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엋문 장례식장에서 예의없는 행동이 부활이라고?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한 연인이 갑자기 관을 두들기고 나왔는데 고등학생으로...

장례식장에서 예의없는 행동이 부활이라고?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한 연인이 갑자기 관을 두들기고 나왔는데 고등학생으로 회귀했다고? 그래서 이 사람이 내 미래 연인이라고?
- 이름으로 불러봐요, 신재현. 하고.
- 아저씨 진짜 저한테 왜 이러세요.
아니, 이 아저씨 저랑 띠동갑인데요?
박문대가 죽었다. 사유는 교통사고. 운전자 과실 100%. 퇴근한 후 주차장에서 일어난 사고였다. 빠르게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이미 손 쓰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연인인 신재현에게 의료진은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 ...
- ...
- ...
그렇게 영안실에 시신이 안치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쿵쿵쿵.
- ...?
쿵쿵쿵.
- 얼른 관 열어요!!!
가장 비현실적인 상황이자,
- ...크흡,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어쩌면 가장 바랐을지도 모르는 현실과 마주했다.
- 손 잡아줄게요. 일어날 수 있어요?
- ...아, 네.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아까도 말했지 않은가.
- 조심히 나와요.
이게 가장 바라던 현실이었다.
- ...그러니까 10년 뒤에 제가 죽어서 관까지 들어갔는데 갑자기 그 관에서 부활했다는 거죠?
- 네.
- 무슨 말도 안 되는,
문대는 현재 상황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차분하게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고 하지만 이게 정말 말이 되는 일인가. 머리가 정말 지끈거렸다.
- 지금 내가 한 말에 거짓은 단 하나도 없어요.
- 아, 네...
그랬더니 내가 있던 곳은 관이었다. 그래, 그 시신이 들어가는 관 말이다.
- 진짜 이게 무슨,
- 혼란스럽다는 거 이해해요.
그게 어쨌든 중요한 건 아니고, 내가 언제 돌아갈지는 모르겠고, 당분간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거 아닌가. 죽는다고 해도 그건 미래의 일이니까 원래 시간으로 돌아가서 조심하면 되는 일이고...
- 네.
- 아저씨?
소설에서나 본 적 있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겠다고 하는데 어째 연인이라는 이 사람의 표정이 왜 떨떠름한 것처럼 보이지. 분명히 신재현이라고 이름을 또박또박 알려준 걸 들었는데.
- ...이름 맞지 않아요?
- 아저씨라뇨.
아니, 그게 기분이 나쁜 거였어?
- ...30살이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 네.
- 저 18살인데요.
- 알아요.
- 예? 혹시 양심이, 아니, 그러니까,
양심이 뒤졌다고 할 뻔했다.
- 어떤 관계였든 간에 지금 관계에서는 이 호칭이 가장 적절한데요.
- ...
- ...뭐, 선생님이라고 할까요? 공경이 필요하세요?
- 아니, 아저씨 입장에서는 얼마나 애틋한지 알겠는데 제가 그 초면이라는 것도 좀 이해해주시겠어요?
- ...
- 자기야, 라고 어떻게 합니까! 미쳤어요?
- 자기야, 라고 해달라는 건 안 바랐어요.
- 예?
그러면 진짜 그 아저씨가 문제였냐?
- 원래도 당신은 낯간지러운 호칭을 잘 쓰지 못했거든요.
- 어쨌든 그냥 아직 현실감이 없어서요. 그래서 이렇게라도 살아있다고 믿고 싶어서 그래요.
이렇게 말하니까 좀 불쌍한...
- 이름으로 불러봐요, 신재현. 하고.
- 아저씨 진짜 저한테 왜 이러세요.
에라이.
- 음?
- 설마, 그, 아니... 하.
미쳐가지고 30대가 10대 청소년 붙잡고서 어쨌든 같은 사람이니 연애하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동거까지 할 정도로 사랑하는 연인이 죽었다는데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 하하하!
- ...저기요?
갑자기 또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지금 여기서 웃을 포인트가 하나라도 있었나? 전혀 아닌데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설마 사실 동거 중인 연인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일방적인 스토커였다던가.
- 교복 입은 당신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정말 귀엽다고 생각하긴 해요, 이건 당연히 진심이죠.
- ...예.
- 그런데 어쨌거나 알맹이가 18살이라는데 미쳤다고 애인 대행이라도 시키겠어요?
- 예, 정확히 꿰뚫어 보셨네요. 혹시 저 상대로 그런 생각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 아저씨 소리요?
- 뭐, 그렇다고 할게요.
- 대체 뭐라고 불러드려요? 형?
뭐, 솔직히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은 없으니까. 게다가 10년 후의 나랑 사귀는 중이라고 했으니 2살 차이 아닌가?
- 아뇨, 차라리 이름 불러요.
- ...대체 원래 뭐라고 불렸는데요?
- 이름으로 불렀어요.
- 연장자 아니에요?
- 네.
- 그냥 냅다 이름으로 불렀다고요?
- 뭐... 야, 라고 한 적도 있어요.
- ...
- 이름은 제가 뭐, 도저히 입밖으로 내기에는 좀 그렇거든요?
