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엋문 장례식장에서 예의없는 행동이 부활이라고?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한 연인이 갑자기 관을 두들기고 나왔는데 고등학생으로...

@Western_BF
서나@Western_BF
25 views Sep 20, 2026 ~39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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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엋문
장례식장에서 예의없는 행동이 부활이라고?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한 연인이 갑자기 관을 두들기고 나왔는데 고등학생으로 회귀했다고? 그래서 이 사람이 내 미래 연인이라고?

- 이름으로 불러봐요, 신재현. 하고.
- 아저씨 진짜 저한테 왜 이러세요.

아니, 이 아저씨 저랑 띠동갑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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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대가 죽었다. 사유는 교통사고. 운전자 과실 100%. 퇴근한 후 주차장에서 일어난 사고였다. 빠르게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이미 손 쓰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연인인 신재현에게 의료진은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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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를 그냥 똑같이 죽이고, 박문대를 따라갈까. 딱 그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여기서 더 살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가 죽은 순간 모든 게 무의미해졌는데. 미친 듯이 부정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면서 온갖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탓에 1분 1초가 토할 것 같아서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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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눈을 뜨고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시야가 흐렸다. 아니, 그냥 의식 자체가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도저히 죽었다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이라면서 그를 확인하라고 할 때는 머리가 돌아버리지 않고는 맨정신으로 보는 게 불가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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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결국 없는 용기도 쥐어짜서 기어코 마주했을 때는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 역시 나는 받아들이는 게 안 된다. 당신이 내 옆에 없다니 그걸 어떻게 인정해야 하지. 아니, 왜 인정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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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장례식은 평생 볼 일이 없을 줄 알았어. 아니, 언젠가는 마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예고도 없이 이르게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 ...

그렇게 영안실에 시신이 안치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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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구분을 하지 못했는데,

쿵쿵쿵.

- ...?

쿵쿵쿵.

- 얼른 관 열어요!!!

가장 비현실적인 상황이자,

- ...크흡,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어쩌면 가장 바랐을지도 모르는 현실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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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박문대가 살아났다. 분명히 안치된 시신은 온데간데 없고, 교복을 입은 앳된 소년이 등장하자 현장에 있던 모두가 뒤집어질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거냐면서 사실 바꿔치기 아니냐, 워낙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많았기에 애먼 사람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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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 누구보다 정신이 멍해있던 재현이 제일 먼저 상황을 받아들였다.

- 손 잡아줄게요. 일어날 수 있어요?
- ...아, 네.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아까도 말했지 않은가.

- 조심히 나와요.

이게 가장 바라던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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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니까 10년 뒤에 제가 죽어서 관까지 들어갔는데 갑자기 그 관에서 부활했다는 거죠?
- 네.
-  무슨 말도 안 되는,

문대는 현재 상황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차분하게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고 하지만 이게 정말 말이 되는 일인가. 머리가 정말 지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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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자신은 학교에서 있었고, 급식을 먹고 돌아와 시간이 남았기에 잠시 엎드려서 잤을 뿐이었다. 그런데 자는 도중에 평소보다 갑갑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을 떴을 때는 이게 눈을 떴다는 게 의심이 될 정도로 너무나 캄캄했다. 그리고 손을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살짝 들었을 뿐인데 바로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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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 학교에서 납치를 당했나? 평소에 나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상자에 넣고 가두기라도 했나? 그래서 미친듯이 두들겼다.

- 지금 내가 한 말에 거짓은 단 하나도 없어요.
- 아, 네...

그랬더니 내가 있던 곳은 관이었다. 그래, 그 시신이 들어가는 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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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 사기 등의 이유로 누군가 나를 살해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여긴 미래라고 하였다. 진짜 말이 되나? 그래서 미래의 내가 죽었는데 죽은 나는 온데간데 없이 지금의 내가 등장했다는 거 아니겠는가.

- 진짜 이게 무슨,
- 혼란스럽다는 거 이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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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꿈이라고 당신이 나의 납치범이냐고 따지기에는 미래라고 입증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았다. 당장 내가 있는 장소가 그 증거였다. 어쩌다가 이 사람과 만나서 연애에서 동거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일단 나는 이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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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미래의 10년 동안 직장이든, 군대든, 대학이든 어디서 만났다는 건데.

그게 어쨌든 중요한 건 아니고, 내가 언제 돌아갈지는 모르겠고, 당분간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거 아닌가. 죽는다고 해도 그건 미래의 일이니까 원래 시간으로 돌아가서 조심하면 되는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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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그, 신재현...
- 네.
- 아저씨?

소설에서나 본 적 있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겠다고 하는데 어째 연인이라는 이 사람의 표정이 왜 떨떠름한 것처럼 보이지. 분명히 신재현이라고 이름을 또박또박 알려준 걸 들었는데.

- ...이름 맞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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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라는 이름이 뭐, 헷갈릴 요소가 많긴 한데. 기분 나빠할 정도인가.

- 아저씨라뇨.

아니, 그게 기분이 나쁜 거였어?

- ...30살이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 네.
- 저 18살인데요.
- 알아요.
- 예? 혹시 양심이, 아니, 그러니까,

양심이 뒤졌다고 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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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이 사람 도움이 필요한데 막말을 하면 안 되지. 급하게 말을 수습하면서 문대가 못 들은 척해달라는 듯 굴었다.

- 어떤 관계였든 간에 지금 관계에서는 이 호칭이 가장 적절한데요.
- ...
- ...뭐, 선생님이라고 할까요? 공경이 필요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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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나보고 어쩌라고. 아무리 연인이었다고 하지만 자기야, 라고 하는 게 누가 봐도 이상한 그림 아닌가? 밖에서 보면 다 수군거린다고.

- 아니, 아저씨 입장에서는 얼마나 애틋한지 알겠는데 제가 그 초면이라는 것도 좀 이해해주시겠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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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불편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런 씨, 미친 사람. 합의가 잘 되지 않자 문대가 울컥하듯이 말했다.

- 자기야, 라고 어떻게 합니까! 미쳤어요?
- 자기야, 라고 해달라는 건 안 바랐어요.
- 예?

그러면 진짜 그 아저씨가 문제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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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드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타입? 그렇게 생기진 않았는데. 그래, 뭐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 원래도 당신은 낯간지러운 호칭을 잘 쓰지 못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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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요?
- 어쨌든 그냥 아직 현실감이 없어서요. 그래서 이렇게라도 살아있다고 믿고 싶어서 그래요.

이렇게 말하니까 좀 불쌍한...

- 이름으로 불러봐요, 신재현. 하고.
- 아저씨 진짜 저한테 왜 이러세요.

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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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그 죽은 사람인 거 잘 알겠고요. 저 데리고 뭘 하고 싶은 건데요.
- 음?
- 설마, 그, 아니... 하.

미쳐가지고 30대가 10대 청소년 붙잡고서 어쨌든 같은 사람이니 연애하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동거까지 할 정도로 사랑하는 연인이 죽었다는데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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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또 별개 아닌가.

- 하하하!
- ...저기요?

갑자기 또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지금 여기서 웃을 포인트가 하나라도 있었나? 전혀 아닌데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설마 사실 동거 중인 연인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일방적인 스토커였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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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의 웃음 하나에 순간 온갖 생각이 다 드는 문대였다. 소파에서 엉덩이를 슬쩍 떼면서 물러나려는데,

- 교복 입은 당신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정말 귀엽다고 생각하긴 해요, 이건 당연히 진심이죠.
- ...예.
- 그런데 어쨌거나 알맹이가 18살이라는데 미쳤다고 애인 대행이라도 시키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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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이 나가긴 했어도 상식인이구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있다면 참으로 다행이긴 한데, 어쨌거나 본인 입으로 미쳐버리기 직전에 내가 튀어나왔다고 하였으니, 언제 또 미쳐도 이상하지 않은데.

- 예, 정확히 꿰뚫어 보셨네요. 혹시 저 상대로 그런 생각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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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요. 내가 그냥 적응을 못했을 뿐이에요.
- 아저씨 소리요?
- 뭐, 그렇다고 할게요.
- 대체 뭐라고 불러드려요? 형?

뭐, 솔직히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은 없으니까. 게다가 10년 후의 나랑 사귀는 중이라고 했으니 2살 차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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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아마 형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은데.

