히 제게 기대고 있는 재현을 떨어뜨려놓으려 한다.
- 집 안에 들어가는 것만 보고 갈게요, 그럼.
- 신발 벗고 옷도 갈아입으세요.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 ...
- 저기요, 팀장님.
- 야, 야!!!
...진짜 넌 다시는 술 이렇게 마시지 말아라. 문대가 어떻게든 벗어나서 결국 신발을 벗겨준다. 이게 무슨 짓이야. 거의 질질 끌듯이 일으켜서 침대에 던져둔다.
어떻게 가구가 배치부터 물건까지 바뀐 게 없냐. 문대는 침대 옆에 놓인 액자를 들어본다. 결혼 사진. 속이 뒤틀린다.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빼내서 액자 앞에 두고 액자는 사진이 보이지 않게 엎어버렸다.
재현은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자신이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부터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술을 마신 게 처음이었지만, 필름이 끊기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버리지 마요.]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기억한다는 소리였다. 거짓도 아니고 진심이었으니 후회하진 않는다.
- ...
건드린 적이 없던 결혼 사진이 보이지 않게 엎어져 있고, 그 앞에 반지가 있었다. 제 손가락을 살폈다. 멀쩡하게 끼워져 있었다. 저건 제것이 아니었다. 재현은 다른 반지도 함께 옆에 두었다.
- 좋은 아침이에요
- 팀장님, 안녕하세요!
- 금요일엔 잘 들어가셨어요??
월요일. 재현은 출근했다. 만취했던 그를 걱정하는 사원들에게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문대는 아직 출근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날 이후로 감사를 담은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 박 대리님, 커피 드세요.
- 네?
- 회식 때 고생하셨으니까 커피 드린다구요.
재현이 기다렸다는 듯 커피를 건넸다.
일단 커피를 마시면서 일하는데,
- 박문대 대리님, 파일 하나 보냈는데 다시 확인 부탁해요.
- 박 대리님, 오늘 안에 그거 가능해요?
아, 이상한 부분을 알아냈다.
- 박 대리님.
그는 나를 더 이상 자기야 라고 부르지 않는다.
- 자기야, 여기 이상한데.
눈치를 채달라거나 엿 먹으라는 의도가 아닌 것 같았다. 왜냐면 반지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버리지 말아달라더니. 정작 본인이 버렸잖냐.
- 네?
- 그냥 표정 안 좋아보이실래 아프시다면 약 드리려구요.
- 아, 진짜 괜찮아요. 월요일이라 피곤했나봐요.
- 하긴 직장인들한테 월요병은 어쩔 수 없죠.
싫다며. 그렇게 싫다고 계속 밀어냈잖아. 저쪽에서 떨어져 나가줬는데, 뭐가 문제야.
- 여기 차트 완전 뒤죽박죽인데요...?
- 네???
대체 얼마나 엉망이면 사소한 거에서 실수까지 하는 거냐고.
-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안에 다 수정해서 내일 다시 넘겨드릴게요.
결국 야근 확정이다.
- ...에휴.
사람이 없다는 것은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 아으,
잠시 기지개를 켜며 탕비실로 갔다. 어느새 비워진 텀블러에 물을 다시 가득 채우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다. 우득거리는게 역시 오래 일하긴 했다고 느낀다.
- ...뭐하세요?
- 아.
몰래 들르려고 했던건지 딱 걸렸다는 듯 재현이 짧게 탄식하다가 자연스럽게 들고 있던 것을 내보였다.
- 저녁 안 먹었죠?
- ...네, 뭐.
- 야근하는데 힘내요. 두고 갈게요.
- 저기요, 팀장님.
사무실을 나가려는 재현을 붙잡는다.
- ...저녁 드셨어요?
- ...
어서 다음 말을 해달라는 듯 재현이 빤히 바라보았다. 문대는 괜히 봉투를 부시럭거리며 소리를 냈다. 그냥 되는대로 아무거나 집어서 보여주었다.
- 이거.
- ...
- ...좋아하시잖아요.
- 나 거절 안해요.
- 그러시든가요.
탕비실에서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뭔가 어색했다. 차라리 저번에 한정식 집이 더 나았다.
- 먹는 양이 줄어든 것 같네요.
- 누구랑 먹어서 안 들어가는 거야.
- 먹자고 한 건 당신이면서.
- 애초에 이렇게 많으면 다 못 먹어.
- 요즘 말 잘 듣네.