- 괜찮은데.
- 아니, 제가 안 괜찮다고요.
12살이나 많은 사람한테 냅다 신재현 씨, 라고 하는 것도 예의에 좀 어긋나고,
- 일단 그, 죄송한데 저희 언제 처음 만났죠?
- 대학교에서요.
- 재수하신 적 없으시죠?
- 재수하게 생겼어요?
-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진짜 내가 이 사람을 이름으로 막 불렀다고 해도 초면부터 그러진 않았을 테니까,
- ...
- ...차라리 선배님 어떠세요.
같은 과가 아니라면 선배님이라 불렀을 것도 아니지만, 만약 그랬다면 첫만남 때 차라리 그리 부르지 않았을까. 재현이 선배님 소리에 대답이 없자 문대가 이것도 아니냐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 그래요.
- 예? 저기요?
- 아뇨, 선배님이요.
생각보다 정답이 쉬웠네.
- 나도 오랜만에 후배님이라고 불러봐야겠네.
- ...네?
후배도 아니고 후배님은 대체 무슨 단어야? 문대가 의문을 표하자 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회사에 좀 다녀와야 해요. 며칠 째 못 가서,
- ...
- 집에 있는 거 아무거나 다 꺼내 먹어요.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뒤져봐도 좋고요.
- 그러다가 돈이라도 털어가면 어쩌려고요.
- 하하, 후배님이?
- 뭐, 털어요. 어린 나이에 돈 좀 만져보고 싶을 수 있지.
- 저한테 지금 절도를 권유하시는 거예요?
- 원하면 하라는 건데 왜요?
- 어쨌든 내가 아는 후배님이라면 한 번 해봐? 이런 생각으로 욱할 순 있어도 절대 엄한 짓은 안할 거라는 거 잘 알아요. 뭐, 그렇다고 해도 정말 도둑질을 결심하면 말리진 않을게요. 차라리 지금 카드라도 줄까요?
- 거봐.
꿰뚫린다는 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문대는 사양했다. 나가봐야 한다는 게 거짓은 아니었는지 재현이 서둘러 신발을 신었다. 현관까지 쫓아온 문대가 떨떠름하게 있으니, 재현이 품에서 무언가 꺼냈다.
- 됐다니까요.
- 먹을 거 없으면 나가서 사먹으라는 거죠.
- 그냥 안에서 해결하겠습니다.
- 혹시 모르니 두고 갈게요. 그리고 카드키는 침대 옆 서랍 첫 번째 칸에 있을 거예요. 나갈 일 있으면 쓰고요.
정말 이것저것 다 털어서 도주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렇게 다 내어주는 거지?
- 저기요.
- ...
- 아니, 그 선배님.
- 응?
- ...저랑 뭐, 평생 살 거 아니고, 제가 그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 지금으로선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게 맞는데 이렇게 데리고 있어서 뭐하시려고요?
- 일단 살아있다고 믿을 수 있잖아요.
- ...예?
아니, 그 사람 죽었다면서. 물론 나도 10년 뒤에 너 죽는다. 라고 하면 당사자로서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고 현실을 못 받아들인다지만,
- ...
- 일단 밥 챙겨 먹어요. 배고프겠네. 저녁에 올게요.
그렇게 재현이 가버렸다. 문대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래, 내가 나중에 돌아갈 수도 있겠지.
- ...진짜 다 모르겠네.
- ...
물론 확인이 더 필요했다. 저 사람이 내 미래 연인인 거? 그래, 잘 알겠다.
- ...이걸 죄송합니다, 라고 해야하는 건지.
문대는 재현이 말해준 제 방에 들어와 책장을 바라보았다. 남의 방을 뒤지는 쪽이 맞는데 저쪽에서 동일인물이라고 해주니 이건 뭐, 나 자신에게 사과해야 하나?
- 얼마나 오래 사귀셨는지 확인 좀 하겠습니다.
그래도 정말 스토커는 아니겠지. 설령 그렇다고 하면 뭐,
- ...
당장 도망가고.
지금 입고 있는 셔츠를 슬쩍 잡아당겼다. 아쉽다는 건 아니었다.
책장을 뒤적거렸다. 졸업 앨범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했다. 가장 아래 칸에 숨어있던 앨범에 쓰인 학교명은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가 맞았다. 졸업 멀쩡하게 했네. 뭐, 사고친 적도 없지만.
- 살다가 한번쯤은 해킹 당하겠네.
10년 뒤에도 비밀번호는 똑같이 쓰네.
살면서 언젠가 알아서 하겠거니,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문대의 시선은 노트북 옆에 얌전하게 놓인 제법 비싼 카메라에 닿았다. 이거 켜지려나.
- 아, 됐다.
처음 써보는 탓에 버튼을 누르는 게 조금 어색했지만,
- ...아.
아무래도 저쪽을 스토커라고 의심한 건 좀 취소해야할 것 같았다.
- ...
이쪽에서도 상당히 많이 사랑한 모양이었다.
재현은 8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했다. 소파에서 TV나 보고 있던 문대가 현관까지 나와서 인사했다. 무작정 떠날 사람도 아니었고, 신발을 보고 가지 않았다는 걸 알았지만 어쨌든 박문대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게 재현은 제법 기쁠 수밖에 없었다.