- 아뇨, 차라리 이름 불러요.
- ...대체 원래 뭐라고 불렸는데요?
- 이름으로 불렀어요.
- 연장자 아니에요?
- 네.
- 그냥 냅다 이름으로 불렀다고요?
- 뭐... 야, 라고 한 적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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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싸가지가 없어서 내가 위아래도 없이 이름을 냅다 불렀는지, 아니면 이쪽에서 형이라는 호칭을 듣지 못하는 타입이라 합의를 본 건지. 그것도 아니면 이 사람이 이 기회에 이름 한 번 불리고 싶다고 나한테라도 요구하는 건지. 뭐가 뭔지 모르겠으니까 그냥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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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도 안 되고, 형도 안 된다고 먼저 말하셨으니까,
- ...
- 이름은 제가 뭐, 도저히 입밖으로 내기에는 좀 그렇거든요?
- 괜찮은데.
- 아니, 제가 안 괜찮다고요.

12살이나 많은 사람한테 냅다 신재현 씨, 라고 하는 것도 예의에 좀 어긋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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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을 붙여봤자 그것도 저쪽에서 받아들일 것 같지 않고,

- 일단 그, 죄송한데 저희 언제 처음 만났죠?
- 대학교에서요.
- 재수하신 적 없으시죠?
- 재수하게 생겼어요?
-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진짜 내가 이 사람을 이름으로 막 불렀다고 해도 초면부터 그러진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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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배님.
- ...
- ...차라리 선배님 어떠세요.

같은 과가 아니라면 선배님이라 불렀을 것도 아니지만, 만약 그랬다면 첫만남 때 차라리 그리 부르지 않았을까. 재현이 선배님 소리에 대답이 없자 문대가 이것도 아니냐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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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싫으면 차라리 저기요, 정도가...
- 그래요.
- 예? 저기요?
- 아뇨, 선배님이요.

생각보다 정답이 쉬웠네.

- 나도 오랜만에 후배님이라고 불러봐야겠네.
- ...네?

후배도 아니고 후배님은 대체 무슨 단어야? 문대가 의문을 표하자 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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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도 따라 일어나려고 하니, 그럴 필요없다는 듯 손짓했다.

- 회사에 좀 다녀와야 해요. 며칠 째 못 가서,
- ...
- 집에 있는 거 아무거나 다 꺼내 먹어요.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뒤져봐도 좋고요.
- 그러다가 돈이라도 털어가면 어쩌려고요.
- 하하, 후배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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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저 사람은 호칭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아니, 본인 주장에 따르면 원래 그렇게 불렀다고 하였으니 저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건가.

- 뭐, 털어요. 어린 나이에 돈 좀 만져보고 싶을 수 있지.
- 저한테 지금 절도를 권유하시는 거예요?
- 원하면 하라는 건데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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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째 못 갔다더니 그러면 밤을 샌 건가. 얼굴에 피로감이 묻어나진 않지만, 저렇게 정신 나간 소리하는 거 보면 맞는 것 같긴 하다. 재현은 잠시 방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새 셔츠로 갈아입고 재킷까지 말끔하게 차려 입었다. 회사를 자유롭게 다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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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비싼 걸로 봐서는 직급이 상당히 높은가? 아니, 그걸 알 필요는 없고.

- 어쨌든 내가 아는 후배님이라면 한 번 해봐? 이런 생각으로 욱할 순 있어도 절대 엄한 짓은 안할 거라는 거 잘 알아요. 뭐, 그렇다고 해도 정말 도둑질을 결심하면 말리진 않을게요. 차라리 지금 카드라도 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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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뇨, 됐습니다. 정말 하고 싶다고 해도 의욕이 바로 사라지네요.
- 거봐.

꿰뚫린다는 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문대는 사양했다. 나가봐야 한다는 게 거짓은 아니었는지 재현이 서둘러 신발을 신었다. 현관까지 쫓아온 문대가 떨떠름하게 있으니, 재현이 품에서 무언가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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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받아요.
- 됐다니까요.
- 먹을 거 없으면 나가서 사먹으라는 거죠.
- 그냥 안에서 해결하겠습니다.
- 혹시 모르니 두고 갈게요. 그리고 카드키는 침대 옆 서랍 첫 번째 칸에 있을 거예요. 나갈 일 있으면 쓰고요.

정말 이것저것 다 털어서 도주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렇게 다 내어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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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드로 뭐, 어디까지 긁을 줄 알고 무작정 쥐여주려는 건데. 문고리를 잡고 나가기 직전 문대가 물었다.

- 저기요.
- ...
- 아니, 그 선배님.
- 응?
- ...저랑 뭐, 평생 살 거 아니고, 제가 그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 지금으로선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게 맞는데 이렇게 데리고 있어서 뭐하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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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다고 미래의 내가 갑자기 살아 돌아오기라도 하나. 아니, 애초에 미래의 나는 지금 어떻게 된 거지. 관에서 뒤바뀌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쪽은 시체인 상태로 과거로 가버렸나? 대체 이 상황을 어디부터 짚어야 하는지 아직도 나는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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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죽음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나보다 더 태연해 보였다.

- 일단 살아있다고 믿을 수 있잖아요.
- ...예?

아니, 그 사람 죽었다면서. 물론 나도 10년 뒤에 너 죽는다. 라고 하면 당사자로서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고 현실을 못 받아들인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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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중에 다시 과거로 후배님이 돌아간다면 뭐, 미래가 바뀔 수도 있는 거고.
- ...
- 일단 밥 챙겨 먹어요. 배고프겠네. 저녁에 올게요.

그렇게 재현이 가버렸다. 문대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래, 내가 나중에 돌아갈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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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내일이나 일주일 뒤나,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거나 뜬금없이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있던 기억이 싹 사라지면 결국 다 소용없는 거 아닌가. 아니, 죽음이 애초에 정해져 있다면 그걸 피한다고 해도 다른 사유로 근 시일 내에 죽는 거 아닌가.

- ...진짜 다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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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재현의 말을 듣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아예 갈 곳이 없으니까. 이미 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풍경이 많이 변한 것만 봐도 알았다. 그러니 10년 전에 살았던 집에 가봤자 다 뒤바뀌었을 테고 말이다.

- ...

물론 확인이 더 필요했다. 저 사람이 내 미래 연인인 거? 그래, 잘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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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도 충분하지만, 그냥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확실하게 못을 박아야 했다.

- ...이걸 죄송합니다, 라고 해야하는 건지.

문대는 재현이 말해준 제 방에 들어와 책장을 바라보았다. 남의 방을 뒤지는 쪽이 맞는데 저쪽에서 동일인물이라고 해주니 이건 뭐, 나 자신에게 사과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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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정말 재산을 훔치는 것도 아니고, 돈은 아니더라도 털어도 된다고 하였으니,

- 얼마나 오래 사귀셨는지 확인 좀 하겠습니다.

그래도 정말 스토커는 아니겠지. 설령 그렇다고 하면 뭐,

- ...

당장 도망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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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는 책장을 뒤적거리고, 옷장도 살펴보며 제 흔적을 찾았다. 우선 옷장을 열었을 때는 사실 기대하지 않았다. 10년이나 지났는데 옛날 옷을 계속 가지고 있을 리도 없었다. 너덜너덜해져서 걸레로 쓴다면 모를까. 옷이 다 무난한 걸 보면 취향이 갑자기 변하진 않은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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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복도 다 버렸나보네.

지금 입고 있는 셔츠를 슬쩍 잡아당겼다. 아쉽다는 건 아니었다.

책장을 뒤적거렸다. 졸업 앨범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했다. 가장 아래 칸에 숨어있던 앨범에 쓰인 학교명은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가 맞았다. 졸업 멀쩡하게 했네. 뭐, 사고친 적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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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사용감이 남아있는 책상과 노트북. 무작정 노트북을 켜서 보안이 걸린 화면과 마주했다. 문대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비밀번호를 대충 눌렀다.

- 살다가 한번쯤은 해킹 당하겠네.

10년 뒤에도 비밀번호는 똑같이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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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함부로 바꾸면 내 쪽에서 기억하는 것도 힘들겠지만, 이건 좀 생각해둬야겠는걸. 가끔 집에서 일을 가져오는 건지, 업무 관련 문서와 며칠 전까지도 열심히 인터넷 서핑을 한 흔적이었다. 10년 뒤의 박문대 본인의 의지로 이 집에 사는 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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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 연애라...

살면서 언젠가 알아서 하겠거니,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문대의 시선은 노트북 옆에 얌전하게 놓인 제법 비싼 카메라에 닿았다. 이거 켜지려나.

- 아, 됐다.

처음 써보는 탓에 버튼을 누르는 게 조금 어색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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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전원을 켜서 찍힌 사진들을 확인했다. 꾹꾹 누르면서 사진이 한 장 한 장 넘어가는데, 문대는 뭔가 간지럽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찍은 건가.

- ...아.