- 어떤 거요?
- ...그냥 이거저거.
차마 반지도 안 끼고, 자기야 소리도 관뒀다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충 흘렸다.
- ...
- 이거 말하는 건가?
크흠. 문대가 헛기침을 한다.
- 역시 남들한테도 자기야 라고 한다고 해서 당신한테도 호칭을 통일할 필요가 없겠더라구요.
- 그래.
- 그쵸, 여보?
- ...
- 일 얼마나 남았어요?
- 금방 끝납니다.
- 그럼 기다릴게요, 데려다줄게.
- ...그러라고 집 주소 알려드린 거 아닙니다.
- 난 이러려고 알아낸 거 맞는데.
- 기다릴거면 본인 자리에서 기다리세요. 일 많으시잖아요.
- 급한 건 아니라서요.
- 여보는 나 상사라고 생각 잘 안 하잖아요.
- 제가 그렇다고 회사에서 이름 불렀습니까?
- 반말은 많이 했죠.
차라리 일을 빨리 끝내고 말지. 문대는 속력을 올린다.
- 수정할 것도 없네요.
- 그와중에 그건 또 보셨습니까?
- 바로바로 말해주면 나중에 고칠 것도 없잖아요.
- 아, 예...
어쨌든, 이제야 퇴근. 재현과 함께 지하로 내려가서 자연스럽게 차에 탄다.
- 당연하죠.
- 그럴 것 같았어.
찍어줄 필요도 없었다. 알아서 출발하라며 안전벨트부터 맸다.
퇴근길이라면 막히기 마련인데, 확실히 야근하긴 했나보다. 보통 시간보다 도로에 차가 적었다. 밥을 먹기도 했고, 늦게까지 일을 했다보니 졸음이 쏟아졌다.
- ...
- 많이 아파요?
- 아니.
사실 제법 아프다. 문대는 몰래 부딪친 부분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 그런 의도는 하나도 없었는데.
- 의도하지 않았는데 귀여워 보이는 건 내가 당신 좋아한다는 거죠.
말 한 번 참 어떻게든 낯간지럽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집이 먼 건 아니라서 금방 도착해 문대는 내린다.
열린 문틈 사이로 말하는데, 재현은 그냥 내린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 뭐라구요?
-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 그래요.
- 야.
지난 주에 그런 일도 있었고, 계속 얼굴 볼 사이라 그런가. 그냥 문대는 물어보기로 했다.
- 당연히.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칼같이 대답했다. 신재현은 안되는 일에 깔끔하게 포기하고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매달렸다. 스스로를 바꿔서라도 쟁취하고 싶다거나 불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 그러면 이게 마지막이잖아요.
- ...
- 마지막 연애야.
- ...
-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연애할 때 그 상대가 당신이면 좋겠어요.
연애? 너랑 내가 다시 연애? 연애 시절이 이제는 까마득해서 그때 어떻게 사랑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 그럼 내가 또 붙잡는 거죠.
- ...
- 그렇게 계속 붙잡으면서 어떻게든 이어가면
- ...
- 결국 서로의 마지막이 될 수 있잖아.
이렇게 간절하면서 왜 그때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도장을 찍은 건지. 이제와서 다 소용없는 이야기일까.
- 너가 데이트 하자고 했었지.
- 네.
- ...하자.
- 네?
- 한 번 해보자고.
- ...
- 연애는 아니고, 하여튼 그...
- 이렇게 데이트 신청할까요?
- 낯간지럽게 뭐하는 짓이야.
- 아무래도 연애하는 사이는 아니니까 포옹이나 키스는 이르잖아요.
- ...어이가 없어서.
- 이번 주 주말 어떠세요, 박문대 대리님?
- 네, 시간 빕니다. 알아서 하세요.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었다. 손을 한 번 잡아주자 재현이 말했다.
- 고마워요.
기회를 다시 줘서.
다음 날에도 큰 변화는 없다. 사적인 관계에서 변화가 조금 있을 뿐, 표면 상으로는 직장 동료니까.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하고,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낼 뿐이다.
- 다들 커피 한 잔씩 하세요.
아주 약간 다른 점이 있다고 하면,
[점심 같이 먹을래요?]
이런 정도랄까.
- 대리님! 새로 생긴 식당 가보려는데 같이 가실래요?
- 아뇨, 저 이미 먹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요.
- 아, 그래요? 그럼 다음에 같이 가요!