- 밥은 먹었어요?
- 아뇨, 원래 그렇게 잘 챙기진 않아요.
- 예?
문대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재현이 넥타이부터 풀면서 집안으로 들어오며 별거 아니라며 말하니 문대가 방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붙잡았다.
- 그러니까, 그,
- 음?
- 일단 씻고 나오세요.
- 왜요.
- 아뇨, 그냥...
- ...
- 진짜 똑같아서.
금방 나오겠다며 재현은 방으로 들어갔다. 문대는 방금 너무 도를 지나친 게 아닌가 싶어서 닫힌 방문을 보며
- 사람이 신세만 질 수는 없으니까.
-
우선 밥을 먹였다. 다행히 어렸을 때부터 주방과 담을 쌓은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혼자 요리도 잘 해먹었던 탓에 내 실력을 의심하진 않았다.
- 커피 마셔요?
- 네.
- 공부할 때 카페인 좀 필요해요?
- 뭐... 마시면서 하는 게 편하긴 해요.
- 아, 혹시 어릴 때 쓴 거 잘 못 마시면,
- 아뇨, 원래도 이것만 마셨어요. 감사합니다.
- 그런데 옷은 왜 안 갈아입었어요?
- 아.
아직까지 교복 차림인 문대를 보고 재현이 물었다. 문대는 아, 하고 작게 탄식했다. 이 차림이 편하다고 우기는 건 당연히 거짓말이지만
- 그냥 좀...
- 내 옷 빌려줘요?
- 아뇨, 그냥 전 이대로 자도
- 일주일 내내 교복 입고 있을 건 아니잖아요.
- 일주일이라고 하니까 하는 말인데, 어쨌거나 제가 평생 여기서 살지, 금방 돌아갈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 그렇죠.
- 어떤 방안이요?
- 정말 28살의 박문대로 살아가야 할지, 아니면 기록도 없는 채로 불법 체류자처럼 살아야 하는 건지.
이곳에 18살의 박문대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정말 양자택일이었다.
- 돌아가는 게 가장 유력한 쪽이 아닐까 싶기는 해요. 현재 과거에는 박문대가 없어져 버렸으니까.
- ...
- 그렇죠.
- 뭐, 그래서 언젠가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하긴 해요.
의외네. 돌아가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하긴 나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죽지 않게 조심해서 살아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긴 한다.
- 선배님이 원하시는 건 제가 빨리 돌아가서 미래의 제가 죽지 않도록 바로잡는 거겠죠?
- 죽지 않길 바라는 건 당연해요.
- 저도 서둘러 돌아가는 게 맞는 것 같긴 해요.
그런데 이대로 영영 안 돌아가면 어떻게 하냐.
- 그, 만약에 제가 영영 돌아가지 못하면...
- 그러면 평생 여기서 살게 되는 거죠.
- 그때를 대비해서 뭔가 해결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 '여기서' 살면 되죠.
-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떻게 계속 신세를 집니까. 어쨌거나 남이고...
- 후배님은 그래도 돼요.
- 예?
재현이 가볍게 웃었다. 그게 약간 실소처럼 보였다. 뭐랄까. 당연한 걸 굳이 말하지 말자는 느낌이랄까.
- ...
- 여기서 끝까지 살아야 한다면 나도 끝까지 곁에 있어줄게요.
- ...
- 그러다가 언젠가 성인이 되고, 10년이 지나고, 갑자기 후배님 쪽에서 내가 좋아졌다고 하면, 그때 다시 연애해도 괜찮고.
- 맞다. 침대가 하나라서 그건 후배님이 쓰면 될 것 같아요.
- 아뇨, 그럴 필요는...!
- ...
- 대접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들여요.
재현이 먼저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 침실에 갈아입을 옷도 놔줄게요.
- ...
진짜 뭐냐고, 저 아저씨.
며칠 동안 이 집안에 틀어박혀서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좀 멍하니 있었다는 게 맞았다. 신재현이라는 사람이 아침에 출근할 때 밥을 챙겨주고 저녁에 돌아오면 또 같이 차려놓은 밥을 먹고... 그러니까 이건 뭐,
- ...가정부?
대우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물어본 적은 없지만,
- ...그런데 이게 맞나?
- 음...
진짜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냐. 사망 신고는 안 된 상태니까 진짜 강제로 10살을 더 먹어야 하나. 그래서 다니던 회사는 어떻게 됐지? 사고가 난 시점에서 정리가 됐나?
- ...모르겠네.
문대는 설거지를 다 끝마치고 고무장갑을 벗었다. 기억을 하지 못할 것 같으면 본능이 기억할 만큼 어떻게든 머릿속에 쑤셔 넣으면 될 일이 아닌가.
- 그래서 말인데 도와주세요.
- 응?
- 저는 살고 싶어서요.
재현이 돌아오고 함께 저녁을 먹으며 문대가 운을 띄웠다. 재현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문대는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이곳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라며 낮동안 정리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 그렇죠.