아무래도 저쪽을 스토커라고 의심한 건 좀 취소해야할 것 같았다.

- ...

이쪽에서도 상당히 많이 사랑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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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현은 8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했다. 소파에서 TV나 보고 있던 문대가 현관까지 나와서 인사했다. 무작정 떠날 사람도 아니었고, 신발을 보고 가지 않았다는 걸 알았지만 어쨌든 박문대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게 재현은 제법 기쁠 수밖에 없었다.

- 밥은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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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당히 먹었습니다. 저녁 먹고 오신 거예요?
- 아뇨, 원래 그렇게 잘 챙기진 않아요.
- 예?

문대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재현이 넥타이부터 풀면서 집안으로 들어오며 별거 아니라며 말하니 문대가 방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붙잡았다.

- 그러니까, 그,
- 음?
- 일단 씻고 나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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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 몇 번 눈을 깜박였다. 문대는 주방 쪽을 가리켰다. 밥을 해주겠다는 건가? 재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 왜요.
- 아뇨, 그냥...
- ...
- 진짜 똑같아서.

금방 나오겠다며 재현은 방으로 들어갔다. 문대는 방금 너무 도를 지나친 게 아닌가 싶어서 닫힌 방문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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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한숨과 함께 뒷목을 긁적였다. 아니, 하지만 8시가 진작 넘었는데 밥을 안 챙겨먹었다고 하면 당연히 신경 쓰이지 않나. 어쨌거나 저 사람이 애인의 10년 전 모습이라는 이유로 이런 낯선 세계에서 나를 집에 들여줬는데.

- 사람이 신세만 질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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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가만히 있는 것도 몸이 쑤시니까 그냥 좀 움직이려고 하는 거다.

-

우선 밥을 먹였다. 다행히 어렸을 때부터 주방과 담을 쌓은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혼자 요리도 잘 해먹었던 탓에 내 실력을 의심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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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먹는 건지, 억지로 먹어준 건지 저 사람 표정으로는 읽기 힘들지만 싹 비운 걸 보면 전자라고 믿겠다. 일하고 돌아온 사람이니 설거지까지 해주려는데 저쪽에서 먼저 채갔다.

- 커피 마셔요?
- 네.
- 공부할 때 카페인 좀 필요해요?
- 뭐... 마시면서 하는 게 편하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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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저것만 물어본 재현은 무슨 커피를 마시냐고 묻지도 않고 혼자서 착착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었다. 생각보다 캡슐이 많은 것 같은데 고민도 없었던 걸 보면 취향을 다 아는 모양이었다.

- 아, 혹시 어릴 때 쓴 거 잘 못 마시면,
- 아뇨, 원래도 이것만 마셨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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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는 감사하다며 한 모금 마셨다. 재현은 냉큼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함께 마주보고 앉아 커피를 마셨다.

- 그런데 옷은 왜 안 갈아입었어요?
- 아.

아직까지 교복 차림인 문대를 보고 재현이 물었다. 문대는 아, 하고 작게 탄식했다. 이 차림이 편하다고 우기는 건 당연히 거짓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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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뒤의 나의 공간이라는 걸 인정했어도 마음대로 옷장에서 꺼내 입는 건 어려운 게 당연했다. 굳이 10년 뒤의 나라고 지칭하는 것 자체가 어쨌든 한편으로는 남이라고 여긴다는 거니까.

- 그냥 좀...
- 내 옷 빌려줘요?
- 아뇨, 그냥 전 이대로 자도
- 일주일 내내 교복 입고 있을 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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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맞는 말인데, 신세를 진다는 느낌 때문에 부담스러운 건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문대는 우선 화제를 돌렸다.

- 일주일이라고 하니까 하는 말인데, 어쨌거나 제가 평생 여기서 살지, 금방 돌아갈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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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전자라고 하면 그거대로 살 방안을 모색해야 하니까.
- 어떤 방안이요?
- 정말 28살의 박문대로 살아가야 할지, 아니면 기록도 없는 채로 불법 체류자처럼 살아야 하는 건지.

이곳에 18살의 박문대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정말 양자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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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라는 세월 차이가 있는데 속이고 사는 게 가능하려나. 벌써부터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니. 어떻게 보면 이게 현실적인 생각이긴 하지.

- 돌아가는 게 가장 유력한 쪽이 아닐까 싶기는 해요. 현재 과거에는 박문대가 없어져 버렸으니까.
- ...
66
- 과거가 있어야 미래도 있는 건데 갑자기 통째로 구멍이 나버리는 거잖아요?
- 그렇죠.
- 뭐, 그래서 언젠가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하긴 해요.

의외네. 돌아가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하긴 나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죽지 않게 조심해서 살아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긴 한다.
67
전에도 말했듯 여기 있던 일을 기억할 지가 문제지만.

- 선배님이 원하시는 건 제가 빨리 돌아가서 미래의 제가 죽지 않도록 바로잡는 거겠죠?
- 죽지 않길 바라는 건 당연해요.
- 저도 서둘러 돌아가는 게 맞는 것 같긴 해요.

그런데 이대로 영영 안 돌아가면 어떻게 하냐.
68
알고 보니 처음 깨어났던 그 관이 이런 현상을 만든 장치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인터넷에 검색한다고 알 수 있을 리도 없고.

​- 그, 만약에 제가 영영 돌아가지 못하면...
- 그러면 평생 여기서 살게 되는 거죠.
- 그때를 대비해서 뭔가 해결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 '여기서' 살면 되죠.
69
재현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현재 이 집을 지칭했다.

-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떻게 계속 신세를 집니까. 어쨌거나 남이고...
- 후배님은 그래도 돼요.
- 예?

재현이 가볍게 웃었다. 그게 약간 실소처럼 보였다. 뭐랄까. 당연한 걸 굳이 말하지 말자는 느낌이랄까.
70
- 아까처럼 오해하지 않게 말해두는데, 아저씨랑 연애하자고 할 생각은 없고요.
- ...
- 여기서 끝까지 살아야 한다면 나도 끝까지 곁에 있어줄게요.
- ...
- 그러다가 언젠가 성인이 되고, 10년이 지나고, 갑자기 후배님 쪽에서 내가 좋아졌다고 하면, 그때 다시 연애해도 괜찮고.
71
진짜 10년 뒤의 박문대가 능력이 좋았던 거냐. 아니면 끝내주는 매력이라도 가지게 되었나. 대체 뭘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이 사람이 이렇게 맹목적인 건지.

- 맞다. 침대가 하나라서 그건 후배님이 쓰면 될 것 같아요.
- 아뇨, 그럴 필요는...!
72
- 내가 아는 당신이랑 지금의 당신을 다른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치면, 지금은 손님 신분이 맞으니까,
- ...
- 대접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들여요.

재현이 먼저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 침실에 갈아입을 옷도 놔줄게요.
73
문대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커피를 아주 조금씩 들이켰다. 감정을 포함한 모든 말과 행동이 여태껏 살면서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이라 너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 ...

진짜 뭐냐고, 저 아저씨.
74
-

며칠 동안 이 집안에 틀어박혀서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좀 멍하니 있었다는 게 맞았다. 신재현이라는 사람이 아침에 출근할 때 밥을 챙겨주고 저녁에 돌아오면 또 같이 차려놓은 밥을 먹고... 그러니까 이건 뭐,

- ...가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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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고용된 게 아닐까. 뭐, 한 번도 그 사람이 해달라고 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문대는 재현이 출근한 후, 설거지를 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대로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대우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물어본 적은 없지만,
76
누구 하나 데리고 살아도 지장이 없을 정도로 먹고 사는데 부담이 없는 수준인 것 같았고, 지금까지 지켜봤을 때는 박문대 이외에 누구를 만날 생각도 전혀 없는 것 같고...

- ...그런데 이게 맞나?
77
어쨌거나 나는 여기에 없는 사람이고, 살게 된다면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 건너뛴 박문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래, 뭐... 군대는 안 가도 되긴 하겠네. 저쪽이 가줬으니까. 그렇다고 이득이라는 게 아니라, 며칠 가만히 있었을 때 돌아갈 기미가 전혀 안 보였다는 건
78
진짜 여기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건가?

- 음...

진짜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냐. 사망 신고는 안 된 상태니까 진짜 강제로 10살을 더 먹어야 하나. 그래서 다니던 회사는 어떻게 됐지? 사고가 난 시점에서 정리가 됐나?

-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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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냥 나중에 생각한다고 치고, 돌아가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다시 돌아가도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애초에 여기로 냅다 넘어왔을 때도 내가 이미 스스로 고등학생 박문대라고 인식한 것처럼 다시 돌아가도 여기 기억을 가지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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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과거에서 미래랑 미래에서 과거는 다른가.