- 네.
동료들의 식사 제안도 거절하고 재현과 함께 밥을 먹는다. 문대는 괜히 툴툴거린다.
-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는데 나를 선택해준 건 당신이구요.
- ...
- 그래서 싫어요?
-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한창 밥을 먹다 보면 재현이 물어본다.
- 최근에 영화 봤어요?
- 딱히 볼 시간도 없었습니다.
- 그럼 주말에 영화나 봐요.
- 당신이랑 함께 하는데 뭔들 싫겠어요.
크흠. 문대는 일부러 수저가 부딪치는 소리를 크게 내며 남은 음식들을 싹싹 긁어먹는다.
그렇게 주말. 오전부터 문대는 깔끔하게 꾸미고 집 앞으로 나온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왔지만, 상대는 훨씬 더 일찍 나왔다는 듯 차에 기대어 나오는 문대를 맞이한다.
- ...대체 몇 시부터 기다린 거야?
- 글쎄요?
- 설마 잠도 안 잤어?
- 누구랑 데이트하는데 잠이 오겠어요?
우선 점심부터 먹은 후 영화관. 직접 무엇을 볼지 고민하면서 영화 티켓까지 사셨다고 하니, 얻어먹기만 할 수 없다며 문대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기로 한다.
- 굳이 안 사도 되는데요.
- 얻어먹기 싫어서 그래.
- 빚지는 거 같아서?
- 응. 나중에 뭐라도 해줘야할 것 같잖아.
대충 주문하고 결제하기 위해 카드를 내미는 문대를 막고 재현이 냉큼 제 카드를 내민다
- 그럼 계속 잘해줘야겠다.
- ...
- 그렇게라도 나를 만날 생각이 들 거 아니에요.
대체 뭔... 문대는 뺨을 긁적이면서 팝콘통을 품에 안고 영화관으로 들어간다.
- 왜.
콜라를 마시다 말고 작은 목소리로 묻자 재현은 문대가 다른 한 손으로 끌어안고 있는 팝콘통을 가리킨다.
- 이거 달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문대가 넘겨준다.
- ...
그러니까 여태 잡고 싶어서 눈치를 봤는데 양손이 바빠서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 좋아서.
-
영화까지 잘 보고, 정말 평범한 데이트 코스를 즐기면서 재현과 하루를 보냈다. 사실 거창할 것도 없어서 내내 긴장이 되었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 아무래도.
- 가볍게 드라이브하는 겸 집으로 데려다줄까요?
- 그래.
드라이브는 생각을 정리하기 딱 좋았다.
- 생각보다 되게 빨리 도착했네요.
- 아무래도 우리가 놀이공원 같은 먼 곳을 간 게 아니잖아.
멀리 나간 것도 아니었다. 제법 짧은 코스에 재현이 조금 아쉬운 소리를 냈다.
- 이게 무슨 고생이에요.
하여튼. 그냥 아침부터 차 끌고 나오느라 고생한 거라며, 문대가 손을 흔든다.
이제 집에 들어가보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해봤자 어차피 재현이 따라 내릴 것을 알기에 말로 인사하진 않았다.
- 줄 거 있어요.
- 뭘?
재현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트렁크를 열어서 안에 숨어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 ...이게 뭔,
- 데이트할 때 원래 이런 거 주잖아요.
꽃다발이었다. 실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 음, 그러니까...
- ...
- 우리 다음 주에도 만날래요?
- ...
- 나 지금 한 번 더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문대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문대는 잠시 머뭇거렸다. 거절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 다음 주에는 뭐 하시려고?
- 뭐... 놀이공원이라도 갈까요?
- 엥?
- 늦게까지 함께 있을 수 있다면서요.
아까 그 말이 그렇게 되나. 신재현이랑 놀이공원? 진짜 왜 이렇게 쉽게 상상이 안 되는 건지.
- 그래요.
- 버블건 사서 들고 다니라고 할 거야.
- 마음대로요.
- 페이스 페인팅도 시키고, 유치한 거 잔뜩 하라고 할 거야.
물론 정말 시킬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자신도 별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일부러 놀리기 위한 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재현은 다 받아들였다.
- ...
- 난 그걸 이뤄주는 게 내 로망이니까요.
너와 내 사이를 대체 누가 이혼한 사이라고 여길까. 내 스스로 느끼기에도 풋풋하기 그지 없는데.
- 그래서 안 받아줄 거예요?