뭐, 정말 밑져야 본전이고 이 방법이 통할 거라고는 현실적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이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수법이 먹힐지 또 모르는 일 아니던가.
- 음...
- 그래요.
- 에?
어째 말이 뭔가 이상하긴 한데, 긍정의 의미니까 따지고 들 건 아니지. 그래서 어디부터 알고 싶냐는 재현의 말에 문대가 잠시 고민했다.
- ...저희, 그러니까 저희라고 해야 하나. 여튼 미래의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 연애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거죠?
- 왜 남이에요, 본인이면서.
그거야 그렇긴 한데 지금은 차라리 분리해서 보는 게 맞지 않나.
- 귀여워서 좋네. 선생님한테 첫사랑 이야기 들려달라는 학생 같네요.
- 어쨌든 사랑 이야기가 굳이 궁금하다는 건 아니고, 일단 그거부터 아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죽게 된 자세한 경위요.
재현이 그 말에 잠시 멈칫하면서도 문대를 빤히 보았다. 죽음을 건드리는 건 너무 그러했나? 아니, 그렇다고 해도 저쪽은 내가 동일인물이라고 아예 인정했는데 그런 내가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건 상관없이 않나.
그래도 곧장 말을 꺼냈다.
- 그냥 평소와 다를 거 없었던 날이죠. 후배님은 항상 날 챙겨줬으니까.
- ...
- 제가 좀 늦는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더라고.
- ...
- ...
- 마침 냉장고가 비었다고 퇴근하면서 마트도 들르면 되겠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평소보다 당연히 귀가 시간이 늦어졌겠죠.
- 지금 살고 있는 이 아파트 단지 내 주차장은 그렇게 여유롭진 못해요.
- ...
- ...
- 평소에 일찍 퇴근하는 당신은 항상 주차하던 장소가 있었지만, 제 시간에 맞춰서 늦게 도착했다보니, 그 자리가 이미 채워져 있었던 거죠. 그래서 주차장을 돌아다녀서 자리를 찾았고, 차에서 내려서 걷다가...
- 뭐, 그래요.
그 이후로는 생략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캐물을 것도 없었다.
- 제가 그 날 주차장에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면허를 따지 말까?
- ...
- ...
- 하하하!
- ...
- 너무 깜찍하다.
- ...예?
아니, 진짜 뭐만 하면 귀엽대. 미친 거 아니냐? 저런 말에 면역이 있을 리가 없으니 괜히 얼굴만 화끈거렸다. 문대는 제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듯이 얼굴을 가렸다. 진짜 맙소사다.
- 그냥 전부 다요. 어린 당신은 또 다른 느낌이네요.
- ...아, 예.
그래, 당신이 좋으면 된 거지. 10년 후의 나랑 연애한다는데 과거에 불과한 내가 저기다가 무슨 말을 하니.
- 제 발상이 우습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 비웃은 건 절대 아닌데.
- 예, 뭐 그런 것 같긴 해요.
- 사고가 났던 주차장 좀 갈 수 있나요?
- 네?
- 아무래도 직접 봐야 제 몸이 위기감이라도 느끼지 않을까 해서,
- 예?
- ...거기 다시 가는 건 안 돼요.
트라우마 같은 건가. 말리는 건 당연히 이해가 되는데, 그래도 직접 현장을 가보는 게 현 시점에서 가장 좋은 방법같은데...
- 말리는 건 이해하지만, 어쨌든 저는 확인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 살리고 싶다면서요.
살리고 싶다는 말에 재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갈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그러면 같이 가요.
- 그래요, 밥도 다 먹었으니...
- 지금 말고,
- ...
- 낮에.
어떻게든 같은 상황을 피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다음 날이었다. 다행히 주말이었기에 재현이 굳이 출근을 안 하겠다고 할 필요도 없었다. 여유롭게 점심도 먹고, 문대는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고 보니, 잠옷만 줬는데 주차장을 나가더라도 뭘 걸치고 나가야 할 텐데. 문대가 고민하는데 재현이 제 니트 가디건을 주었다.
- 이거 입어요.
...크네. 이게 어른이냐.
- 나간 김에 후배님이 다녔던 회사 앞이라도 잠깐 가볼래요?
- 네?
- 위험하다고 해서 계속 피해도 변할 일이 아닌 걸 알고요. 후배님 말대로 나도 따라가려고요.
그렇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성큼성큼 앞장서던 재현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 여기인가 보네요.
문대가 먼저 말하며 슬쩍 재현의 옆으로 왔다. 재현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문대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 ...
내가 직접 겪은 죽음이 아니라서 그런가. 평범하게 다가왔다.
- 괜찮으세요?
- 확인은 했으니까 밖으로 나갑시다.
그런 사람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지.
밖으로 나가서 회사 앞도 가보았지만, 정말 감흥이 없었다. 아까도 그랬듯 직접 겪은 게 아니라 정말 그저 남의 일처럼 다가왔다. 나 진짜 도움도 안 되네. 같은 사람이라는 것 말고는 애물단지잖아. 이래서 미래를 바꿀 수나 있는 건가. 그냥 순리대로 죽어버리는 게 아닌지.
- 왜 그래요?
- 아뇨, 그냥.