문대는 설거지를 다 끝마치고 고무장갑을 벗었다. 기억을 하지 못할 것 같으면 본능이 기억할 만큼 어떻게든 머릿속에 쑤셔 넣으면 될 일이 아닌가.
81
-

- 그래서 말인데 도와주세요.
- 응?
- 저는 살고 싶어서요.

재현이 돌아오고 함께 저녁을 먹으며 문대가 운을 띄웠다. 재현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문대는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이곳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라며 낮동안 정리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82
- 저도 제가 돌아간다는 쪽에 확신을 좀 두려고요. 그런데 여기 있던 일을 시간선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다 날려버리게 되면 제자리걸음이잖아요? 결국 이 시간선에 저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거고,
- 그렇죠.
83
- 여기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머릿속에 주입하면 본능이 언젠가 깨닫지 않을까요?

뭐, 정말 밑져야 본전이고 이 방법이 통할 거라고는 현실적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이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수법이 먹힐지 또 모르는 일 아니던가.

- 음...
84
재현은 생각에 잠겼다. 역시 너무 희망에만 목을 맨 헛된 소리였나. 문대는 그게 좀 탐탁치 않아하는 걸로 보였다. 하지만 재현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요.
- 에?
85
- 모든 시도해서 나쁠 건 없죠. 거기까지 효율을 따질 필요도 없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부정적으로 판단할 것도 아니죠.

어째 말이 뭔가 이상하긴 한데, 긍정의 의미니까 따지고 들 건 아니지. 그래서 어디부터 알고 싶냐는 재현의 말에 문대가 잠시 고민했다.
86
너무 미래의 모든 걸 알면 안 됐다. 차라리 그럴 거면 로또 번호부터 외웠겠지.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 할 수 있는 거라면...

- ...저희, 그러니까 저희라고 해야 하나. 여튼 미래의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 연애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거죠?
87
- 아뇨, 그러니까 저도 남의 이야기를 막 캐묻겠다는 건 아니고...!
- 왜 남이에요, 본인이면서.

그거야 그렇긴 한데 지금은 차라리 분리해서 보는 게 맞지 않나.

- 귀여워서 좋네. 선생님한테 첫사랑 이야기 들려달라는 학생 같네요.
88
그렇게 단순히 재미를 추구하면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말이지. 그래도 사생활을 파고든다는 느낌을 받거나 불쾌해 보이진 않아서 다행이다.

- 어쨌든 사랑 이야기가 굳이 궁금하다는 건 아니고, 일단 그거부터 아는 게 좋을 것 같아요.
89
- 어떤 거요?
- 죽게 된 자세한 경위요.

재현이 그 말에 잠시 멈칫하면서도 문대를 빤히 보았다. 죽음을 건드리는 건 너무 그러했나? 아니, 그렇다고 해도 저쪽은 내가 동일인물이라고 아예 인정했는데 그런 내가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건 상관없이 않나.
90
- 퇴근하고 같이 저녁 먹자고 그랬어요.

그래도 곧장 말을 꺼냈다.

- 그냥 평소와 다를 거 없었던 날이죠. 후배님은 항상 날 챙겨줬으니까.
- ...
- 제가 좀 늦는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더라고.
- ...
91
-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늦게 가서 미안하다고 안 챙겨줘도 되고 먼저 먹어도 된다고 하니까 괜찮대요.
- ...
- 마침 냉장고가 비었다고 퇴근하면서 마트도 들르면 되겠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평소보다 당연히 귀가 시간이 늦어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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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정도가 지난 것 같은데 그날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너무나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화 내용을 기억하는 것쯤이야 이상한 건 아닌데 왠지 저 말 그대로 말했을 것 같달까.

​- 지금 살고 있는 이 아파트 단지 내 주차장은 그렇게 여유롭진 못해요.
- ...
93
- 10시 넘어서 들어오면 자리를 찾겠다고 지하를 다 돌아다녀야 하기도 하고.
- ...
- 평소에 일찍 퇴근하는 당신은 항상 주차하던 장소가 있었지만, 제 시간에 맞춰서 늦게 도착했다보니, 그 자리가 이미 채워져 있었던 거죠. 그래서 주차장을 돌아다녀서 자리를 찾았고, 차에서 내려서 걷다가...
94
거기까지 말하고 재현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저게 절대 기뻐서 나는 웃음이 아니라는 건 바로 알 수밖에 없었다. 허탈함이 뼛속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 뭐, 그래요.

그 이후로는 생략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캐물을 것도 없었다.
95
이건 초등학생을 데리고 와도 정답을 바로 알았을 것이다. 주차장에서 교통사고가 났다는 건 알았는데 그런 사연이 있었네. 어쩌면 이 사람은 죽은 게 제 탓이라며 자책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마 대화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 제가 그 날 주차장에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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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너무 우울해지지 않게 바로 결론부터 파고들었다. 재현은 이미 죽음을 또 떠올린 것만으로 입을 여는 게 힘든 건지, 아니면 진지한 고민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대답이 없었다. 문대가 눈치를 보았다.

- ...면허를 따지 말까?
- ...
- ...
​- 하하하!
97
분위기가 확 가라앉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사실 너무 어이가 없던 나머지 웃겼던 거 아닐까. 그래도 따지고 보면 이게 가장 근본적인 부분 아닌가? 면허가 없으면 차를 몰 일도 없으니 굳이 혼자 주차장에 갈 이유도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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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진짜...
- ...
- 너무 깜찍하다.
- ...예?

아니, 진짜 뭐만 하면 귀엽대. 미친 거 아니냐? 저런 말에 면역이 있을 리가 없으니 괜히 얼굴만 화끈거렸다. 문대는 제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듯이 얼굴을 가렸다. 진짜 맙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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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 어디가?
- 그냥 전부 다요. 어린 당신은 또 다른 느낌이네요.
- ...아, 예.

그래, 당신이 좋으면 된 거지. 10년 후의 나랑 연애한다는데 과거에 불과한 내가 저기다가 무슨 말을 하니.

- 제 발상이 우습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 비웃은 건 절대 아닌데.
- 예, 뭐 그런 것 같긴 해요.
100
어쨌거나 나도 그때 되면 불편하다고 면허를 알아서 따겠지. 나는 나를 잘 아는 편이다. 그렇다면 몸이 스스로 위험을 감지하도록 해야 하나. 딱히 떠오르는 수가 없는데,

- 사고가 났던 주차장 좀 갈 수 있나요?
- 네?
- 아무래도 직접 봐야 제 몸이 위기감이라도 느끼지 않을까 해서,
101
- 안 돼요.
- 예?
- ...거기 다시 가는 건 안 돼요.

트라우마 같은 건가. 말리는 건 당연히 이해가 되는데, 그래도 직접 현장을 가보는 게 현 시점에서 가장 좋은 방법같은데...

- 말리는 건 이해하지만, 어쨌든 저는 확인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102
- ...
- 살리고 싶다면서요.

살리고 싶다는 말에 재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갈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그러면 같이 가요.
- 그래요, 밥도 다 먹었으니...
103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문대가 저녁상을 치우고 바로 가자고 일어나는데 재현이 그를 확 붙잡았다. 낚아챈 건 저쪽인데 상당히 떨고 있었다.

- 지금 말고,
- ...
- 낮에.

어떻게든 같은 상황을 피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104
-

다음 날이었다. 다행히 주말이었기에 재현이 굳이 출근을 안 하겠다고 할 필요도 없었다. 여유롭게 점심도 먹고, 문대는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고 보니, 잠옷만 줬는데 주차장을 나가더라도 뭘 걸치고 나가야 할 텐데. 문대가 고민하는데 재현이 제 니트 가디건을 주었다.

- 이거 입어요.
105
- 아, 감사합니다.

...크네. 이게 어른이냐.

- 나간 김에 후배님이 다녔던 회사 앞이라도 잠깐 가볼래요?
- 네?
- 위험하다고 해서 계속 피해도 변할 일이 아닌 걸 알고요. 후배님 말대로 나도 따라가려고요.
106
하룻밤 사이에 생각이 제법 많이 정리된 모양이네. 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망한다는 대형 스포일러도 있었는데 회사 정도야, 상관없지.

그렇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성큼성큼 앞장서던 재현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107
이 근처인가 보네. 문대는 뒤따라서 같이 천천히 걸었다. 이내 특정 구역에서 멈칫했다. 전신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 여기인가 보네요.