- 그래요, 신재현 팀장님.
- ...
- 우리 다음 주에 또 만납시다.
문대는 확실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렇게 직장인들은 피할 수 없는 월요일이 또 찾아온다. 주말을 어떻게 보냈든 간에, 월요일이 기분 좋을 수는 없다. 문대도 똑같았다. 기묘하게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감에 입을 가리고 일부러 하품을 크게 했다.
- 아으...
그러다가 척추 부근에서 우득하는 소리가 난다.
- 다음 주 워크샵 있는 거 알죠?
...아?
- 두 달 전부터 이야기 했고 저번에 장소 예약도 끝났는데 혹시 잊었을 것 같아서 말합니다.
- 어쨌든 월요일인데 다들 이번 주도 힘내봅시다.
덕분에 잠은 깼다. 그러게. 하도 정신이 없다보니까 생각을 지워버렸다.
-
또다시 찾아온 주말. 묘하게 이번 주는 일이 고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쉬지 못하고 밖을 나섰다. 주말 출근? 그런 거 아니다.
- 잘 잤어요?
- ...글쎄다.
- 놀이공원 진짜 별로 안 좋아하네요.
- 사실 싫어한다기 보다는 그냥 그거 같아.
- 조합의 문제?
- 조합?
- 30대 남자 둘이서 놀이공원...
- 어디 뉴스 기사에 나올 것처럼 이야기 하네요.
나한테는 뉴스 기사 만큼이나 생소한 이야기니까. 어쨌든 도착하고 나서 천천히 입장한다. 열심히 놀이기구 줄 서기 위해 뛰어다니는 아이들 틈에서 산책하듯이 걸어다닌다.
- 왜요?
- 오라면 와.
재현이 다가가자 문대는 바로 동물 머리띠 하나를 씌운다.
- 풉.
와. 진짜 애 하나는 데리고 올 법한 남자가 동물 머리띠를 쓴 꼴이라니. 놀리기 위한 용도가 맞지만 진짜 우습다.
- 쓰고 다녀.
- 그럼 우리 대리님도 이거 써야죠.
- 아니, 나는 안 쓸 건데?
- 이런거 쓰고 다니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같이 쓰고 다니는 게 덜 민망하지 않을까요?
- 거기서 거기거든.
- 아무렴 어때요.
- 너무 예쁜데.
...장소 탓인가. 그냥 내 마음이 어려지는 것 같다.
- 그리고 이것도 들고 다니라면서.
재현이 어느새 산 건지 장난스럽게 버블건을 들고 문대에게 뿌렸다.
- 야!!!
- 하하하!
- 시간은 많은데 그냥 눈에 띄는 거 타면 되죠.
-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데로 데이트 오겠어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 그럼 뭐든 타자.
-
모든 놀이기구를 정복하겠다는 목표가 없어서 그랬는지, 줄이 적은 걸 골라타면서 같이 있는 순간만 즐기다보니 벌써 해가 저물었다.
- 이따가 퍼레이드 있대.
- 보고 갈래요?
- 그래. 이거 먹고 가면 될 거 같아.
저녁을 먹고 잠시 화장실에 들러서 손을 씻었다. 물기를 닦아내고 있는데 옆에서 어린아이가 아빠를 붙잡고 묻더라.
- 우리 아들은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할까?
- 그냥!
- 글쎄, 엄마랑 함께 하면 어딜 가도 재밌을 것 같아서?
- 무슨 말이야?
- 오늘 엄마아빠랑 놀이공원 와서 재밌지?
- 응!
- 아빠도 똑같은 거야.
핸드 드라이어가 꺼졌는데도 문대는 잠시 멍하니 손을 뻗고 있었다.
- 이거 왜 사라고 했는지 알 거 같아요.
- 왜?
이번에는 버블건을 사람이 닿지 않게 공기 중으로 흩뿌렸다.
- 아무래도 당신은 가끔 이런 거에 약했으니까.
감성에 치우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때때로 분위기에 휩쓸렸다. 딱 지금 순간처럼.
- 예뻐서 잘 어울려.
- 신재현 팀장님.
- 네?
- 아니다.
- ...
- 신재현.
항상 중요한 말을 할 때는 꼭 팀장님이라고 직급을 붙였다. 하지만 이번에 박문대는 선을 긋지 않았다.
퍼레이드가 심히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형형색색의 조명이 눈부셨다. 모두가 기뻐하는 분위기에 함께 파도를 탄 것 뿐이었다.