위기감을 어떻게 해야 느끼려나. 차라리 손이라도 혼자서 바들바들 거리면 좋을 텐데. 문대가 제 손을 괜히 쥐었다 펴보았다. 운전하던 재현이 흘끗 보더니 말했다.
- 내일은 어디로 갈까요?
- 네?
- 그냥 그러고 싶을 것 같아서요.
- ...
아직 해가 지지 않아서 지금 가도 괜찮을 텐데, 돌아오면 저녁일 거라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거겠지. 혼자 출퇴근은 잘하면서 내가 그러는 건 겁이 난다 이건가. 문대가 잠시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또 진전이랄 건 없었다. 마치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냥 그렇구나, 하는 느낌? 나 이렇게까지 무던한 사람이었나. 좀 필사적으로 살아야 할 텐데 왜 이러는 건지.
오늘도 맛있게 먹었다면서 재현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 ...뭐가 문제지.
이러다가 몇 년 더 일찍 돌연사하더라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겠어. 사실 저 사람이 너무 잘해주니까 안일해진 건가.
- 나 참.
그나저나 내가 정말 언제 돌아갈까. 역시 관짝을 열고 다시 들어가기라도 해야 하나. 그게 이동 장치였으면 어떡하지. 자신의 발칙한 상상력에 바로 헛웃음을 터뜨리는 문대였다.
차라리 옥상에서 떨어져서 이세계로 가는 게 더 현실적이겠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누구누구가 사색이 돼서 뜯어말릴 게 뻔하지만 말이다.
- 흐음.
갑자기 이 순간에 냅다 돌아가면 어떻게 하지.
- ...
차라리 이게 좀 직관적이지 않나.
[28, 0316, 교통사고]
이러면 좀 알아보려나. 문대는 제 왼손에 끄적인 낙서를 보고 무얼 더 추가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이거 손바닥이 모자란데. 문대는 손을 뒤집었다.
지금 당장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거? 교통사고가 난다는 거랑, 그 날짜인데, 좀 더 자세하게 파고들려면...
[애인 신재현]
동거인이라고 쓸 걸 그랬나. 동거 중 아파트 주차장에서 사고가 난다고 하기에는 이것도 공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너무 생각없이 썼나.
- 네?
그때 재현이 문을 두들겼다. 한손에는 과일이 담긴 접시가 들려있었다.
- 침실에 없다 했더니 여기 있었네요.
- 아, 네.
- 오늘 과일을 안 먹어서 생각난 김에 가져왔어요.
문대가 감사하다면서 접시를 받았다. 그때 얼핏 보이는 검은 무언가에 재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 네?
- 손에 뭐가 많이 묻은 것 같아서,
- 아뇨, 별거 아닌데요.
- 안 닦여서 그러는 거면,
- 괜찮습니다!
아무리 지금 저 사람보다 나이가 12살이나 어리다고 하지만 그래도 18살이었다. 손바닥에 냅다 낙서했다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문대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 됐어요!
손을 가져가려고 하니 문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덕분에 손바닥이 그대로 보였다. 아무리 봐도 하얀 피부에 검은 무언가가 거의 덮은 수준으로 있기에 재현이 이상하다고 여겼다.
- 뭘 적기라도 한 거예요?
[애인 신재현]
재현은 거꾸로 쓰여있는 글자를 못 읽진 않았다. 한 번에 알아보고 잠시 반응을 하지 못했다.
- ...제발 그만 보세요, 부탁입니다.
- ...
- 아니, 그냥 차라리 몸에 새겨두기라도 하면 기억하지 않을까 해서, 그냥 좀 써본 건데, 그러니까 이상한 의도 그런 거 전혀 아니고 손바닥에도 잘 보면 사고에 대한 게 적혀 있거든요?
재현은 그대로 매직을 집어들고 문대의 손등 위에 크게 하트를 그렸다.
- 이렇게 해야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요?
...진짜 순간 혀라도 깨물어서 당장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이후로 며칠동안 이 아저씨의 모습은 뭐랄까, 적극적이었다. 쪽팔렸다고 생각했던 모습이 간절하게 다가오기라도 했는지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나오면 항상 손바닥에 28, 0316, 교통사고를 그대로 적어주었다. 물론 손등에 애인 신재현도 빼놓지 않고 말이다.
- 네.
이건 제발 빼줬으면 하는데, 하트까지 빼지 않는 걸 보면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모양이다. 그래, 매일매일 적어주면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 처음에는 왜 이러냐고 따졌지만, 며칠 반복되니 문대도 그냥 받아들였다.
- 굳이 번거롭게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 ...
- 아마 6시 퇴근이니까 시간 맞춰서 1층으로 내려와요.
- ...네.
그리고 밖을 돌아다니는 일이 좀 늘었다. 데이트라는 건 아니었다. 어쩐지 10년 뒤에 박문대랑은 주로 이랬다는 것을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그게 좀 신재현이란 사람을 절대 잊지 못하게 각인시키는 것 같았다. 그래, 어쩌면 사고와 직결이 되니까 기억하는 매개체라는 역할로 좋은 것 같긴 하다. 그렇기에 문대도 군말없이 따랐다.
