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제 지옥으로 인도하는 저승사자 신청려가 극찬하는 것도 보고싶다...


근데 다음 참가자가...어라...서류보고 깜짝 놀라서 잠 깸. 이게 뭐야, 오타인가?
삼십대에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나왔다고...??
무대에 등장한 참가자는 과연 나이가 있어보였음. 그렇다고 아재느낌까진 아니고
나이 한번 짚어주고 넘어가라고 하이라이트까지 쳐 있어서, 박문대가 딱히 내키진 않지만 마이크를 잡는데 먼저 잡은 놈이 있음
"삼십대면 아이돌할 나이는 아니네요?"
박문대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태클걸자
"그래서 나도 살아있는 화석 소리 듣잖아요^^"
이쯤에 직전연도 대상타는 브이틱 자료화면으로 나가며
대한민국 가요계에서는 화석이 대상을 타갑니다
뭐 이런 자막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데? 진짜 데뷔하려고 나왔어요?"
오. 심사위원 앞 참가자라는 끝없이 작아지기 쉬운 포지션에서 꽤 당당하게 눈을 쏘아보며 얘기하는 걸 보니 강단이 있음.
신청려의 눈이 가늘어짐.
"법은 없는데, 상업적 논리가 있죠. 되도록 어리고 창창한 인재를 선호하는."
"그럼 한 번 볼까요. 잘못하면 다음 시즌부터는 여기도 누락한 나이제한 규정이 생길 지도 모르겠지만."
와...독하다. 저 참가자랑 원수졌어? 가뜩이나 긴장했을텐데 왜 저런
한편으로는 무대에 좀 더 기대하게 되기도 함. 제발 잘해라. 아이돌판에 발 들이려하는 자라면 모두 우상처럼 떠받드는 브이틱 청려한테 안 밀리고 기싸움하는 놈이 실력까지 있으면 진짜 재밌을텐데. 청려놈 콧대 꺾어주기도 하고.
이거 혹시 대본이냐. 여기서 브이틱 노래가 나온다고??
보통의 플로우였다면 제가 워낙 브이틱 선배님들을 존경해서...였겠지만 방금의 대치로 무슨 장갑던지는 장면이 연출될 수 있게 됐음
오디션폭망의 법칙이 브이틱 선곡이라는 걸 왜 몇년째 다들 못 깨닫고. 나야말로 잘할거라고 들고나오는 걸까. 전주 보니 특이한 편곡이 들어가지도 않았잖아...이렇게되면 브이틱만큼 잘하지 않는 이상 주목받기 힘들고
욕심이 과하셨네...하긴. 삼십대의 나이에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자니 본인이 제일 잘한다고 생각하는 거 보여주고 싶었겠지. 예전부터 계속 연습하던 곡인가.
...잘한다.
입을 열고 노래를 시작한 시점부터 잡생각이 없어지고 집중해서 감상하게 됨. 노래를 막 소름끼치게 잘하느냐?하면 그런건 아니었고, 또 곡의 전반부라 가창난이도가 높은 것도 아님
강점은 누가봐도 춤이었음. 노래를 못하는 게 아니라, 춤을 확연하게 잘 춤. 다섯명의 각자 파트 안무를 따와서는 혼자서도 여기저기 이동하며 넓게 무대를 쓰는데 노련함이 보이고
청려를 닮았음.
문대가 힐긋 청려를 쳐다봄. 쟤 네 팬인가본데. 사소한 버릇까지 쏙 닮은 게 아주, 아주 많이 돌려보고 모방한 게 분명했음. 청려는 굳은 표정이었음. 왜, 이제와 좀 미안하냐.
다른 심사위원이 입을 열자 청려가 안도한듯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슬쩍 탁자 아래로 내림.
...? 뭐야, 얘 지금 손 떨리는 거야?
"너 괜찮..."
"네."
마이크를 손으로 덮고 상체를 기울여 슬쩍 속삭여 물으려니 단호히 끊어버림.
"그런데 저만 그런가? 춤에서 뭐라 하지, 청려 씨가 보였어요! 제 착각인가요?"
청려가 퍼뜩 시선을 듬.
"역시, 청려씨 팬이시구나! 이야~"
아까의 날선 분위기를 커버할 장면을 만들려는지 엄청 오바하면서 코멘트를 마구 곁들임
"어쩐지 완전 청려씨가 보이더라고요. 얼마나 많이 돌려보고 따라했으면..이게 또, 청려씨를 따라하는 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아무래도 댄스에 있어서는 청려씨가..."
"아뇨."
화기애애하게 칭찬하려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듯 끊어내는 목소리에 모두들 긴장함. 얘가 또 무슨 쓴소리를 하며 분위기를 깨부수려고. 왜, 왜 잘 했잖아. 아님 따라해서 기분이 나쁜건가. 뭐 오리지널리티, 고유의 색깔 어쩌고 하려나.
목소리는 당황한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차분했음. 좀전까지 보인 모습은 그냥 착각한건가 싶을 정도로. 청려는 여유롭게 웃어보이며 말함.
"그냥, 가장 적합하게, 가장 잘 추는 게 그렇게 추는 것일 뿐이죠. 그렇지 않나요?"
알게모르게 청려의 눈치를 살피며 경직됐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풀어짐.
"하하하! 맞네! 베스트는 하나뿐이니까요, 닮을 수밖에 없네요!"