문대가 먼저 말하며 슬쩍 재현의 옆으로 왔다. 재현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문대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108
얼핏 핏자국이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냥 다른 것에 의해 오염된 것 뿐인가. 얼룩이 희미한 것을 보며 문대가 슬쩍 신발 밑창으로 문질러 보았다. 뭐, 지워질 리도 없겠지.

- ...

내가 직접 겪은 죽음이 아니라서 그런가. 평범하게 다가왔다.

- 괜찮으세요?
109
물론 옆에 있는 사람은 전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지하 주차장에 들어올 때만 해도 이러진 않았는데 이 구역에 오면 정신이 좀 피폐해지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사고 이후로 처음 온 걸 수도.

- 확인은 했으니까 밖으로 나갑시다.

그런 사람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지.
110
-

밖으로 나가서 회사 앞도 가보았지만, 정말 감흥이 없었다. 아까도 그랬듯 직접 겪은 게 아니라 정말 그저 남의 일처럼 다가왔다. 나 진짜 도움도 안 되네. 같은 사람이라는 것 말고는 애물단지잖아. 이래서 미래를 바꿀 수나 있는 건가. 그냥 순리대로 죽어버리는 게 아닌지.
111
- ...
- 왜 그래요?
​- 아뇨, 그냥.

위기감을 어떻게 해야 느끼려나. 차라리 손이라도 혼자서 바들바들 거리면 좋을 텐데. 문대가 제 손을 괜히 쥐었다 펴보았다. 운전하던 재현이 흘끗 보더니 말했다.

- 내일은 어디로 갈까요?
- 네?
- 그냥 그러고 싶을 것 같아서요.
- ...
112
- 냉장고가 비었는데 마트라도 다녀올까요?

아직 해가 지지 않아서 지금 가도 괜찮을 텐데, 돌아오면 저녁일 거라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거겠지. 혼자 출퇴근은 잘하면서 내가 그러는 건 겁이 난다 이건가. 문대가 잠시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113
-

물론 또 진전이랄 건 없었다. 마치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냥 그렇구나, 하는 느낌? 나 이렇게까지 무던한 사람이었나. 좀 필사적으로 살아야 할 텐데 왜 이러는 건지.

오늘도 맛있게 먹었다면서 재현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114
문대는 침실로 가려다가 잠시 제 방으로 갔다. 의자에 앉아서 두 바퀴 정도 의미없이 빙글빙글 돌렸다.

- ...뭐가 문제지.

이러다가 몇 년 더 일찍 돌연사하더라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겠어. 사실 저 사람이 너무 잘해주니까 안일해진 건가.
115
못 돌아간다고 해도 날 책임져준다고 하였으니까? 미쳤지. 무의식 중에 그걸 당연하게 여긴 거냐고.

- 나 참.

그나저나 내가 정말 언제 돌아갈까. 역시 관짝을 열고 다시 들어가기라도 해야 하나. 그게 이동 장치였으면 어떡하지. 자신의 발칙한 상상력에 바로 헛웃음을 터뜨리는 문대였다.
116
- 말도 안 되지.

차라리 옥상에서 떨어져서 이세계로 가는 게 더 현실적이겠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누구누구가 사색이 돼서 뜯어말릴 게 뻔하지만 말이다.

- 흐음.

갑자기 이 순간에 냅다 돌아가면 어떻게 하지.
117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 문대는 턱을 문지르며 고민하다가 책상에서 굴러다니다 멈춘 유성 매직과 눈이 마주쳤다. 뚜껑을 따고 슬쩍 왼손바닥에 두꺼운 촉을 들이댔다.

- ...

차라리 이게 좀 직관적이지 않나.
118
교복 입은 모습 그대로 이동한 걸 보면 내 외형에 변화가 생긴다는 건 아니니까 괜찮지 않으려나?

[28, 0316, 교통사고]

이러면 좀 알아보려나. 문대는 제 왼손에 끄적인 낙서를 보고 무얼 더 추가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이거 손바닥이 모자란데. 문대는 손을 뒤집었다.
119
- 도움될 정보...

지금 당장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거? 교통사고가 난다는 거랑, 그 날짜인데, 좀 더 자세하게 파고들려면...

[애인 신재현]

동거인이라고 쓸 걸 그랬나. 동거 중 아파트 주차장에서 사고가 난다고 하기에는 이것도 공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너무 생각없이 썼나.
120
똑똑.

- 네?

그때 재현이 문을 두들겼다. 한손에는 과일이 담긴 접시가 들려있었다.

- 침실에 없다 했더니 여기 있었네요.
- 아, 네.
- 오늘 과일을 안 먹어서 생각난 김에 가져왔어요.

문대가 감사하다면서 접시를 받았다. 그때 얼핏 보이는 검은 무언가에 재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121
- 손에 뭐예요?
- 네?
- 손에 뭐가 많이 묻은 것 같아서,
- 아뇨, 별거 아닌데요.
- 안 닦여서 그러는 거면,
- 괜찮습니다!

아무리 지금 저 사람보다 나이가 12살이나 어리다고 하지만 그래도 18살이었다. 손바닥에 냅다 낙서했다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문대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122
- 대체 뭐...
- 됐어요!

손을 가져가려고 하니 문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덕분에 손바닥이 그대로 보였다. 아무리 봐도 하얀 피부에 검은 무언가가 거의 덮은 수준으로 있기에 재현이 이상하다고 여겼다.

- 뭘 적기라도 한 거예요?
123
자세히 보려고 이번엔 손을 아예 뺏어갔다. 문대가 화들짝 놀라서 뒤집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아, 진짜 미친. 멍청아.

[애인 신재현]

재현은 거꾸로 쓰여있는 글자를 못 읽진 않았다. 한 번에 알아보고 잠시 반응을 하지 못했다.
124
문대가 민망함에 이를 꽉 깨물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말했다.

- ...제발 그만 보세요, 부탁입니다.
- ...
- 아니, 그냥 차라리 몸에 새겨두기라도 하면 기억하지 않을까 해서, 그냥 좀 써본 건데, 그러니까 이상한 의도 그런 거 전혀 아니고 손바닥에도 잘 보면 사고에 대한 게 적혀 있거든요?
125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라, 이 아저씨야. 창피해서 온갖 말을 주절거리는 문대와 다르게 재현은 가만히 보기만 하였다. 그냥 과일이고 뭐고 잔다고 할까. 딱 그 생각이 들 때쯤 재현은 미처 뚜껑을 닫지 못한 채 책상 위를 구르는 매직을 발견했다.
126
- 지금 뭐하시는,

재현은 그대로 매직을 집어들고 문대의 손등 위에 크게 하트를 그렸다.

- 이렇게 해야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요?

...진짜 순간 혀라도 깨물어서 당장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127
-

그 이후로 며칠동안 이 아저씨의 모습은 뭐랄까, 적극적이었다. 쪽팔렸다고 생각했던 모습이 간절하게 다가오기라도 했는지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나오면 항상 손바닥에 28, 0316, 교통사고를 그대로 적어주었다. 물론 손등에 애인 신재현도 빼놓지 않고 말이다.
128
- 됐어요. 안 번졌죠?
- 네.

이건 제발 빼줬으면 하는데, 하트까지 빼지 않는 걸 보면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모양이다. 그래, 매일매일 적어주면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 처음에는 왜 이러냐고 따졌지만, 며칠 반복되니 문대도 그냥 받아들였다.
129
- 오늘도 퇴근하고 밖에서 먹을까요?
- 굳이 번거롭게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 ...
- 아마 6시 퇴근이니까 시간 맞춰서 1층으로 내려와요.
- ...네.

그리고 밖을 돌아다니는 일이 좀 늘었다. 데이트라는 건 아니었다. 어쩐지 10년 뒤에 박문대랑은 주로 이랬다는 것을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130
그래, 관객 참여형 연극처럼 말이다.

그게 좀 신재현이란 사람을 절대 잊지 못하게 각인시키는 것 같았다. 그래, 어쩌면 사고와 직결이 되니까 기억하는 매개체라는 역할로 좋은 것 같긴 하다. 그렇기에 문대도 군말없이 따랐다.
131
고급진 레스토랑이라거나, 퇴근 후에 보는 심야 영화라거나, 심히 거창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이 모든 걸 직장을 왔다갔다 하면서 시간을 따로 투자하는 것이기에 피곤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본인은 소파가 편하네, 어쩌네 하지만 결국 침대도 집에만 있는 내가 뺏지 않았나.
132
이걸 같이 자는 게 어떠냐고 할 수도 없고, 난감하네.

- ...

