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많은 걸 바라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쩌면 너무 큰 걸 바랐던 건지도 모르겠다. "헤어져요." "......."...

"헤어져요."
"......."
덤덤하게 말하는 걸 보자는 속에서 열불이 올라와야 하는데, 놀랍게도 아무 느낌이 안 들었다.
한 달, 아니 2주 전만 해도 속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바람 핀 새끼가 입은 살아서."
"그래서 과거형이잖아요."
신재현의 저 담담함이 좋았었다. 차분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요란하지 않는 그런 점이 참 좋았다.
'..눈이 삐었었지.'
"제 의사표시는 되었는데,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얘 근데 뭐 이리 당당하냐.
바람피고, 걸린 주제에. 카더라 소문으로 걸린 것도 아니고 내 눈에 보인 주제에.
그래, 뭐, 지는 잘못 없다는데 어쩌겠어.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것을 빼낸다. 손가락에 딱 맞던 반지는 저항없이 빠져나왔고, 그것은 이윽고 그가 마시던 커피 속으로 던져졌다.
"..그러시던가."
박문대는 몸을 일으켰다. 더 얘기하는 건 시간낭비였다. 이쪽의 말은 들을 생각도 없고, 자기 사정을 말할 생각도 없는 놈을 데리고 뭐하러?
"그러면, 집에 있는 물건은...."
"다 버려."
"...문대 씨."
"버리라고. 내가 굳이 네 집까지 가서 그걸 찾아올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버려."
"콩이한테 사준 건 건드리지 말고."
그건 네 거 아니니까, 하고는 박문대가 걸음을 옮긴다. 신재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그게 끝이에요?"
"그럼 쌍욕이라도 뱉어주랴? 그것도 아까운 새끼야, 넌."
꽤나 복잡하게 시작했던 것에 비하면, 담박하다 못해 서늘한 끝이었다.
'왜 그랬냐고도 안 물어보네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다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물어봐줬으면 했는데.
-
각오는 했지만 진짜 더럽게 아프네.
병원에서 처방받은 진통제를 입에 털어넣었다.
한 달 전에 병원에서 어처구니 없는 검사결과를 받았다.
무슨 희귀병이라면서, 전세계에서 수가 많지 않은 탓에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치료약도 치료법도 없단다.
.....씨발.
입원해서 경과에 따라 항생제랑 진통제 맞는 게 전부란다. 그것도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하...."
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그게 안 된대.
진통제 때문에 입안이 썼다.
-
박문대가 연락이 끊겼다.
-선배님도 모르십니까?
-...헤어져서요.
-예?
아니 그 많은 반대와 험악한 분위기를 뚫고 시작한 연애였잖아?...라고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말이 들리는 듯 했다.
-...저희도 지금 일주일 넘게 연락이 안 되는데요.
실연의 상처로 작정하고 잠수 타기 시작한 박문대라니, 자신이 알던 그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혹시 연락오면 내게도 알려줄래요?
-......문대가 괜찮다고 하면요.
그 이상 뭘 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이라 신재현은 우선 물러나기로 했다.
집에 돌아오니 타박타박 콩이가 다가와 헥헥거린다. 콩이도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게 됐다. 데려오고 나서 벌써 7년이 넘었으니까.
"오늘도 문대 씨는 못 데려왔네. 미안해, 콩아."
콩이가 보고 싶어해요.
마법의 문자였지. 화가났던 박문대를 단박에 집에 찾아오게 하는 문장이었으니까.
왜냐고 추궁이라도 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지기라도 하면, 변명이라도 했을 텐데.
처음엔 바람을 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불쑥 불쑥 올라오는 불안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어긋난 선택을 했다. 박문대보다 작지만 비슷한 느낌의 여성과 만났다. 박문대가 잠시 일이 있다며 소홀해진 틈에 한 실험이었다.
-뭔 미친 소리야?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 말을 듣자마자 진심으로 경멸할 박문대가 떠오른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이 봐도 미친 소리다.
그리고 실험을 실패했다. 여자를 만나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고, 그걸 박문대에게 들켰을 때도 큰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론 내렸다.
아, 나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었고.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에 일주일이 좀 더 걸렸다.
신재현은 그렇게 조용히, 침잠한 채 미쳐갔다.
-
-
"호스피스...?"
남해 바닷가가 보이는 쪽에 있는 병원이었다. 그런데 일반 병원이 아니라 호스피스 병원이었다.
이미 입원한지 사개월이 넘었다고 했다.
쿵.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
직접 찾아가본 일은 없지만, 호스피스 입원 기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주로 암환자 대상이지만, 암이 아니더라도 회복이 어려운 상태의 환자가 최대한 편안히 죽음을 맞게 해주는 곳이라는 것 정도는.
...그러니까, 박문대가, 지금.
-
병원 앞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눈물을 참지 못해 펑펑 우는 사람이 선아현과 김래빈, 억지로 참고 있는 배세진과 그들을 달래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이세진. 류청우와 차유진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찾아왔느냐고 물으려다가 멈춘다.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구나.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
"문대 씨는요?"
"......"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테스타의 그 누구도 신재현을 말리거나 막아서지도 않았다.
박문대가 얼마나 신재현을 사랑했는지.
멤버들의 반대와 냉랭하기 짝이 없는 눈초리에도 하나하나 설득했던 것을 기억한다. 왜 하필 저 놈이냐는 말에 어쩔 수 없다는 투로, 그럼에도 진심이 느껴지는 박문대의 설득에 결국 두 사람이
이제 박문대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들을 보며 웃어주는 것조차 못하게 되었다.
"문대 씨는..."
숨을 몰아쉬며 묻던 신재현은 류청우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격리실 유리벽 너머에 그가 있었다.