- 너는...
- ...
- 아직도 내가 좋은 이유가 뭐야?
재현은 여전히 머리띠를 쓴 채로 고민했다. 이제 더 이상 저 모습이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 나는 당신의 단점도 꼽으라고 하면 꼽을 수 있어요.
- ...
- 그런데 그 단점을 완벽히 덮어서 보이지 않을 만큼 너무 사랑하더라고.
- ...
- 좋아하는 이유보다는 그거죠.
- ...
-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 내가 이런 걸 뭐 좋다고 귀찮게 손에 들고 다녔겠어요.
톡. 톡. 톡. 방울 몇 개를 또 터뜨렸다.
- 얼굴 전체에 물감을 칠하라고 해도, 당신 부탁이면 다 해줬을 텐데.
아. 이유는 없었다. 그저 너는 나 하나면 되었다.
- ...생각해볼게.
- 뭘요?
- 너와의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고.
- ...
- 당장 내일 결정이 날 수도 있고, 오래 걸릴 수도 있어.
- ...
사실 이기적인 이야기였다. 정해진 기한도 없이 언젠가는 답을 들려줄테니 기다리라니. 시간을 낭비하라고 무려 신재현에게 요구했다.
- 얼마든지.
물론 재현은 제게 긍정적이라면 얼마가 걸려도 상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문대는 하루종일 밖에서 걸어다녔다고 씻자마자 바로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 머리를 댄 순간 귀신같이 잠이 밀려왔다. 등을 돌려서 테이블에 놓인 꽃을 바라보았다. 지난 주에 받았던 꽃다발은 이미 시들고 말았다.
- ...
나는 진짜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자기야 호칭 하나에 속이 뒤틀리고, 그렇게 엮이기 싫다며 온갖 미운 소리 다 해놓고 정말 이제와서 뭐하려고.
[너도]
새로 시작한다고 해도 그거로 다 괜찮은 걸까. 그냥 너와 나의 관계가 하나부터 열까지 어렵다.
생각이 많이 필요했다. 문대는 예민해지지 않으려 했다. 일을 그르칠 수는 없으니까. 이러다 또 저번처럼 야근하는 불상사만 일어날 것이다.
- 박 대리님. 점심 같이 드실래요?
- 좋아요.
가까운 곁에 두면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최대한 생각을 끝마치기 전까지 거리를 두려 했다.
- 아, 네.
- 누가 물어보더라구요.
- 아...
- 인기 많으셔서 좋으실 것 같아요!
- 글...쎄요.
그게 좋은 건가. 잘 모르겠는데.
- 맞다. 저번에 회식 때 신 팀장님 데려다 주셨잖아요.
- 네.
- ...저는 뵙지 못했습니다. 집 앞에 내려드리고 바로 왔거든요.
- 아, 그럴 수 있죠.
적당히 그럴듯하게 대답을 한다. 한창 점심을 먹다보면 무언가 생각난다는 듯 상대가 또 말한다.
- 뭐가요?
- 그냥...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 좋아보이시는 느낌?
아...
- 대리님, 무, 물 드릴까요?
- 아뇨, 괜찮습니다.
왜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지.
- 아뇨, 아뇨.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갈 거 같아.
-
목요일. 벌써 일주일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생각 정디로 아직 제대로 안 된 거 같은데, 어떻게 시간은 이리도 빠른 건지.
- 내일 워크샵 잊지 않으셨죠? 다들 오늘 안에 일 끝내주셔야 해요.
덕분에 회사는 바쁘게 움직였다. 다들 작은 대화도 없이 제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문대도 똑같았다.
- ...!
순간 눈이 마주칠 뻔해서 고개를 빠르게 숙였다. 이게 뭐야, 짝사랑하다 들킨 어린 애도 아니고.
금요일. 오전부터 오후까지의 일정을 소화하고 다 함께 고기를 구워먹으며 회포를 풀고 있었다. 문대는 굳이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그러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현을 관찰했다. 또 취하면 이번엔 집으로 데려다주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 네?
- 그... 팀장님한테 혼날 때 대리님 탓했잖아요.
- 아, 괜찮아요. 이제 다 지난 일이잖아요.
- 그래도!!! ...죄송합니다. 진짜.
술에 취한 사원이 문대를 붙잡고 사과했다. 회식 자리에서도 이렇게 취한 건 못 본 것 같은데 나름 신났던 걸까.