문대는 그러다 제 손바닥을 보았다. 자신이 썼을 때와 달리 손과 고개, 둘 중 하나라고 꺾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이 글씨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다 피식 웃었다. 그래, 다 긍정적인 거잖아.
133
-

평화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이 생활에 많이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뭐랄까. 애인이랑 동거하는 느낌은 아니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친한 형 정도? 딱 그렇게 다가왔다. 뭐, 모르는 아저씨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지. 지난 주말에는 아쿠아리움도 다녀왔다.
134
여기저기 다녔는데 아쿠아리움 거대 수조 앞에 있던 모습이 가장 인상이 깊었다나. 그리고 집 근처 맛집은 어지간하면 다닌 것 같았다. 물론 다 맛있었다.

- ...이렇게 살아도 되나.
- 왜요?
- 아뇨, 혼잣말입니다.

소파에 누워서 늘어질 정도였다.
135
문대는 천장으로 손을 뻗어 오늘도 선명하게 쓰인 글자들을 보았다. 만약에 뇌가 손 안에 있었다면 이건 무조건 기억하지 않았을까. 뭐, 그렇다고 여기에만 의지할 수 없지. 여기서 안해본 게 뭐가 있을까.

- ...

문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 필요한 거 있어요?
136
소파 끝에 앉아서 책을 보던 재현이 물었다.

- 제 차는 어딨습니까?
- 응?
- 아니, 제가 차에 내려서 사고가 났다면서요.
- 네.
- 그러니까 차는 멀쩡하게 주차되어있는 거 아니에요?

맞는 말이었다. 지나가던 차끼리 부딪친 것도 아니고 주차장에서 걷다가 치였으니 제 차는 멀쩡한 게 분명했다.
137
나중에 똑같은 차라도 보면 본능적으로 몸이 위험을 감지하지 않을까?

- 아니면, 사고낸 차량이 어떤 건지...
- ...
- 저기요, 선배님?
- 갔다올 거면 지금 같이 다녀와요.

재현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책을 내려놓았다. 역시나 저녁에 움직이진 말자는 거였다.
138
어차피 확인하는 용이니까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재현은 사고가 났을 때 유품이라고 받은 문대의 차키를 꽉 쥐었다. 신발을 신고 나가는 문대를 바라보며 이럴 때마다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차장에 보내는 게 싫어서 밖으로 나갈 때도 차를 빼올 테니 지상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139
그렇다고 혼자 다녀오라고 하는 건 싫었다. 그를 따라나섰다.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차문을 원격으로 열었다.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소리가 들렸다. 문대가 먼저 앞장섰다. 그 뒤를 바짝 붙었다. 제 차를 확인한 문대가 제법 잘 벌었냐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140
- 이거 진짜 제 차죠?
- 그럼요.

신기한 모양이었다. 역시 이런 부분을 보면 또 새로워서 잠시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기도 하였다. 차를 열어볼 생각하지 않고 창문으로 어떻게든 안을 들여다 보려는 문대였다. 재현이 뭘 굳이 그러냐면서 직접 열어주었다.
141
남의 차라는 인식이 좀 있는지 눈치를 보던 문대가 안을 살폈다. 그동안 재현은 혹시 남은 물건이라도 있나, 확인하려고 트렁크를 열었다.

- ...

차량 용품이나 비상용 우산을 제외하면 딱히 없는 것 같네. 더 뒤질 것도 없이 재현은 바로 트렁크를 닫았다.
142
그때였다.

- 지금 뭐하는 거예요!!!
- ...아니, 그,
- ...
- ...감사합니다.

안쪽에는 흥미를 잃었는지 금방 차 헤드라이트를 앞쪽에서 구경하던 문대가 지하 주차장에서 속도를 줄일 줄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치일 뻔하였다. 트렁크 쪽에 있던 재현이 튀어나가서 그를 확 끌어당기며 소리를 질렀다.
143
얼떨떨하여 문대가 감사 인사를 했다. 하지만 저를 잡고 있던 손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떨렸다.

- ...저기, 선배님?
- ...
-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해서,
- 아뇨, 후배님이 부주의했다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재현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문대는 그게 당연히 트라우마를
144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게 맞았다. 하지만 재현은 거기서 더 나아가 지금 이런 상황의 근본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 고작 사고가 나는 날짜를 기억한다고 해서 되는 걸까. 애초에 사고가 나지 않게 막을 방법은 없나.

- ...
- 선배님?
- ...
- 선배님.
- ...네?
- 진짜 괜찮으세요?
145
문대가 눈앞에서 손을 여러 번 흔들어야 겨우 반응할 정도였다. 재현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고 자체가 나지 않는 방법, 아니면 아예 이 장소에 오지도 않을 수 있고, 이런 일이 없으려면,

- ...진짜 괜찮냐고요.
​- 괜찮아요.

생각보다 답이 단순했다.
146
-

문대가 보기에 재현은 뭔가 의욕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매번 아침마다 글씨를 쓰지도 않았고, 무리해서라도 어디 가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랑 똑같았다. 그 일이 그렇게도 큰 충격이었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인 건가.
147
- ...

그러니까 답답했다. 죽는 건 내 쪽인데 사실 힘들어서 끙끙거리는 건 나여야 하는 거 아닌가. 어차피 바꾸지도 못하니 죽으라는 거야, 뭐야. 문대는 직접 손에다 글자를 새기면서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박문대의 방에 있는 책장을 다시 뒤졌다.
148
고등학교 졸업 앨범은 봐도 소용이 없고, 다른 것을 보다가 눈에 들어온 것은 대학 졸업장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같은 대학이었지.

- 흠.

이거나 물어볼까.

문대는 졸업장을 다시 원래 자리에 꽂아두고 쭈그려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149
시간을 확인했다. 금방 저녁이니까 돌아오겠지. 저녁으로 뭘 할지 고민이나 잠깐 해야겠다.

-

저녁이 되었다. 재현은 평소처럼 칼같이 퇴근하였다. 잘 있었냐, 밥은 먹었냐, 이렇게 물었지만 내일 어디 가자고는 또 말하지 않았다. 옷 갈아 입으러 들어간 그를 보며 문대는 저녁 먹고 묻기로 하였다.
150
그렇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과일을 함께 나누어 먹는데 문대가 바로 운을 띄웠다.

- 저기요, 선배님.
- 네.
- 제가 진짜 죽을 생각 없거든요?
- 알아요.
- 그런데 며칠 전 있었던 일때문에 그쪽이 상당히 무기력해진 것 같아서요.
- 아니에요, 그렇게 보였다면 사과할게요.
151
바로 사과하니까 또 할 말이 없네. 어쨌든 나름 인정했으니 된 건가.

- 더 알고 싶은 게 있거든요.
- 어떤 거요?
- 대학 때 이야기요.
- 아.

그 말에 재현이 뭔가 내려놓은 듯한 웃음을 보였다. 갑자기 뭐지? 사실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구는 것 같았다.
152
어쨌든 문대가 어디 한 번 말하라며 발언권을 주었다.

​- 음... 어디부터 이야기를 하지.
- 편하신 대로요.

처음에는 흔한 이야기였다. 전공 교수님이 어떻고, 동기들은 이러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나와 같은 과 선후배 사이가 맞았다.
153
다만 학년이 차이가 나고 자신은 과 행사에 잘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간단하게 과 설명을 하고, 학교에 대한 설명을 보탰다.

- 우리 대학교는 제법 경사가 심했어요. 그리고 공대 건물은 혼자 떨어져 있어서 더 멀리 가야 했고,
- 학교 다니기 진짜 싫어했겠네요.
154
- 하하, 그렇죠. 항상 킥보드 찾았잖아요.
-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긴 하네요.
- 뭐, 그러다보니 공대끼리 친하긴 했어요. 특히 시험 기간이면 타과 학생들이 거기까지 올 일도 없으니까.

아무래도 경사가 심한 학교에서 더 올라가야 한다는데 거기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게 아닌 이상,
155
타과에서 올 이유가 없긴 하지. 문대가 알 것 같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편의점도 공대 건물에 따로 있고, 교내 카페도 그렇고, 어쨌든 있을 게 다 있으니 우리도 나갈 이유가 없고,
- 열람실은요?
156
- 그건 중앙으로 나갔어야 했어요. 대신에 과 건물에 사람이 없는 만큼 소란스럽지 않으니 그냥 과실에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았고요.
- 뭐, 나쁘지 않긴 하네요.
- 그러다 빈 강의실 중에 열려 있는 곳이 있으면 가끔 사용하기도 하거든요.
157
뭐, 열람실이 없는데 나가기 싫으면 강의실에서 뭘 훔쳐가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겠지. 사용하지 말라고 하면 죄송하다면서 금방 나가면 될 일이니까. 학교 이야기를 들으며 문대는 부모님이 해주시는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로워 하기도 하고 차분한 고갯짓으로 반응했다.
158
- 기계공학과 쪽에 오전 강의만 하면 이후에 텅텅 비는 강의실이 하나 있거든요? 그런데 구석에 있어서 다들 강의할 때 아니면 가지도 않거든요.
- 네.
- 거기 가지 마요.
- 왜요? 귀신 나온대요?
- 아니, 그건 아니고.