다만 이 모든 걸 직장을 왔다갔다 하면서 시간을 따로 투자하는 것이기에 피곤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본인은 소파가 편하네, 어쩌네 하지만 결국 침대도 집에만 있는 내가 뺏지 않았나.
- ...
문대는 그러다 제 손바닥을 보았다. 자신이 썼을 때와 달리 손과 고개, 둘 중 하나라고 꺾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이 글씨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다 피식 웃었다. 그래, 다 긍정적인 거잖아.
평화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이 생활에 많이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뭐랄까. 애인이랑 동거하는 느낌은 아니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친한 형 정도? 딱 그렇게 다가왔다. 뭐, 모르는 아저씨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지. 지난 주말에는 아쿠아리움도 다녀왔다.
- ...이렇게 살아도 되나.
- 왜요?
- 아뇨, 혼잣말입니다.
소파에 누워서 늘어질 정도였다.
- ...
문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 필요한 거 있어요?
- 제 차는 어딨습니까?
- 응?
- 아니, 제가 차에 내려서 사고가 났다면서요.
- 네.
- 그러니까 차는 멀쩡하게 주차되어있는 거 아니에요?
맞는 말이었다. 지나가던 차끼리 부딪친 것도 아니고 주차장에서 걷다가 치였으니 제 차는 멀쩡한 게 분명했다.
- 아니면, 사고낸 차량이 어떤 건지...
- ...
- 저기요, 선배님?
- 갔다올 거면 지금 같이 다녀와요.
재현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책을 내려놓았다. 역시나 저녁에 움직이진 말자는 거였다.
재현은 사고가 났을 때 유품이라고 받은 문대의 차키를 꽉 쥐었다. 신발을 신고 나가는 문대를 바라보며 이럴 때마다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차장에 보내는 게 싫어서 밖으로 나갈 때도 차를 빼올 테니 지상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차문을 원격으로 열었다.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소리가 들렸다. 문대가 먼저 앞장섰다. 그 뒤를 바짝 붙었다. 제 차를 확인한 문대가 제법 잘 벌었냐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그럼요.
신기한 모양이었다. 역시 이런 부분을 보면 또 새로워서 잠시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기도 하였다. 차를 열어볼 생각하지 않고 창문으로 어떻게든 안을 들여다 보려는 문대였다. 재현이 뭘 굳이 그러냐면서 직접 열어주었다.
- ...
차량 용품이나 비상용 우산을 제외하면 딱히 없는 것 같네. 더 뒤질 것도 없이 재현은 바로 트렁크를 닫았다.
- 지금 뭐하는 거예요!!!
- ...아니, 그,
- ...
- ...감사합니다.
안쪽에는 흥미를 잃었는지 금방 차 헤드라이트를 앞쪽에서 구경하던 문대가 지하 주차장에서 속도를 줄일 줄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치일 뻔하였다. 트렁크 쪽에 있던 재현이 튀어나가서 그를 확 끌어당기며 소리를 질렀다.
- ...저기, 선배님?
- ...
-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해서,
- 아뇨, 후배님이 부주의했다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재현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문대는 그게 당연히 트라우마를
- ...
- 선배님?
- ...
- 선배님.
- ...네?
- 진짜 괜찮으세요?
- ...진짜 괜찮냐고요.
- 괜찮아요.
생각보다 답이 단순했다.
문대가 보기에 재현은 뭔가 의욕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매번 아침마다 글씨를 쓰지도 않았고, 무리해서라도 어디 가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랑 똑같았다. 그 일이 그렇게도 큰 충격이었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인 건가.
그러니까 답답했다. 죽는 건 내 쪽인데 사실 힘들어서 끙끙거리는 건 나여야 하는 거 아닌가. 어차피 바꾸지도 못하니 죽으라는 거야, 뭐야. 문대는 직접 손에다 글자를 새기면서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박문대의 방에 있는 책장을 다시 뒤졌다.
- 흠.
이거나 물어볼까.
문대는 졸업장을 다시 원래 자리에 꽂아두고 쭈그려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
저녁이 되었다. 재현은 평소처럼 칼같이 퇴근하였다. 잘 있었냐, 밥은 먹었냐, 이렇게 물었지만 내일 어디 가자고는 또 말하지 않았다. 옷 갈아 입으러 들어간 그를 보며 문대는 저녁 먹고 묻기로 하였다.
- 저기요, 선배님.
- 네.
- 제가 진짜 죽을 생각 없거든요?
- 알아요.
- 그런데 며칠 전 있었던 일때문에 그쪽이 상당히 무기력해진 것 같아서요.
- 아니에요, 그렇게 보였다면 사과할게요.
- 더 알고 싶은 게 있거든요.
- 어떤 거요?
- 대학 때 이야기요.
- 아.
그 말에 재현이 뭔가 내려놓은 듯한 웃음을 보였다. 갑자기 뭐지? 사실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구는 것 같았다.
- 음... 어디부터 이야기를 하지.
- 편하신 대로요.
처음에는 흔한 이야기였다. 전공 교수님이 어떻고, 동기들은 이러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나와 같은 과 선후배 사이가 맞았다.