- 아니, 팀장님은 결혼하셨다면서 왜 사진도 안 보여주세요오, 저 진짜 궁금하다니까요?
- 함부로 보여주고 싶지 않거든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때 보여줄게요.
- 대체 얼마나 소중하신 거예요!
- 말로 표현 못할 만큼 소중해서 그래요.
...
- 대리님, 여기 한 잔...! 어라?
- 제가 술 사올게요.
- 아니, 그런 거는 제가 사오는 거예요!
- 저 어차피 술도 많이 안 마셨어요. 멀쩡한 사람이 다녀와야죠.
- 괜찮습니다. 앉아서 쉬고 계세요.
말단 사원이 난감한 기색을 보였지만, 문대는 바람을 쐬기 위한 핑계로 직접 심부름을 자처했다. 대충 살아있는 인원을 체크했다. 그렇게 많이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아.
그러고 보니까 담배 안 피운지도 꽤 됐네.
- 흠.
몇 병 사야 하지. 그래도 목적이 목적이다보니, 어느 정도는 사가야 할 텐데.
- ...
혼자 남게 되니 생각이 정리되기는커녕, 오히려 늘었다. 일단 자신도 술을 어느 정도 받아 먹었고, 방금 전 같은 장소에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
그래서 신재현이 한심해?
- ...
아니, 하나도.
- ...팀장님?
- 아니, 왜... 핸드폰을 두고 가요.
- ...금방이 아니잖아요.
물론, 중간에 좀 노닥거렸지만, 이렇게까지 숨이 벅찰 정도로 걱정할 수준은 아닐 텐데.
- 사람들이 저 많이 찾아요? 술 왜 이렇게 늦냐고?
- 아뇨, 그런 소리는 안 하죠.
- 나는 걱정하니까요.
들고 있던 소주병들이 서로 미세하게 긁히는 소리가 났다. 재현은 자연스럽게 품에 있던 것을 가져갔다. 먼저 앞장섰다.
- 얼른 들어가요.
- 그럽시다.
굳이 나란히 걷지 않고 문대는 잠시 멈춰서 재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재현이 뒤를 돌았다.
- 무슨 일 있어요?
혹시 발이라도 삔 건가 싶어서 걱정하듯 물으며 다시 되돌아왔다. 문대는 뜬금없이 말했다.
- 다시 시작할래요?
- ...
- ...
- 네?
- 우리 다시 시작할까?
- 다시 시작이라는 건...
- 처음부터 연애해볼래?
그런데 그냥 너의 말을 믿기로 했어.
- ...
- 너가 나 계속 붙잡을 거라며.
아무런 소통도 없이 허무하게 끝나 억울한 관계였다면, 다시 시작할 때는 다를 지도 모르니까.
- 야, 야...!
망설임없이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문대를 끌어안은 덕에 귀가 아플 만큼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 내가 이 순간을 너무 바랐어요.
- ...
- 진짜 거짓말도 아니고, 취해서 하는 것도 아니죠?
- ...나 애초에 취하지도 않았어.
으휴. 문대가 팔을 뻗어 재현의 등을 토닥였다.
- 주머니?
- 응, 왼쪽.
문대는 손을 넣었다. 뭔가 작은 상자가 손 안에 들어왔다. 이런 크기라면 하나 밖에 없을 텐데, 설마. 품 안에서 벗어나 정체를 확인했다. 역시나.
- 이거...
- 비슷한데 좀 달라요.
- 이 날을 위해 항상 품에 지니고 다녔어요.
- ...
- 새롭게 시작하는 거니까, 더 좋은 거 해주고 싶기도 했고.
반지 하나를 꺼내서 문대의 약지에 끼워주었다.
- ...진짜 바보 같네.
- 바보 같으면 뭐 어때요.
제게도 끼워달라는 듯 내밀었다. 이상하게 손이 떨렸다. 문대는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워주었다. 재현은 다시 케이스를 돌려받아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반지 낀 손끼리 잡았다.
- 네
- 문대 씨.
- 네.
- 자기야.
- ...예.
- ...여보.
마지막 호칭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여보라, 아직 거기까진 조금 이를 수도. 그래도 다시 불리고 부를 날이 오겠지.
- 사랑해요.
- 응.
- 이제 들어갈까요?
- 그나저나 이거...
- 같이 다녀와요.
- 그래.
기분 좋은 밤이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