신재현은 입을 틀어 막았다.
-
병원의 규칙에 따라 보호복을 입고 격리실로 들어선 신재현은 진통제와 수면제로 겨우 잠들었다는 박문대를 바라보았다.
...기억 속에 있는 그와 너무도 다른 모습, 그럼에도 남아있는 박문대의 특징에 입술을 깨물었다.
힘겹게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낯설다.
귓가에 아른거리는 목소리가 듣고 싶다.
경멸해도 좋으니 눈을 뜨고 저를 바라봐주길 원한다.
이제, 그 바람조차 다 사치였다.
-깨어있으면 통증이 너무 심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류청우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화를...할 수 없을 정도라....
박문대는, 절대로 자신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던가.
"...문대 씨."
그렇게 나 보기 싫었어요?
...그럴만했죠.
자신보다 따뜻했던 사람인데.
신재현은 병원 관계자가 "이제 나오셔야 해요"라고 말할 때까지 그렇게 하염없이 박문대를 바라보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었다.
-
연락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으니 멤버들이 연락하진 않았을 테고, 최대한 흔적을 지우고 들어왔는데 어떻게 찾아온 건지.
.....
-이따 들어갈게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입 모양이 그렇게 움직였다.
박문대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지마.
...그 한 마디가 안 나온다.
테스타의 멤버들이.
러뷰어가.
...신재현이.
그게, 기쁘지 않다고 하기에는, 심장이 너무 솔직하게 뛰었다.
어쩌다 저걸 이렇게까지 사랑하게 됐을까.
하루에 한 번은 꼬박꼬박 보호복을 입고 들어와서 손을 잡고, 가벼운 이야기를 하다가 간다. 시덥잖은 이야기에 85%는 콩이 이야기였다. 대꾸할 여력이 없어서 가만히 듣다가 약기운에 잠들면 나가는 게 설핏 들렸다.
조금은 다행인 것도 같다.
미음도 두어숟가락을 먹은 후에는 먹을 수가 없다. 몸이 먹는 걸 거부했다. 힘겹게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유리벽 너머의 시선이 달라붙는다.
그게 또, 나쁘지 않아서 고개를 그쪽으로 살짝 틀었다.
-
매일 아침에 찾아와 저녁까지 있다가는 신재현은 그 모습을 고스란히 눈에 담아야 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대신 아파할 수도, 아픔을 덜어줄 수도 없다. 두꺼운 유리벽 너머에서 고통스러워하다가 기절하듯 잠드는 것을 지켜보는 것 외에
언제부턴가 박문대는 자다가도 발작을 일으켰다.
미음조차 먹지 못해서 앙상해져갔다.
신재현은, 그 모든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의무였다.
-
모처럼 발작이 좀 잦아들자 하는 말이었다. 박문대의 말에 신재현은 눈을 깜빡였다.
병원 건물만 나서면 바다가 보이긴 했지만, 격리실에서 나가지도 못하는 사람이?
"...바다요?"
"응. ...들어가진 못해도."
힘없이 하는 말에 신재현은 상황을 곱씹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다?
신재현은 다시 박문대와 그 주변의 기기를 둘러보았다.
'...줄었어?'
저 가는 몸에 연결되어있는 것들이 줄었다. 확연히 차이가 났다.
"곧...애들, 올 건데."
색색, 숨을 몰아쉬던 박문대가 말을 이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바다, 같이 보게, ...좀 도와."
신재현은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을 바라보았다. 보호복 너머로 눈이 마주친 의료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바닷바람 추우니까, 따뜻..하게...하고, 가요."
신재현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생겼다.
박문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
휠체어를 타고 병원 건물을 나서 뒤쪽으로 돌아가자, 탁 트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따라 다른 환자도 없었다.
테스타 멤버들이 다가와 박문대를 한 번씩 껴안았다. 박문대는 그들을 마주 안고, 마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미 울기 시작한 멤버들은 눈물도 닦아주었다.
배세진,
선아현,
이세진,
차유진,
김래빈,
이름을 한 번씩 부르는 목소리가 어제보다 나았다.
사랑해, 그 작은 한 마디가 결국 전원을 울렸다.
평소와 달리 여유롭지 못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더니, 손만 잡은 채 더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는 꼴이 참.
"...야."
결국 가까이 오라는 고갯짓을 본 후에야 천천히 몸을 겹친다.
"..응. ...미안해요."
"...너 진짜.. ..나빴, 어..."
"응, 내가 다 잘못했어요."
물기 어린 사과가 기껍다.
나쁜 놈, 너무 늦었잖아.
어쩌겠냐,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걸.
"......사랑해요, 문대 씨."
물기 가득한 사랑 고백에 박문대가 피식 웃었다.
보이진 않아도 괜찮아.
마지막엔 들었잖아.
[부고]
테스타 박문대(29) 씨가 지난 xx일 병마로 인해...
-
넌 알아서 해라. 전에 네 집에 남겨뒀던 건 처분했냐? ..했으면 너도 가져가던가.
병원비로 많이 써서 남은 건 얼마 없을 텐데 그것도 병원에 다 기부했으면 좋겠고.
..아, 기왕이면 내 부모님 옆에 자리 좀 잡아주라. 효도 한 번 못했는데 옆에라도 있게.
(무언가 썼다가 지운 흔적)
넌 오래 있다 와.
#청려문대 #엋문

..로 시작하는 후회공X시한부수 #문대른
문대 시한부 선고받고 아직 왼한테 말도 못했는데 바람 현장 봐버리고 피곤한 기색으로 이별통보하는데
왼은 바람핀 게 조금 미안하면서도 이미 마음이 식어서 그런 거라 그대로 이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