- 우리 대학교는 제법 경사가 심했어요. 그리고 공대 건물은 혼자 떨어져 있어서 더 멀리 가야 했고,
- 학교 다니기 진짜 싫어했겠네요.
-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긴 하네요.
- 뭐, 그러다보니 공대끼리 친하긴 했어요. 특히 시험 기간이면 타과 학생들이 거기까지 올 일도 없으니까.
아무래도 경사가 심한 학교에서 더 올라가야 한다는데 거기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게 아닌 이상,
- 편의점도 공대 건물에 따로 있고, 교내 카페도 그렇고, 어쨌든 있을 게 다 있으니 우리도 나갈 이유가 없고,
- 열람실은요?
- 뭐, 나쁘지 않긴 하네요.
- 그러다 빈 강의실 중에 열려 있는 곳이 있으면 가끔 사용하기도 하거든요.
- 네.
- 거기 가지 마요.
- 왜요? 귀신 나온대요?
- 아니, 그건 아니고.
강의실이 너무 더럽거나, 사람이 안 가는 만큼 관리를 안 해서 많이 낡았다거나
- 거기 가면 나 만나거든.
심장이 저린 것 같은 느낌에 먹먹했다.
- 나를,
- ...
- 사랑하지 않아도 돼요.
- 모르겠고,
- ...
- 하나 남았으니까 이거 드세요.
난 살고 싶다. 그러니까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
문대는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 많은 생각에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 ...
아까부터 저릿한 것이 몸을 자꾸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정말 뭘까.
[28, 0316, 교통사고]
문대는 손을 뒤집었다.
[애인 신재현]
이건 제 손으로 쓴 것이었다. 어느 순간 너무 익숙해졌다.
당신은 신재현을 얼마나 사랑했냐고.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제법 길었지만, 어느 때보다 현실감이 있었다. 자신은 교실이었고, 대체 언제까지 잘 거냐면서 친구들이 깨워주었다. 멍하니 수업을 듣던 문대는 펜을 돌리다가 문득 교과서에 끄적였는데,
[애인 신재현]
저도 모르게 쓴 그 낙서에 흠칫하고 말았다.
[28, 0316, 교통사고]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이후로 눈을 뜬 문대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저가 있는 장소를 확인했다.
문대는 지난 꿈을 생각하며 이불을 꽉 그러쥐었다. 어쩌면 나는 과거라도 돌아간다고 해도 이 모든 걸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얼른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사람이 없다는 느낌을 확 받았다. 그러니까 거실에 그냥 사람이 없다는 게 아니라 이 집에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문대는 주방 쪽을 보았다. 식탁에는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당분간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요 미안해요]
그렇게 재현은 며칠 째 보이지 않았다. 항상 여유롭게 출근하던 사람이 눈을 뜨기도 전에 일찍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마주치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면 더 자라면서 침실로 돌려보냈다. 대체 밖에서 무얼 하는지 몰라도 12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 ...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었다.
그동안 계속해서 꿈을 꾸었다. 그것은 반복이었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었다.
- ...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더니, 이건 아예 사랑하지 말라면서 벽을 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문대는 생각했다. 이토록 돌아가는 꿈을 자주 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곧 돌아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 더 자요, 왜 나왔어.
- 저 요즘 꿈을 많이 꿔요.
- 악몽이라도 꿔요?
- 아뇨.
- ...
- ...제가 돌아가는 꿈이요.
- 잘 됐네요.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문대가 다시 물었다. 재현은 느릿하더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재현은 또 그렇게 사라졌다. 문대는 텅 빈 집에서 더 이상 더 잘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라면서 행복하라니. 미래의 내가 바라는 게 과연 그거일까.
또다른 꿈이었다. 이번에도 학교였지만, 자신이 알던 곳은 아니었다. 낯선 공간, 그리고 그 틈에서 지나가는 다양한 사람들. 슬쩍 아래로 시선을 깔았을 때 보인 건 교복을 입지 않은 자신이었다. 아, 여기는 대학교구나. 무슨 강의인지도 모르고 멍하니 교수님을 바라보다가
문대는 홀린 듯이 어딘가로 걸어갔다. 다음 강의가 있었나. 그것까진 모르겠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 끝에 있는 가장 구석진 강의실이 눈에 들어왔다.
- ...
그리고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대는 달뜬 숨을 뱉으며 깨어났다. 어쩐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요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집에만 있는 주제에 컨디션이 안 좋아졌기 때문일까. 뭔가 뜨거웠다.
숨을 쉬는 게 조금 힘겨웠다.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에 몸이 너무 무거웠다. 분명 힘을 줄 수가 없고 가만히 누워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이유없이 바들거렸다.
- ...
그러니까 그건 악몽이었나.
결국 하루 내내 일어나지 못하고 앓다가 겨우 깊은 잠에 빠졌던 것 같았다.
- ...안녕하세요?
그곳에는 익숙한 누군가가 있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땀을 잔뜩 흘린 몸 덕분에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옆에 있던 협탁에 물과 함께 약이 놓여 있었다. 물컵을 들어내니 아래 깔려 있던 종이가 눈에 띄었다.