강의실이 너무 더럽거나, 사람이 안 가는 만큼 관리를 안 해서 많이 낡았다거나
159
괜히 없다고 막 들어갔다가 크게 화를 입다거나, 그런 건가. 하지만 그런 게 전혀 아니었다. 또한 그는 내 죽음을 바꿀 수 없다며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 거기 가면 나 만나거든.

심장이 저린 것 같은 느낌에 먹먹했다.
160
알고 있는데도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입맛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분명 아까까지 달콤했는데 아무 맛이 느껴지질 않았다. 딸기를 포크로 툭 밀어내니 힘없이 그릇에서 반바퀴 정도 굴렀다.

- 나를,
- ...
- 사랑하지 않아도 돼요.
161
이게 얼마나 무거운 말인지 알면서도 가볍게 웃는 게 왜 더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다. 문대는 콱 하고 딸기를 찔렀다. 그대로 재현의 입 앞까지 갖다댔다.

- 모르겠고,
- ...
- 하나 남았으니까 이거 드세요.

난 살고 싶다. 그러니까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162
하지만 미래의 박문대가 과연 이 사람을 버리면서 살고 싶어할까. 분명 내 자신인데도 함부로 단정지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 지내는 동안 그저 좀 뼈저리게 알았을 뿐이다.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

-

문대는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 많은 생각에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163
괜히 엎드린 채로 베개를 끌어안고 눈을 몇 번 깜빡일 뿐이었다. 사랑하지 않길 바란다니. 그건 이 관계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제 감정을 기어이 잘라내겠다는 것이었다.

- ...

아까부터 저릿한 것이 몸을 자꾸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정말 뭘까.
164
문대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손에 희미하게 남은 글씨가 어쩐지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28, 0316, 교통사고]

문대는 손을 뒤집었다.

[애인 신재현]

이건 제 손으로 쓴 것이었다. 어느 순간 너무 익숙해졌다.
165
그런데 그 익숙함을 버려야 한다니. 천장으로 팔을 길게 뻗었다. 어두운 탓에 갈라진 글씨가 더욱 보이지 않았다. 미래의 자신을 만나고 싶었다. 불가능할 지라도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당신은 신재현을 얼마나 사랑했냐고.
166
-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제법 길었지만, 어느 때보다 현실감이 있었다. 자신은 교실이었고, 대체 언제까지 잘 거냐면서 친구들이 깨워주었다. 멍하니 수업을 듣던 문대는 펜을 돌리다가 문득 교과서에 끄적였는데,

[애인 신재현]

저도 모르게 쓴 그 낙서에 흠칫하고 말았다.
167
어라?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학우들은 칠판에 시선을 고정하며 열심히 필기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문대는 아래로 무언가 더 적었다.

​[28, 0316, 교통사고]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이후로 눈을 뜬 문대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저가 있는 장소를 확인했다.
168
어쩌면 꿈보다 더 익숙한 장소였다.요즘 온종일 있던 탓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문대는 지난 꿈을 생각하며 이불을 꽉 그러쥐었다. 어쩌면 나는 과거라도 돌아간다고 해도 이 모든 걸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얼른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169
- ...

사람이 없다는 느낌을 확 받았다. 그러니까 거실에 그냥 사람이 없다는 게 아니라 이 집에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문대는 주방 쪽을 보았다. 식탁에는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당분간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요 미안해요]
170
-

그렇게 재현은 며칠 째 보이지 않았다. 항상 여유롭게 출근하던 사람이 눈을 뜨기도 전에 일찍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마주치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면 더 자라면서 침실로 돌려보냈다. 대체 밖에서 무얼 하는지 몰라도 12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 ...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었다.
171
문대는 숟가락을 쪽 빨았다. 이건 뭐,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거의 옆집 사람 느낌이었다. 가끔 흐릿하게 들리는 문 소리로 들어왔다는 것을 깨닫고 잠들 뿐이었다.

그동안 계속해서 꿈을 꾸었다. 그것은 반복이었다.
172
문대는 오랜만에 교복을 입고 학교에서 수업을 들었으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급식을 먹고, 공부하며, 가끔 졸리면 눈을 감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책상 한 켠에는 언제나 똑같은 낙서를 새겼으며, 가끔 체육시간일 때는 하늘을 바라보고는 했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었다.
173
꿈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하고 볼을 몇 번 꼬집어 보았다. 이곳이 현실임을 인지하면 오늘은 재현이 집에 있는지 찾았다. 여전히 그는 저와 마주치는 것을 꺼렸다.

​- ...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더니, 이건 아예 사랑하지 말라면서 벽을 치는 모양이었다.
174
박문대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신재현을 만나지 않아야 된다는 쪽에 확신을 건 게 분명했다.

그러면서 문대는 생각했다. 이토록 돌아가는 꿈을 자주 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곧 돌아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175
학교에서 자다가 뜬금없이 이곳으로 넘어온 것처럼 이렇게 하루의 끝을 맞이하다가 다음 날 원래 있던 곳으로 넘어가는 건 아닐까.

- 더 자요, 왜 나왔어.
- 저 요즘 꿈을 많이 꿔요.
- 악몽이라도 꿔요?
- 아뇨.
- ...
- ...제가 돌아가는 꿈이요.
176
이 사실을 꼭 말해주고 싶었다. 이른 새벽, 집을 나가는 재현을 붙잡고 문대가 말했다. 혹시 벌써 돌아가냐며 서운해한다거나, 그 꿈을 언제부터 꿨냐고 캐묻지 않았다.

- 잘 됐네요.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177
- ...이대로 돌아가도 괜찮으세요?

문대가 다시 물었다. 재현은 느릿하더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재현은 또 그렇게 사라졌다. 문대는 텅 빈 집에서 더 이상 더 잘 수가 없었다.
178
제 몸이 피곤하다고 비명을 지른다고 해도 마음이 편해지질 않았다. 소파를 두고 거실 바닥에 무릎을 모아 앉았다. TV 밑에 놓인 액자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웃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라면서 행복하라니. 미래의 내가 바라는 게 과연 그거일까.
179
-

또다른 꿈이었다. 이번에도 학교였지만, 자신이 알던 곳은 아니었다. 낯선 공간, 그리고 그 틈에서 지나가는 다양한 사람들. 슬쩍 아래로 시선을 깔았을 때 보인 건 교복을 입지 않은 자신이었다. 아, 여기는 대학교구나. 무슨 강의인지도 모르고 멍하니 교수님을 바라보다가
180
하나 둘 일어나는 학생들을 따라 일어났다. 강의가 끝났구나. 가방을 챙겨서 나가, 창밖을 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다른 건물들이 보였다.

문대는 홀린 듯이 어딘가로 걸어갔다. 다음 강의가 있었나. 그것까진 모르겠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 끝에 있는 가장 구석진 강의실이 눈에 들어왔다.
181
잠겨 있을 줄 알았던 그곳은 문고리를 돌리니 가볍게 열렸다.

- ...

그리고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대는 달뜬 숨을 뱉으며 깨어났다. 어쩐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요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집에만 있는 주제에 컨디션이 안 좋아졌기 때문일까. 뭔가 뜨거웠다.
182
- ...

숨을 쉬는 게 조금 힘겨웠다.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에 몸이 너무 무거웠다. 분명 힘을 줄 수가 없고 가만히 누워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이유없이 바들거렸다.

-  ...

그러니까 그건 악몽이었나.

결국 하루 내내 일어나지 못하고 앓다가 겨우 깊은 잠에 빠졌던 것 같았다.
183
의식이 흐려지면서 꿈과 현실의 경계가 구분이 되지 않았을 때 이마를 덮는 손길에 온전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전에 봤던 강의실이었고,

- ...안녕하세요?

그곳에는 익숙한 누군가가 있었다.
184
-

다시 깨어났을 때는 땀을 잔뜩 흘린 몸 덕분에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옆에 있던 협탁에 물과 함께 약이 놓여 있었다. 물컵을 들어내니 아래 깔려 있던 종이가 눈에 띄었다.