"안무를 좀 바꾸셨어요. 단순 동선상 수정한 거 말고, 어디 말하는지 알죠.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참가자가 난처한 듯 웃어. 눈웃음이 좀 귀여운 편인데, 진짜 좀더 어릴때 데뷔했으면 덕후 붙었을 법한데.
"제가 또 나이가 좀 있지 않습니까. 도가니 건강도 챙겨야 해서, 하하. 원래 안무로 계속 하다간 못 버틸 거 같더라고요."
"도가닠ㅋㅋㅋ아니 단어선택이 왤켘ㅋㅋ아재같아욬ㅋㅋ"
"아닠ㅋㅋㅋ아이돌 오디션에서 예비군 티내지 말라고욬ㅋㅋ"
얘 높이 올라가겠는데. 진짜 데뷔조 들면 어떡하냐. 기 존나 쎄고, 서글서글 웃는 얼굴이 호감상인데다가, 캐릭터 잡고 웃길줄도 안다. 티홀릭에 섞어놔도 잘 어울릴 것 같고, 얼굴은 레티상...
청려가 묘한 미소를 지었음. 왠지 쓰고,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괜찮다면 저희도 그 안무를 써도 될까요?"
"아, 네! 물론..."
"아뇨, 지금 이 자리서 막 답하지 마시고요. 회사랑 얘기하시죠. 안무 로열티 얘기도 듣고. 그런데 긍정적으로 고려해주세요."
청려가 세상 우아한 미소로 세상 구수한 대사를 침.
"저도 이제 도가니 챙길 나이가 되었거든요."
청려가 갑자기 제작진 쪽에 시선을 던지며 묻자 제작진이 당황함. 첫번째 라운드에서는 심사위원들이 각자 점수를 누르지만 이번에 공개되지는 않게 되어있었음
제작진의 답을 들을 새도 없이 청려가 뱉었고 주변에서 히익, 하는 소리가 들림. 첫라운드인데. 앞으로 점점 점수 인플레 될 여지를 남겨둬야 하는데. 아니, 그 정도였어? 분명 흠이 없는 무대긴 했는데!
"전 앞으로 남은 어떤 무대에도 100점을 드리지 않을 거고, 그건
"그..."
참가자가 몇 번 입술을 깨물며 참다가 결국 눈물을 쏟아냄.
"저는, 제가 계속...레티에서 떨어져서...근데도...계속 이, 몇 년을...했는데, 이 곡은..."
청려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임.
"제...소속사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
"아뇨!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참가자는 화들짝 놀라며 꾸벅꾸벅 고개를 숙임.
"정말...영광입니다! 저 사실 댄스학원에 방송출연 캡쳐라도 걸어놓으려고 나온건데,"
참가자가 눈물을 쓱쓱 문질러
"뭔가 좀..한풀이가 된 것 같습니다. 근데 여기 뭐, 성적표 같은거 안 나오나요? 방송에 청려님 100점 평가지 짤 띄워주시면 제가 알아서 플래카드 만들어 걸겠습니다."
"아, 트로피 하나 만들어드려! 제작진이 안 주면 제가 하나 만들어드릴게요!"
"아니 우승트로피 가져가셔야죠!"
대기실 구석에 멍하니 앉아있던 청려가 시선을 던짐.
"너...알던 애지."
"대체."
툭, 고개를 뒤로 떨굼.
"무슨 마음으로 저걸 췄을지 난 도무지 상상이 안 가서. 자꾸 이상한 생각에 속이 시끄러워져서. 아닌데, 다른 사람인 건데."
청려가 마른세수를 함.
"데뷔곡이었어요, 원래."
청려가 푸스스 웃음.
"개중에..그나마, 춤이랄 걸 추던 사람이었어요. 당시엔 뭐 최고로 보였고. 형이 내 춤을 닮은 게 아니라. 내가 형 춤을 닮은 거였어요."
얼굴을 묻은 양손 사이에서 흡사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옴.
"처음의 청려가, 실패작이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대로 되풀이할 수는 없었으니까. 형이 메보였으면, 또 몰라. 나는 이미 뛰어넘었고, 또 채율이가 훨씬...하."
고개를 떨구고 웃음.
"근데...더 늘었네."
뭔가...빡치네.
동고동락한 멤버를 버린다, 그래 뭐 쓰레기 같은 짓이라 볼 수 있지. 그런데 이걸 버렸다고 볼 수 있나?
그렇게 치면 가장 많이 버림 받은 건, 신재현 본인이다.
"그치만..."
속눈썹의 그림자가 처량하게 드리웠다.
"레티에서 계속 떨어뜨린 건, 난데요."
음. 그건 확실히...잠시 말문이 막혀있자 개새끼같은 눈망울이 올려다본다.
"소속사가 뭐 레티 하나뿐이냐?"
어쭈. 웃어?
"네가 고의로 떨어뜨린 점에 대해서야 미안함을 가져야겠지만, 인생을 망친 것처럼 굴지는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훌륭히 잘 살고 있는데 멋대로 그런 생각하는 것도 실례고."
멘탈이 나간 게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든 긍정적인 평가가 전달되도록 애썼다. 평소 표현력도 좋은 놈이 맞는 말을 찾을 정신도 없어 다짜고짜 숫자를 날려가면서.
마땅한 일이지만, 쉬운 일은 아니지.
"잘했네."
한두명도 아닐 것이다. 그들을 다 마주하려들다보면 청려가 부서질지도 모른다. 잘라낸 과거와 스치지도 않으려 한 것은 어찌보면 자기방어다.
충분히...훌륭하지 않은가.