[일어나면 약 챙겨 먹어요]
문대는 바로 약과 함께 물을 들이켰다.
- ...아.
내가 만약 사라진다고 한다면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 ...
그 모든 건 정답이 아니었다. 날짜를 확인했다. 토요일. 재현은 회사를 간 것이 아닐 텐데. 문대는 신발을 신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자주 갔던 공원, 기억이 남는다는 아쿠아리움, 맛있다며 소개시켜주었던 식당, 그 모든 곳을 빠짐없이 둘러보던 문대는 지친 기색 없이 몇 시간을 쏘다녔다.
큰 외침에 재현이 돌아보았다. 문대가 저 멀리서 그를 불렀다. 늦게 돌아갈 테니 알아서 밥을 잘 챙겨먹으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알려주지도 않은 장소에 멋대로 찾아온 그가 낯설었다.
- 이봐요, 아저씨.
- ...
- 아니, 선배님, 아니다.
- ...
- 신재현 씨!!!
- 죄송한데 제가 누구 말을 잘 듣는 타입도 아니고, 내 결정에 따르는 타입이라서요.
- 그쪽 말을 못 듣겠거든요? 죽는 것쯤이야 내가 어떻게든 안 죽을 거예요. 나 믿으세요.
자신은 절대 죽지 않을 거라며 확신했다. 여기에 있던 기억도 소중한 기억이라며 반드시 떠올릴 것이라며 문대는 스스로 운명을 바로 잡아보겠다며,
- ...
- 얼마나 대단했길래 내가 그렇게 오래 연애했는지 직접 확인할 거라서, 반항 좀 하겠다는 겁니다.
당당하게 말하면서 문대가 퍽 웃었다.
- 제가 본 영화에서 그러더라고요.
- ...
- 미래에서 기다리겠다고.
- ...
- 그러니까,
- 당신 여기서 딱 기다리라고!
10년 전 연인은 역시 저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었다. 그 순간 자신이 알던 박문대와 겹쳐 보였다.
- ...후배님!
갑자기 문대가 재현을 향해 단번에 뛰어왔다. 재현이 휘청일 만큼 순식간에 뛰어든 문대가 그에게 확 안겼다.
- 다음에 만나면,
- ...
- 많이 사랑해주세요.
재현의 눈에서 눈물이 톡 떨어졌다.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내는 건 꼭 나라고 생각했는데, 난 그조차도 되어주지 못했는데
- ...그래요.
- ...
- 기꺼이.
용기내어 문대를 안아주었다. 그 순간, 제 품이 가벼워졌다. 안았던 팔이 점점 더 안으로 말려들었다. 재현이 자리에 멍하니 서서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툭툭 떨어진 눈물이 땅을 살짝 젖게 만들었다.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어느 새 완전히 해가 지고 붉은 강은 약간의 푸른 빛을 내며 어둠을 담아내고 있었다. 얼마나 여기 있었는지 감이 안 잡혔다. 다만, 아까보다 지나다니는 자전거와 차들이 현저히 줄었다는 거로 늦은 시간인 건 어렴풋이 알았다.
굉장히 오래 머물렀던 것 같았다. 떠난다고 해도 그게 언제라고 짐작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정말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마치 떠나지 못했던 망령이 어린 시절의 그로 변해서 제 앞에 나타난 걸지도 몰랐다. 미련조차 덜어낸 그는 다시는 보지 못하는 존재가 될지도 몰랐다.
- ...
아프면 안 되는데. 진짜 당신이 과거의 당신이라면 아프지만 말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나를 기억할 것을 기대하지 않겠다.
[당신 여기서 딱 기다리라고!]
귓가에 선명하게 맴도는 그 말은 제멋대로 끊임없이 되새겨졌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뱉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기라도 한듯, 일순간 강물이 기이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핸드폰이 울렸다. 재현이 주머니에서 꺼내 확인했다.
[대체 언제 와?]
재현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제 감각을 다시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 넣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쥐고 달려갔다.
설마, 정말로 설마.
- 대체 안 들어오고 거기서 대체,
- ...
- 뭐, 뭐해?
도어락 소리가 들린지 한참 지났는데 너무나 조용한 재현에게 누군가 다가와 현관 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재현이 멍해졌다.
- ...
- 아?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이라고 하지마.
말릴 새도 없이 바로 눈물부터 떨어뜨리는 재현을 보며 문대가 화들짝 놀랐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재현은 그를 보며 다리 힘이 풀릴 뻔하는 걸 겨우 참았다. 아무리 몇 번이나 다시 살펴봐도 앳된 모습의 그가 아니었다.
- ...아.
- ...
- 드디어 시간선이 제대로 맞물린 모양이네.
재현의 상태가 왜 이러는지 말해주기도 전에 스스로 먼저 깨달은 문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싶었더니만.
- ...신재현?
이번엔 재현이 먼저 달려들듯 그를 안았다.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 나, 나... 숨 막힌다.
- ...미안해요.
그 말에 바로 힘을 확 풀어버리며 제 품에서 떨어뜨려 주었다.
- 아냐, 그럴 수 있지.
- 어이, 아저씨.
- ...
- 잘 기다렸어?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