[일어나면 약 챙겨 먹어요]

문대는 바로 약과 함께 물을 들이켰다.
185
떨렸던 몸이 확실하게 진정되었다. 머릿속이 맑아졌다. 열은 내려갔음에도 제 이마를 스친 따스함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 ...아.

내가 만약 사라진다고 한다면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186
그저 얼른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길 두 손 모아 기도하기? 아니면, 돌아갈 때까지 내내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기?

- ...

그 모든 건 정답이 아니었다. 날짜를 확인했다. 토요일. 재현은 회사를 간 것이 아닐 텐데. 문대는 신발을 신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187
핸드폰도 없고, 차를 몰 줄도 모르면서 무작정 뛰어갔다. 하지만 목적지만은 확실한지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자주 갔던 공원, 기억이 남는다는 아쿠아리움, 맛있다며 소개시켜주었던 식당, 그 모든 곳을 빠짐없이 둘러보던 문대는 지친 기색 없이 몇 시간을 쏘다녔다.
188
그렇게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큰 강이 지나는 대교였다. 언젠가 거실에 있던 액자 속 사진 중에 이 곳을 본 적이 있었다.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이런 대교는 다행히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멍하니 노을빛이 퍼지는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189
- 저기요!!!

큰 외침에 재현이 돌아보았다. 문대가 저 멀리서 그를 불렀다. 늦게 돌아갈 테니 알아서 밥을 잘 챙겨먹으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알려주지도 않은 장소에 멋대로 찾아온 그가 낯설었다.

- 이봐요, 아저씨.
- ...
- 아니, 선배님, 아니다.
- ...
- 신재현 씨!!!
190
호칭을 두 번이나 고친 끝에 이름을 불러준 문대가 얼마나 뛰었는지 몰라도 어깨가 제법 들썩였지만, 결의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고 서있었다.

- 죄송한데 제가 누구 말을 잘 듣는 타입도 아니고, 내 결정에 따르는 타입이라서요.
191
- ...
- 그쪽 말을 못 듣겠거든요? 죽는 것쯤이야 내가 어떻게든 안 죽을 거예요. 나 믿으세요.

자신은 절대 죽지 않을 거라며 확신했다. 여기에 있던 기억도 소중한 기억이라며 반드시 떠올릴 것이라며 문대는 스스로 운명을 바로 잡아보겠다며,
192
- 내가 좀 궁금하거든요. 정말 당신을 사랑하게 될지.
- ...
- 얼마나 대단했길래 내가 그렇게 오래 연애했는지 직접 확인할 거라서, 반항 좀 하겠다는 겁니다.

당당하게 말하면서 문대가 퍽 웃었다.

- 제가 본 영화에서 그러더라고요.
- ...
- 미래에서 기다리겠다고.
- ...
- 그러니까,
193
또렷한 눈으로 오로지 저만 바라보며 당차게 말하는 모습이 그리도 빛나보일 수가 없었다.

- 당신 여기서 딱 기다리라고!

10년 전 연인은 역시 저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었다. 그 순간 자신이 알던 박문대와 겹쳐 보였다.
194
다리 밑으로 노을을 담은 강이 아름다웠다. 해질녘에 바삐 움직이는 차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후배님!

갑자기 문대가 재현을 향해 단번에 뛰어왔다. 재현이 휘청일 만큼 순식간에 뛰어든 문대가 그에게 확 안겼다.
195
등 뒤로 팔을 뻗어 이 온기를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그를 꽉 붙잡았다. 처음으로 안아본 그가 너무나도 따뜻했다.

- 다음에 만나면,
- ...
- 많이 사랑해주세요.

재현의 눈에서 눈물이 톡 떨어졌다.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내는 건 꼭 나라고 생각했는데, 난 그조차도 되어주지 못했는데
196
당신은 기어코 나를 구원해주는구나.

- ...그래요.
- ...
- 기꺼이.

용기내어 문대를 안아주었다. 그 순간, 제 품이 가벼워졌다. 안았던 팔이 점점 더 안으로 말려들었다. 재현이 자리에 멍하니 서서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툭툭 떨어진 눈물이 땅을 살짝 젖게 만들었다.
197
-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어느 새 완전히 해가 지고 붉은 강은 약간의 푸른 빛을 내며 어둠을 담아내고 있었다. 얼마나 여기 있었는지 감이 안 잡혔다. 다만, 아까보다 지나다니는 자전거와 차들이 현저히 줄었다는 거로 늦은 시간인 건 어렴풋이 알았다.
198
그럼에도 재현은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은 이 느낌은 제 발이 이곳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절대 다리 아래를 바라보며 어떠한 결심을 하지 않았다. 젖었던 땅은 진작 말랐다.

굉장히 오래 머물렀던 것 같았다. 떠난다고 해도 그게 언제라고 짐작한 적은 없었다.
199
어떻게 이런 타이밍에 사라진 걸까. 평생 사라지지 않을 여운에 여전히 모든 감각이 둔했다.

어쩌면 정말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마치 떠나지 못했던 망령이 어린 시절의 그로 변해서 제 앞에 나타난 걸지도 몰랐다. 미련조차 덜어낸 그는 다시는 보지 못하는 존재가 될지도 몰랐다.
200
애초에 과거의 모습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어제 많이 아팠는데 괜찮을까. 그런 걱정도 있었다.

- ...

아프면 안 되는데. 진짜 당신이 과거의 당신이라면 아프지만 말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나를 기억할 것을 기대하지 않겠다.
201
그래도 기억한다면 다시는 아플 일이 없기를, 하지만,

​[당신 여기서 딱 기다리라고!]

귓가에 선명하게 맴도는 그 말은 제멋대로 끊임없이 되새겨졌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뱉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기라도 한듯, 일순간 강물이 기이하게 반짝였다.
202
어쩌면 수많은 네온사인이 한데 겹쳐서 발생한 현상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핸드폰이 울렸다. 재현이 주머니에서 꺼내 확인했다.

[대체 언제 와?]

재현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제 감각을 다시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 넣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쥐고 달려갔다.
203
중간에 멈추지도 않고 집까지 단번에 도착한 그가 도어락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지 못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겨우 용기를 내서 천천히 하나씩 누르기 시작했다. 이내 문이 열렸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 재현이 현관에 있는 신발을 보았다.
204
분명 나올 때랑 다르게 놓인 모습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설마, 정말로 설마.

- 대체 안 들어오고 거기서 대체,
- ...
- 뭐, 뭐해?

도어락 소리가 들린지 한참 지났는데 너무나 조용한 재현에게 누군가 다가와 현관 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재현이 멍해졌다.
205
기본적인 상식마저 머릿속에서 다 지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상에는 분명한 인과관계가 존재했고, a부터 z까지 있다고 하면, 모든 게 뒤죽박죽 섞여서 어디부터 따져야할지 모르는 바보가 된 것 같았다.

- ...
- 아?

거짓말.
206
- ...왜 그래?

아니야, 거짓말이라고 하지마.

말릴 새도 없이 바로 눈물부터 떨어뜨리는 재현을 보며 문대가 화들짝 놀랐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재현은 그를 보며 다리 힘이 풀릴 뻔하는 걸 겨우 참았다. 아무리 몇 번이나 다시 살펴봐도 앳된 모습의 그가 아니었다.
207
그러니까 원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었다.

- ...아.
- ...
- 드디어 시간선이 제대로 맞물린 모양이네.

재현의 상태가 왜 이러는지 말해주기도 전에 스스로 먼저 깨달은 문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싶었더니만.
208
그의 목소리는 흩어지지 않았다. 온전하고도 또렷했다. 아, 이건 환상도, 꿈도 아니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떠도, 같은 장소에 계속 있었다.

- ...신재현?

이번엔 재현이 먼저 달려들듯 그를 안았다.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209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 바닥이 더럽혀지는 것도 잊었다. 이건 절대 꿈이 아니라며 이 감각은 무조건 현실일 수밖에 없다면서 제발 깨어나지 말라는 듯 으스러지도록 힘을 주는 재현이었다. 아무리 끌어안아도 그는 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 감각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210
팔에 들어간 힘이 풀릴 생각을 하지 않자, 문대가 그의 등을 침착하게 토닥였다.

- 나, 나... 숨 막힌다.
- ...미안해요.

그 말에 바로 힘을 확 풀어버리며 제 품에서 떨어뜨려 주었다.

- 아냐, 그럴 수 있지.
211
그를 놓아준 재현이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니 문대가 그의 손을 가져가서 제 뺨에 올렸다. 가볍게 손바닥에 입을 맞춰주면서 이게 현실이 맞다는 걸 증명시켜주듯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 어이, 아저씨.
- ...
- 잘 기다렸어?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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